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가해자를 용서하는 살인 피해자 유족회'라는 단체가 있다. 인디애나주 빌 펠케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1985년 열여섯 살 소녀 폴라 쿠퍼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펠케 할머니 집에 침입했다. 할머니를 꽃병으로 내리치고 온몸 서른세 군데를 칼로 찔렀다.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것은 단돈 10달러였다. 쿠퍼는 미국 역사상 가장 어린 여자 사형수가 됐다. 펠케는 쿠퍼 처벌을 간절히 원했지만 사형 선고가 나오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남을 도우며 천사같이 살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쿠퍼가 죽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펠케의 노력으로 쿠퍼는 징역 60년으로 감형됐다가 재작년 27년 만에 풀려났다.
▶1960년대 초 '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필라델피아에서 불량배에게 살해된 한국인 유학생 오인호씨 얘기였다. 범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한국에서 오씨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살인자들의 황폐한 영혼은 안타깝지만 우리 가족은 관대한 처분이 내려져 이들이 새 삶을 이어가기 바랍니다." 그는 "이들이 석방된 뒤 사회 적응에 쓰기 바란다"며 500달러를 함께 부쳤다. 지역 신문은 '악(惡)을 선(善)으로 갚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도 분노와 증오와 응징하고픈 마음을 삭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서양 종교들이 하나같이 용서를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선 남을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인지 모른다.
▶네덜란드 여성 코리텐 붐은 2차대전 때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가족 모두를 강제수용소에서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나중에 평화와 화해의 전도사가 된 그는 가족을 죽음에 몰아넣고 자신을 옷 벗기고 때렸던 수용소 간부를 강연장에서 맞닥뜨렸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 온 세상 사람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했다.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죽였지만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며칠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흑인 교회에서 총을 난사해 아홉 목숨을 빼앗은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한 유족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유족은 "다시는 엄마를 안을 수도, 엄마와 얘기를 나눌 수도 없지만 당신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있기를 기도하겠다"고 했다. 외신은 "끔찍한 사건 재판정이 화합과 치유의 생생한 증언장이 됐다"고 전했다. "용서의 가장 큰 혜택은 용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했던가.
-조선일보 만물상, 201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