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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스코필드 박사

하마사 2015. 4. 10. 09:25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신 212분 가운데 외국인이 딱 한 사람 있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더해 '서른네 번째'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이자 의사 스코필드 박사다. 구한말 이후 150여 선교사가 조선에 왔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까지 뛰어든 이는 드물다. 오늘까지 전해오는 탑골공원의 분노한 태극기 물결 사진들은 대부분 스코필드가 찍었다.

▶그는 3·1운동 보름 뒤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일제의 끔찍한 만행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와 팔이 불편한 몸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일제 경찰은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열다섯 살 넘은 남자들을 교회 안에 밀어넣고 창문으로 총질해 스물세명을 학살했다. 그러곤 교회에 불을 질렀다. 스코필드는 생생한 현장 사진을 찍고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만들어 일제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과 동료를 면회해 고문과 학대의 실상을 바깥에 알린 것도 그였다.

[만물상] '호랑이' 스코필드 박사
▶1920년 일제가 강제 추방했던 스코필드는 1958년 한국에 다시 와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됐다.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그가 늘 하던 말대로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불의와 사회 부조리에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1960년대 남긴 어록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한국은 약소국인데 그나마 국토가 분단돼 있소. 이 가장 큰 분열 속에 다시 수백 가지 작은 분열이 우글거린단 말이오."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 스코필드 박사'라고 불렀다.

▶스코필드는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면서 존칭을 생략한 적이 없었다. 늘 유머와 자상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지각을 하고 변명할라치면 "핑계를 대지 마시오"라며 우리말로 따끔하게 가르쳤다. 그는 월급을 쪼갠 장학금으로 젊은 인재들을 숱하게 길러냈다. 1970년 세상을 뜨며 많지 않은 재산을 서울 보육원 두 곳과 YMCA에 헌납하고 빈 몸으로 돌아갔다.

▶모레 일요일은 스코필드 박사가 세상을 뜬 지 45년 되는 날. 오늘 오전 서울대 수의대 스코필드홀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 기념식이 열린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지면서 스코필드는 누군가 "호랑이 할아버지!" 부르면 "이젠 호랑이가 아녜요. 고양이밖에 못 돼요" 하며 웃겼다고 한다. 그가 낯선 땅에 와 나눈 사랑, 한결같이 가르친 정의와 성실은 우리가 배우고 이어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이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5/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