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믿음을 보시고

하마사 2015. 8. 2. 17:21

본문: 마 9:1-8

제목: 믿음을 보시고

찬송: 545장

목표: 믿음을 보시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한다.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자신감이 있습니다. 육체미를 한 남성들은 여름에 몸에 붙는 티를 입고 자신들의 멋진 근육을 자랑합니다. 몸매가 예쁜 여성들은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합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은 외모를 자랑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여 줄 것이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가 그렇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중풍병으로 누워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눅이 들고 기죽은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침상에 누운 채 사람들에게 들려 왔다가 병을 치유 받고 죄 사함까지 받아 집으로 갔습니다. 일석이조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가 없어도 됩니다.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해도 됩니다. 돈이나 학력이 없어도 되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됩니다. 사회적 스팩이나 경력이 없어도 되고 건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령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어떤 조건도 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베푸신 은혜는

1. 죄 사함의 은혜(2절)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지방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 속에는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을 다른 성경은 “안심 하여라, 기운을 내라, 용기를 내어라”로 번역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죄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평안이 없었습니다. 자신감과 용기를 잃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죄가 그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삶의 문제는 바로 죄였습니다. 죄는 마음속에 불안을 야기하고 자신감을 잃게 만듭니다.

죄를 무서워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죄를 지었을 때 당하는 고통을 문둥병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오늘날 한센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레위기 13:45-46절은 한센병에 관한 정결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천벌을 받아 생긴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구스여자를 아내로 취했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이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하여 7일 동안 진 밖으로 쫓겨난 일이 있었습니다.

죄는 한센병과 같이 고통을 줍니다. 한센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는 것은 극도의 슬픔과 애도를 표하던 히브리인들의 관습적 행위였습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는 것은 주변에 정결한 사람들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접근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여러 가지 마음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물론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은 그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마귀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를 지으면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해산의 고통이 찾아왔고 아담에게는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하는 고통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또한 죄는 소외를 가져다줍니다. 한센병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과 분리되어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진에서 쫓겨나 진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왕따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외시키는 것은 죽음보다 큰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오늘날도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시켜 감옥으로 보냅니다. 중죄인은 독방으로 보냅니다. 철저히 소외시켜 고통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고 소외시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마귀의 종이 되어 더 깊은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한센병의 징조가 있는 의복 등은 불살랐습니다. 작은 죄라 할지라도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모든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과 함께 하던 이방인들의 불평이 온 이스라엘을 전염시켜 하나님께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일상자에 썩은 과일이 한 개 들어있으면 상자 안에 있는 모든 과일이 썩듯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죄라고 하찮게 보면 결국 그 죄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부패하게 됩니다. 죄의 전염성은 한센병처럼 무섭습니다.

한센병이 육체를 썩게 만들듯이 죄는 우리의 영혼을 부패하게 만들어 영적 고통을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악을 전염시키는 심각한 전염병입니다. 중풍병자는 죄로 인해 병이 찾아왔고 죄의식과 고통 속에 살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문제를 아시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신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생각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악한 생각을 아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외모만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과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4-6절) 우리에게는 둘 다 어려운 말입니다. 둘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할 수도 없고 말로 중풍병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중에 병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와 엘리사선지자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병을 고쳤습니다. 하지만 죄를 사하는 권능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을 받은 죄인입니다. 이 죄에서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법원에서 죄인이라는 판결을 받지 않았다고 죄인이 아닙니까?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살인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무서운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의인만이 갈 수 있는 천국에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 때문에 기죽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십니다. 과거, 현재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까지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용기 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베푸신 은혜는

2. 치유의 은혜(6절)

6절,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현대인은 많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성 질환, 노이로제, 우울증, 강박증, 편집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2년 11월에 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여명 및 건강수명’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에 태어난 신생아가 평생을 살면서 질병에 시달리는 기간이 8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질병과 가깝습니다.

질병의 원인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음식, 온도, 스트레스, 피로, 전염 등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메르스도 중동에서 발병한 질병인데 한국까지 와서 온 나라를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병자들을 찾아가 삶의 고통을 공감해주면서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육신적인 여러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신적으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귀신이 들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있었고 38년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한센병, 중풍병에 걸린 사람, 열병,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도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수가성의 여인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질병도 치유해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죄가 병의 원인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로 인해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를 쫓아내야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물처방이나 수술을 받아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연요법이나 민간요법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병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직접 고쳐주시는 병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치료방법이든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치유의 책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과 공동체를 치유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든 개인과 공동체를 치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치유의 책입니다. 출애굽기 15:26절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03편에서 다윗은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노래했습니다. 과거에만 모든 병을 고치신 하나님이 아니라 현대의 다양한 병까지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각종 암과 희귀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있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병원심방 가서 회복된다는 소망적인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죽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환자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수명을 더 단축시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낫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 사람들에게 들려왔던 그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일어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누웠던 침상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누워 지내야 한다고 체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 걸어서 자기 손으로 침상을 들고 갈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능 있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 치유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화)

실제로는 효과가 없는 약이라도 환자가 믿고 복용하면 치료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의사 헨리 비처는 모르핀이 부족하자 식염수를 모르핀이라 속이고 통증을 호소하는 병사들에게 투여했습니다. 놀랍게도 병사 중 상당수는 실제로 통증이 완화되는 걸 느꼈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2007년 불면증 환자들이 수면제의 효능과 상관없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 안정을 느껴 불면증이 나아졌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는 이와 반대로 환자가 효과 있는 약을 복용하고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믿음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복용하고도 그 약의 효능을 믿지 않으면 효과가 없지만 가짜약이라도 효능이 있다고 믿으면 특효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짜 약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권능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가서 치유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베푸신 은혜는

3. 관계회복의 은혜(7절)

7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예화)

한 청년이 사모하는 여인에게 2년 동안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상대자는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낸 젊은이가 아니라 그 편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배달해 준 우편배달부 청년이었습니다. 종이쪽지보다 얼굴과 얼굴의 대면, 눈과 눈의 마주침이 중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지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배달부 청년이 기다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만남은 관계를 만듭니다. 따라서 인생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의 성공은 관계의 성공입니다. 미국 카네기공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을 대상으로 성공의 비결을 분석해 보았더니 ‘기술과 실력’은 성공 요인의 15%였고 ‘좋은 인간관계와 공감의 능력’이 성공 요인의 85%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해 36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어려울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라는 사회적 연계(Social Connections)를 묻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우리나라가 72%로 가장 낮았다고 합니다. 이는 OECD 평균 88%보다 16% 포인트 낮은 수치입니다. 관계성이 약하다는 통계수치입니다. 관계성이 약하면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크레익 엘리슨은 외로움에는 정서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실존적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서적인 외로움은 우리의 감정 상태에서 오는 것이고, 사회적인 외로움은 이웃과의 교제가 사라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외로움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원천적인 것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가장 근원적인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인간은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숙명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외로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과는 어떤 친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와 질병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질병이 갈등을 야기하여 가족관계와 다른 인간관계를 깨트립니다. 더구나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병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집으로 가라는 목적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가장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먼저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회복을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육체적 건강을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깨어진 관계까지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47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아름답고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고치고, 싸매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고,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영원히 종이나 포로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욥이 생명이외에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은 후에 갑절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웃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잔치집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찢기고 상한 삶의 문제를 회복시켜주는 분이십니다. 가정과 일터에 무너진 부분이 있습니까?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무너졌습니까? 하나님이 회복시키심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치유를 받았을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하다가 눈을 떴을 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말씀하셨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치러 온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당사자의 믿음이 우선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믿음도 보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적으로 권면하고 예수님께 나가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영적, 육체적, 사회적인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전인적인 구원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행복만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이나 지나친 현실 참여적 신앙, 정치적 구원만을 주장하는 편협한 신앙, 또는 사회와 이웃과 단절된 채 개교회주의와 신비주의로 빠져드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전인적인 구원을 전하는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중풍병자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과거처럼 똑 같이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은혜를 기억하며 평생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던 열 명의 한센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마리아사람 한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의 은혜, 치유의 은혜, 관계회복의 은혜를 주셨듯이 은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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