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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판사, 반세기 지나도 빛나는 '法官의 길'

하마사 2015. 3. 18. 16:41

반세기 지나도 빛나는 '法官의 길'

-'使徒 법관' 김홍섭 판사 50주기
김병로·최대교와 '법조 3聖'
"나도 죄인… 어떻게 판결하나" 사형수와 그 가족들까지 챙겨
추념식에 법조인 200여명 참석


	타계 1년 전인 1964년 가족 묘지 앞에 선 김홍섭 판사.
타계 1년 전인 1964년 가족 묘지 앞에 선 김홍섭 판사. 그는 가족 묘비에‘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라고 썼다. /김홍섭 판사 유족 제공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재판장석의 나와 피고인석의 여러분 중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해서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4년 전인 1961년 10월 '경주호 납북 미수 사건' 재판장 김홍섭 부장판사는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묵념했다. 피고인들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본 고(故) 박찬일 변호사는 1965년 "많은 법정을 다녔지만 재판장이 목메여 말문이 막히고 피고인들이 숙연히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사도(使徒) 법관' 김홍섭(1915~1965) 판사의 50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그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법조 3성(聖)'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추념식에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상민 국회 법사위원장 등 법조계 인사 200여명과 김 판사의 부인 김자선 여사, 차남 김계훈 서울시립대 교수가 참석했다. 양 대법원장은 추모사에서 "김 판사의 삶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법관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삶과 철학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고, 추념식장에 전시된 사진들을 살펴봤다. 법원과 유족이 2년간 작업해 펴낸 820쪽 분량의 '법관 김홍섭 자료집'도 공개됐다.

191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김 판사는 원평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독학해 1939년 일본 니혼대 법률과에 진학, 1년 만에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김 판사는 검정 고무신에 상·하의는 짝짝이로 다녔다. 점심은 밥과 무짠지만 든 도시락이었다. 그와 일한 서정원 전 대법원 도서실장은 "출장을 가면 기차 이등칸만 타는데, 역무원이 '판사가 이등칸에 탈 리 없다'며 다른 사람 놔두고 김 판사만 표 검사를 했다"고 했다.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열린 김홍섭 판사 50주기 추념식에 참가한 인사들이 국기 배례를 하고 있다.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열린 김홍섭 판사 50주기 추념식에 참가한 인사들이 국기 배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양승태 대법원장, 고영한 대법관, 조희대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 김홍섭 판사의 부인 김자선 여사, 차남 김계훈 서울시립대 교수, 심상철 서울고법원장, 조용구 사법연수원장. /장련성 객원기자
김 판사는 늘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고, 죽음의 죄를 논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6·25전쟁통에 쌀 배급을 몰래 더 타간 여인을 재판하게 된 그가 지인에게 "나도 배고파서 배급을 좀 더 타 먹었는데 같은 죄인끼리 어떻게 재판하느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피고인과 검사의 사정을 두루 살핀 덕에 그의 재판에 불복해 항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에겐 '사도 법관' 말고도 '사형수의 아버지' '법복 입은 성직자' 등의 별명이 따라다닌다. 사형수들을 찾아다니며 "진정하게 참회하라"고 설득하고, 박봉을 쪼개 책을 선물하거나 가족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수와 주고받은 편지는 남아 있는 것만 200통이 넘는다.

김 판사는 1964년 3월 서울고법원장으로 옮긴 직후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끝까지 법원을 떠나지 않았다. 1965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사람이란 날개가 없었다'는 제목의 짧은 글이 실렸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고문이다. '꿈을 이루어보려는 希望(희망)을 간직해 본 적이 있었고, 희망을 따라 꿈에 애태워 했던 한때가 있었소. 그러나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진정 꿈일 수 없고 잡히고야 말 標的(표적)이 어엿한 표적일 수도 없을지라, 이제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오직 평상심으로서 발 앞을 살펴 失足(실족)의 禍(화)를 조심하고자 할 따름이요.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 안 것 같소.' 2개월 뒤 그는 가족에게 "행복한 삶이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 2015/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