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203363호 무덤이 있다. 망우리에선 드문 일본인 무덤이지만 한국인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늘 누군가 놓고 간 꽃이 있다. 1931년 4월 2일 무덤 주인이 마흔 나이에 죽었을 때도 추모열이 대단했다. 조문 온 조선인들은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로 상여를 메려 했다. 청량리에서 이문리 언덕으로 가는 길에선 마을 사람들이 노제(路祭)를 지내고 가라고 장례 행렬을 붙잡았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그는 조선을 사랑하다 유언대로 조선 풍습에 따라 안장돼 조선의 흙이 됐다.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백자와 공예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선 미술품 수집은 여느 일본인의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사카와 형제는 또 다른 조선미 예찬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손잡고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고 애써 모은 미술품 3000여 점을 아낌없이 기증했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그는 조선을 사랑하다 유언대로 조선 풍습에 따라 안장돼 조선의 흙이 됐다.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백자와 공예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선 미술품 수집은 여느 일본인의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사카와 형제는 또 다른 조선미 예찬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손잡고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고 애써 모은 미술품 3000여 점을 아낌없이 기증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여든네 번째 기일(忌日)인 어제 망우리에서 예년과 다른 추모 행사가 열렸다. 한국 이수현 의인(義人) 문화재단 설립위원회가 주관한 행사에 다쿠미 고향 일본 야마나시현 주민들이 참석해 한·일 합동 추모식이 됐다. 이번 행사는 이수현재단 설립위원회가 의인의 삶을 발굴해 기리는 사업의 첫 순서였다.
▶이수현은 2001년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숨졌다. 당시 한 일본 평론가는 "스물여섯 살 이수현 청년은 사어(死語)가 돼버린 이타적(利他的) 희생을 몸으로 실천해, 옆집에 누가 사는지 흥미도 관심도 없는 슬픈 일본 사회를 반성시켰다"고 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와 이수현의 의로운 행동은 국경을 넘어 오로지 인간애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나라 국민 마음속에 있는 인간애의 불씨를 지필 큰 정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조선일보 만물상, 20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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