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순원의 작품 중에 ‘링반데룽’이란 단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공수병으로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멀어진 애인 ‘설희’와의 재회를 꿈꾸지만 제자리만 맴돌 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링반데룽을 안타까워하는 작품입니다.
링반데룽은 독일어인데 ‘링(Ring)’은 ‘원’을, ‘반데룽(Wanderung)’은 ‘방황’ 혹은 ‘방랑’을 의미합니다. ‘원형방황’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등산용어인데 동일한 지점에서 일정한 장소를 원을 그리며 계속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똑바로 나아간다고 믿고 걸었는데 한참 후 바라보니 원래 출발한 그 자리에 서 있더란 말입니다. 등산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링반데룽, 즉 원형방황 혹은 환상방황(環狀彷徨)입니다. 계속 한자리를 맴돌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건 눈사태나 폭풍우 자체보다 무서운 적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을 보냈고 이제 한 주 후면 부활절을 맞게 됩니다. 혹여 우리는 원형방황처럼 그렇게 무의미하게 맞는 절기는 아닌지요. 매년 있어왔고,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고, 생각 없이 걸어가는 사순절은 아닌지요. 주님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는데 제자리만 겉돌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의미 있게 살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처럼 뜻 깊게 살지 못 한다면 죽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국민일보 겨자씨, 2016/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