69세 장총찬이 쓴 두 글자, 懺悔
김홍신은 충남 공주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악적인 청년 장총찬은 돈도 연줄도 없었던 젊은 김홍신의 분신이다. “왜 소설가가 되었나” 물으니 그는 “허영기 때문이다. 국어책에 등장하는 소설가들처럼 유명한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이태경 기자
"사람들은 나더러 돈, 명예, 권력을 다 가져봤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 괴롭고 불안정하다."
봄비치곤 꽤 험한 비바람이 불던 3일, 서울 서초동 자택 2층 서재에 앉은 김홍신은 "인생이란 게 힘들다"는 말부터 했다. 강풍에 창 밖 나뭇가지가 휘어졌다.
"모든 걸 다 가진 삶은 없다"
―밀리언셀러 작가에 국회의원까지 지냈는데 힘든 인생이라니.
"위로 올라가 보기 전에는 올라가는 것만 좋다. 돈도 없을 때는 있어야만 좋다.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다 가져보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불안해진다. 안 가졌으면 몰라도 갖고 있는 걸 놓치면 상실감이 엄청나다. 그러니 안 떨어지려고 매달리는데 인생이 어디 그런가.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법은 없다. 소위 '다 가졌다'는 유명인이 자살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회 고위층 인사나 재벌가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비슷한 얘길 한다.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건 내 성공한 면만 봐서 그렇다. 내가 실패한 부분은 창피해서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기도 했고."
―크게 실패한 적 없는 인생 아닌가.
"남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대학만 해도 전기·후기 합쳐 네 번 떨어졌다. 건국대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합격자 발표 때는 내 이름이 없었다. 한참 후에 누가 등록금을 안 내서 추가합격했다. 대학 때부터 등단하려고 계속 신춘문예, 문예지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낙방의 연속이었다.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을 때 29세였다. 당시로 치면 늦은 나이다. 내가 졸업한 대학이 문학 분야에서 약해서 그런지 등단했는데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거나 중용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이라는 것이 엄청났다. 그러다가 '인간시장'이 터지니 학벌, 집안, 고향 같은 걸 아무도 안 따지더라."
김홍신이 1981년 '주간한국'에 연재를 시작한 '인간시장'은 '장총찬'이라는 청년이 재계, 법조계, 종교계 등의 비리를 파헤치며 정의를 구현하는 이야기다. 소설이 장안의 화제가 되자 전국 곳곳에 장총찬 행세를 하는 한량들이 등장해 순진한 여자들을 울렸다. 가짜 김홍신에게 돈을 뜯겼다는 여자가 얼굴을 확인하겠다며 집으로 찾아온 일도 있었다. 인간시장 표지를 덧씌운 음란 서적이 리어카에 실려 버젓이 팔리기도 했다. 김홍신은 "책이 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돼 10만부를 돌파했다. 출판사에서 최신형 포니 승용차를 사 주더라. 2년 후 100만부를 돌파하자 자동차를 바꿔줬다"고 했다.
―인간시장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시대가 엄혹했으니까. 군부독재에 노동자들이 노사분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사람들의 울분을 대신 해소해 줄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게 장총찬이었다. 원래는 '권총을 찬다'는 의미에서 '권총찬'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검열에 걸려 '장총찬'으로 바꿨다. 인간시장 같은 소설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진심으로 이런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30대 중반에 갑자기 유명해진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
"처음엔 황홀하다. 방송 출연까지 하다 보니 세상이 전부 다 나를 알아본다. 그런데 그 황홀경이 행복과 직결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이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간시장이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렸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협박을 해 오기 시작했다. 전화도 오고 편지도 왔다. 불붙은 장작 끝에 협박 쪽지를 매달아 집 마당으로 던진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을 유괴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가뜩이나 몸 약한 아이 엄마의 심장병이 도졌다. 낮엔 황홀하다가도 밤이 오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언제 저들이 날 죽일까' '언제 날 납치할까' 하는 생각에 유서를 써놓기도 했다."
―심리적인 압박이 심했겠다.
"그렇다. 게다가 인기나 명예가 계속 상승하는 건 아니지 않나. 꺾였다 올라갔다 하는데 꺾일 때 못 견디게 된다. 그걸 이겨내려고 면벽 수행도 하고 명상하러도 다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당신 부러울 게 어딨어, 이만하면 됐지' 하는데 나는 요즘도 밤마다 참회 기도하고 108배 한다."
김홍신은 책상 위 종이를 끌어당기더니 만년필로 '懺悔'라고 적어 보였다. "'참(懺)'이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지은 잘못을 뉘우치는 거고, '회(悔)'란 지금부터 미래에 이르도록 지을 허물을 뉘우치는 거다. 남을 질투한 것도 허물이고 남이 나를 질투하게 한 것도 허물이다. 부모님께 효도 덜한 것도 잘못이고 부모님 속 아프게 한 것도 잘못이다. 그런 걸 전부 참회하면 맑아지고 편해진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신부(神父)가 되고 싶었으나 어머니 반대로 뜻을 꺾었다고 한다.
―인간시장은 통속소설이다. 무협소설 같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에 대한 열등감은 없나.
“있었다. 내 다른 작품들도 이 작품 때문에 평가절하될 것 아닌가. 처음엔 섭섭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아, 하늘은 공평하구나’ 깨닫게 되더라. 이만큼 줬는데 다른 것까지 포개서 주는 건 인생이 아니다. 준 것만큼 빼앗고, 빼앗은 것만큼 주는 게 인생이다. 게다가 인간시장은 큰 걸 줬다.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라는 역사에 남을 이름을 줬다. 돈도 줬다. 명예도 줬다. 그 바람에 국회의원도 거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다른 것까지 준다는 건 공평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절망감, 아쉬움 같은 게 있었다. 기도만으로는 그걸 이겨내기 힘들길래 선(禪) 공부를 했다.”
튀는 국회의원 김홍신
김홍신은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으로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던 1995년 개혁신당 창당에 참여해 홍보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개혁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비례대표 4번을 받았다. 그렇게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인간시장 덕에 그전에도 종종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YS, DJ, JP로부터 다 콜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소설가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갈등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애 엄마도 반대했고 주변에서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실 글 쓰는 데 지쳐서 방황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다른 국회의원과 다르게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가장 공정하고 바르게, 법안도 근사하게 해보자 했다.”
―초심(初心)대로 바르게 했다고 생각하나.
“헌정 사상 최초로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을 했다. 8년간 추석 때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 본 적이 없다. 국정감사 준비했다. 추석 때 여의도에 여는 식당이 없어 집에서 밥을 싸 가서 보좌관들과 일했다. 지금도 내가 있었던 의원회관 302호는 ‘보좌관 사관학교’ 이야기를 듣는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으로 일하던 1999년 전국 장애인시설의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실태를 폭로한 것은 김홍신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이 만들어진다. 김홍신의 당적도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한나라당 의원 시절 김홍신의 별명은 ‘상습적 당론 거부자’였다. 그는 ‘튀는 국회의원’이었다. 15대 국회 개원 때는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30일부터 일을 시작하는 5월은 이틀만 근무하는데 한 달치 세비를 받는 건 국민 혈세를 남용하는 것”이라며 세비 거부 운동을 벌였다. 국회 출입 때 의원 전용 출입구 대신 일반인 출입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 12월 10일 정기국회 폐회식 때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나의 기준이 당론과 마찰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한나라당 이름으로 총선에 나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사퇴의 변이었다.
―1998년 5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 대해 “사람들을 너무 많이 속여서 염라대왕에게 끌려가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더럭더럭 박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 ‘막말 파문’이 일었다.
“정략적으로 이용당했다. 부부가 동시에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아내를 먼저 심판했더니 나쁜 짓 세 번 했길래 입을 세 바늘 뜨고, 다음에 남편을 심판했는데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았다는 시중의 농담을 하면서 ‘거짓말 많이 하면 그렇게 된다. 대통령이라도 정치할 때 거짓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걸 상대편이 하나로 묶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결국 모욕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반성은 안 했나.
“반성했다. 내가 아무리 공정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상대가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부터는 말에 신경 쓰게 됐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새누리당 참패를 예상했다. 대통령이 레임덕 막겠다고 자기편 사람들을 당선시키려고 그렇게 작전을 썼던 것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적 식견, 사회를 보는 시각, 멀리 내다보는 감수성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정치권이 너무 모르는 거다. 대구에서 김부겸, 호남에서 이정현, 부산에서 김영춘이 당선된 사례들을 보면서 국민이 얼마나 현명한가를 알아야 한다.”
―참패 요인은 뭐라고 보나.
“대통령의 소통 부재다. 정상적인 국가의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들을 3년 만에 만난다는 게 말이 되나? 대통령이 정신 차려야 한다. 야당에 참패당했으면 이튿날 바로 대국민선언 해야 한다. ‘국민에게 심려 끼쳐 죄송하다’로 시작해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오직 국민 위해 경제정책, 청년실업, 육아, 통일문제에 남은 임기 동안 온몸 다 바치겠다’ 같은 뭐가 나와야 하지 않나.”
아내, 내 영혼에 스민 사람
2004년은 김홍신에게 상실의 해였다. 의원직뿐 아니라 아내도 잃었다. 천식과 심장병을 앓던 아내는 그해 3월 20일 결국 세상을 떴다.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은 선거가 코앞이었다. 결국 그는 500여표 차로 낙선했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
“같은 하숙집에 있었다. 내가 대학생, 애 엄마가 고등학생 때였다. 나는 집이 논산이고 애 엄마는 화성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시화전 같은 걸 하면 가끔 놀러왔었다. 일곱 살이나 아래라 연애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그냥 ‘하숙집 오빠’였다. 군대 가면서 연락이 끊겼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1978년 결혼했다.”
―언제부터 앓기 시작한 건가.
“결혼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천식으로 시작해서 기관지 확장, 심장, 면역구조 이상으로 점점 나빠졌다. 심각하게 앓은 건 5년 정도였다. 여자는 자기가 아프면 절대 사진을 안 찍는다. 애 엄마 사진이라는 게 내 후원회 때 와서 멀리 앉아 있는 걸 누가 찍어준 것밖에 없다. 그걸 내가 아는 사진작가에게 맡겨서 영정 사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볼까봐 몇 년간 옷장 뒤에 숨겨 놓았다. 아내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산소발생기를 집에 갖다놓고 호스를 코에 끼워 숨을 쉬었다.”
―가족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겠다.
“결국 내게 공황장애가 왔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으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그러니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애 엄마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직막 말을 딸 아이가 했다. 볼에 뽀뽀하면서 ‘엄마, 이 다음에는 아프지 마…’.”
김홍신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두 손을 눈두덩으로 가져가더니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김홍신이 지난해 발표한 연애소설 ‘단 한 번의 사랑’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영혼에는 그 사람이 습기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1984년 인간시장 인세로 지은 집에서 김홍신은 딸(33)과 둘이 산다. 근처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가 식사며 집안일을 돌봐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 네 개를 꼼꼼히 읽고 오후부터 글쓰기에 전념한다. 밤 11시 전에 집필을 마치고 기도와 108배로 하루를 마무리해 새벽 1시 반쯤 잠든다. 사회 고발 소설로 인기를 얻었지만 요즘 출간하는 수필집의 주제는 ‘마음 다스리기’다. ‘인생사용설명서’에서는 90년대 초 아버지를 치어 죽인 음주운전자를 용서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사고 소식을 듣고 갈 때는 울분에 차 있었다. 가해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새벽이 되어 가해자를 만나게 됐다. 나와 마주친 순간 부들부들 떨더라. 그 얼굴을 보니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게 생겼더라.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고 ‘떨지 말아요. 내가 복이 없어서 아버지를 잃은 거예요. 당신은 살아야 하잖아. 내가 용서할게’라고 했다. 아버지 빈소에 오신 어르신 한 분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물으시더라. 1초도 안 돼 내가 답했다. ‘용서하라고 할 것 같다’고. ‘그럼 자네가 잘한 거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엉켰던 내 마음이 풀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내 옹졸한 가슴을 키워주려고 그 순간 그를 끌어안게 한 것 같다.”
―참회 기도 외에 또 어떤 기도를 하나.
“신문에서 누군가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사를 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나를 위한 기도를 하면 거만해진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면 편안해진다. 예전에 수재의연금 봉투를 내고 방송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더니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웃돕기를 했으면 그만이지 왜 잘난 척을 했느냐 그거다. 그 뒤부터 애들 이름으로 몰래 하니 편안하더라.”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하나.
“나를 위한 건 이런 거다. 오늘 살아있게 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오늘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살겠습니다. 오늘 웃고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잘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베풀며 살겠습니다.”
―도인(道人)처럼 보인다.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고 싶으니까. 이 모든 것이 잘 죽기 위해서다.” 일흔을 앞둔 풍운아 장총찬이 희뿌옇게 웃어 보였다.
“같은 하숙집에 있었다. 내가 대학생, 애 엄마가 고등학생 때였다. 나는 집이 논산이고 애 엄마는 화성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시화전 같은 걸 하면 가끔 놀러왔었다. 일곱 살이나 아래라 연애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그냥 ‘하숙집 오빠’였다. 군대 가면서 연락이 끊겼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1978년 결혼했다.”
―언제부터 앓기 시작한 건가.
“결혼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천식으로 시작해서 기관지 확장, 심장, 면역구조 이상으로 점점 나빠졌다. 심각하게 앓은 건 5년 정도였다. 여자는 자기가 아프면 절대 사진을 안 찍는다. 애 엄마 사진이라는 게 내 후원회 때 와서 멀리 앉아 있는 걸 누가 찍어준 것밖에 없다. 그걸 내가 아는 사진작가에게 맡겨서 영정 사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볼까봐 몇 년간 옷장 뒤에 숨겨 놓았다. 아내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산소발생기를 집에 갖다놓고 호스를 코에 끼워 숨을 쉬었다.”
―가족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겠다.
“결국 내게 공황장애가 왔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으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그러니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애 엄마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직막 말을 딸 아이가 했다. 볼에 뽀뽀하면서 ‘엄마, 이 다음에는 아프지 마…’.”
김홍신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두 손을 눈두덩으로 가져가더니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김홍신이 지난해 발표한 연애소설 ‘단 한 번의 사랑’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영혼에는 그 사람이 습기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1984년 인간시장 인세로 지은 집에서 김홍신은 딸(33)과 둘이 산다. 근처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가 식사며 집안일을 돌봐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 네 개를 꼼꼼히 읽고 오후부터 글쓰기에 전념한다. 밤 11시 전에 집필을 마치고 기도와 108배로 하루를 마무리해 새벽 1시 반쯤 잠든다. 사회 고발 소설로 인기를 얻었지만 요즘 출간하는 수필집의 주제는 ‘마음 다스리기’다. ‘인생사용설명서’에서는 90년대 초 아버지를 치어 죽인 음주운전자를 용서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사고 소식을 듣고 갈 때는 울분에 차 있었다. 가해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새벽이 되어 가해자를 만나게 됐다. 나와 마주친 순간 부들부들 떨더라. 그 얼굴을 보니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게 생겼더라.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고 ‘떨지 말아요. 내가 복이 없어서 아버지를 잃은 거예요. 당신은 살아야 하잖아. 내가 용서할게’라고 했다. 아버지 빈소에 오신 어르신 한 분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물으시더라. 1초도 안 돼 내가 답했다. ‘용서하라고 할 것 같다’고. ‘그럼 자네가 잘한 거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엉켰던 내 마음이 풀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내 옹졸한 가슴을 키워주려고 그 순간 그를 끌어안게 한 것 같다.”
―참회 기도 외에 또 어떤 기도를 하나.
“신문에서 누군가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사를 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나를 위한 기도를 하면 거만해진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면 편안해진다. 예전에 수재의연금 봉투를 내고 방송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더니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웃돕기를 했으면 그만이지 왜 잘난 척을 했느냐 그거다. 그 뒤부터 애들 이름으로 몰래 하니 편안하더라.”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하나.
“나를 위한 건 이런 거다. 오늘 살아있게 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오늘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살겠습니다. 오늘 웃고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잘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베풀며 살겠습니다.”
―도인(道人)처럼 보인다.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고 싶으니까. 이 모든 것이 잘 죽기 위해서다.” 일흔을 앞둔 풍운아 장총찬이 희뿌옇게 웃어 보였다.
-조선일보, 2016/5/7
'자기계발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라델피아 '빈곤의 소굴'서 13년째… 이태후 목사 (0) | 2016.05.28 |
---|---|
일본 교육개혁 이끄는 후지하라 가즈히로 교장 (0) | 2016.05.14 |
마술사 이은결 (0) | 2016.05.04 |
가구 인생 40년 손동창 퍼시스 회장 (0) | 2016.04.23 |
'링 위의 전설' 파퀴아오 (0) | 2016.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