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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거인 리콴유 싱가폴 전 총리

하마사 2015. 3. 24. 13:14

1923~2015
리콴유 싱가포르 初代총리 타계… "내집 기념관 만들지 말고 허물라"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91) 전 총리가 23일 오전 3시 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1959년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취임한 그는 31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400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2750달러로 30배 이상 증가했다. 리 전 총리가 초석을 다진 경제는 그 뒤에도 발전을 거듭해 작년 싱가포르 GDP는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아시아 1위)였다. 국가 주요 인프라를 건설해 싱가포르가 아시아 물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도 그였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는 경제 신화를 이룩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때문에 '개발 독재'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그럼에도 리 전 총리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에게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라. 표현의 자유? 아니다. 집, 의료품, 직업, 학교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그는 실용주의를 놓지 않았다. 4년 전 리 전 총리는 "내가 죽거든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지 말고 헐어버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집을 철거할 경우 도시개발 계획을 바꿔 주변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있고, 땅값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네루 총리나 셰익스피어의 집도 시간이 지나 폐허가 됐다"며 "가족도 사진이 있으니 미련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은 오는 29일 국장을 치른 뒤 화장(火葬)될 예정이다. '형식'보다 '합리성'을 중시하던 평소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2010년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할아버지 영정 옆에서 '저승 노잣돈'이라며 종이돈을 태웠습니다. 크면서 저는 그것이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죽고 없는데, 어떻게 그 돈을 가져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날 국회와 주요 관공서는 조기(弔旗)를 내걸었다. 일곱 살, 여덟 살 딸·아들과 함께 싱가포르 종합병원에 마련된 추모 광장을 찾은 린리우(38)씨는 "아이들에게 그분이 싱가포르의 영웅이고, 철인이며, 싱가포르를 일으킨 수퍼맨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 정상들도 잇따라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리 전 총리는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위대한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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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짓밟는 日本軍 보며 '생존이 우선' 신념 굳혀
英 유학 후 변호사로 활약, 31세에 정치인으로 첫걸음
반발 불구 英語를 공용어로 민족 갈등 풀고 세계화 추구
세계적으로 낮은 법인세율, 양도세·상속세는 아예 없어… 1만여 다국적 기업 끌어들여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91) 전 총리가 23일 오전 3시 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AP 뉴시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정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자 세계적인 물류·금융·비즈니스 중심지다.

빛처럼 영리했던 젊은 시절

리콴유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혁명가 쑨원·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등과 같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북부에서 남부·동남아로 이주한 한족) 출신이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가 깃든 이름을 얻은 소년은 명문 래플스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저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
이후 리콴유의 삶은 대학 시절 요동친다. 대공황 여파로 집안이 몰락하는 걸 지켜봤고, 학교에선 다른 인종 출신들과 물과 기름처럼 지내며 사회 부조리에 고민했다. 훗날 인생의 동반자로 해로한 두 살 연상의 아내 콰걱추(1920~2010)와 만난 곳도 래플스대였다.

식민지 시대에 배운 실용주의

1941년 12월 들이닥친 일본군에 동족 수천명이 살상당하자 리콴유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통치 이념이자 신념인 '실용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한다.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해 연합군의 모스부호 해독 임무를 맡아 연일 들어오는 추축국 패전 소식에 새 세상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혼란이 가시지 않자 심란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리콴유 연대기 표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에서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고,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의 창립을 이끌며 사무총장에 올랐다. 5년 뒤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서른여섯 살 리콴유는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식민지 언어를 공용어로

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1963년 말레이연방 가입을 결정했으나 공업화 추구 노선이 말레이연방의 다른 구성원들과 충돌하며 2년 만에 쫓겨나듯 탈퇴했다.

리콴유가 당장 풀 문제는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 갈등이었다. 이를 풀 실마리는 '강력한 공용어'라고 보고, 그는 어느 민족의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언어' 영어에 '제1 공용어' 지위를 부여한다.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의 반발에도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하지만 '유교적 권위주의'만큼은 국가 운영 이념으로 극대화시켰다. 혹독한 법치와 반부패 제도를 확립해 거리에서 껌만 뱉어도 심하면 태형(笞刑)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마약은 0.5g 이상 가져도 사형당할 수 있는 나라로 바꿨다. 부패행위조사국(CPIB)으로 공직자를 밀착 감시했고, 1995년 가족이 사들인 주택 가격이 올라 논란이 일자 자신도 조사를 받았다.


	싱가포르 개관 표

리콴유는 강경 반공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온건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좌파와 연정을 꾸렸으며, 급진 공산주의에 맞서며 국익을 좇았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 독재 비판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을지,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에 대해 나는 늘 후자(後者), 마키아벨리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언론 자유보다 우선한 것은 국가 단합"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당이 정부이고 정부는 싱가포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 등의 생전 발언은 국가 중심 노선에 대한 그의 확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1988년 내정간섭을 문제삼아 미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비판을 용납 않는 통치 방식 때문에 '정치 후진국'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정치는 권위주의, 경제엔 자유

하지만 리콴유는 산업 분야에선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해상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극대화시켜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업자 민원 처리 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17%)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이런 개방적인 경제정책 덕에 1만여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200여곳이 둥지를 틀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 안주"라며 국민을 독려해온 그는 31년 통치를 마감하고 1990년 퇴임한 뒤에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정부 운영은 오케스트라 지휘와 같다. 유능한 팀 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악기'가 되어준 각료와 국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63년을 함께 산 반려자 콰걱추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혼수상태의 부인 옆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해온 만큼 사별의 충격은 컸고, 5년 뒤 천상에서 재회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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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타계] "無에서 有창조한 나라" 6차례 訪韓… 평소 "박정희에 배워라" 강조


[리콴유와 한국]

-"산업화는 박정희의 덕" 평가
1979년 서거 직전 첫 訪韓
DJ와 '아시아적 가치' 놓고 민주주의 논쟁 벌이기도

-"反부패 실천해야" 쓴소리도
"지도층이 청렴결백 않으면 모든 것이 시간낭비일 뿐"

-과거史 상처를 실용으로 극복
日엔 포용정책 펼쳤지만 "왜 잘못 사과 안하나" 비판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재임 시 세 차례, 퇴임 후 세 차례 한국을 찾았다. 박정희 이후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전 대통령들을 모두 한국이나 싱가포르에서 만났다. 2006년엔 지방선거를 지휘하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찾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재계 리더에게 조언하며 양국 관계를 도왔다.

그는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직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동남아 국가들과 관계 강화를 원했던 박 전 대통령이 그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리 전 총리는 2000년 펴낸 회고록 '일류 국가의 길'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그가 없었다면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평했다.

(위 왼쪽 사진부터)1955년 화려한 정치 데뷔 - 그의 정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조직한 인민행동당은 창당 다섯 달 만에 치른 1955년 4월 총선에서 선출직 25석 중 3석을 획득했다. 당시 선거 직후 리콴유의 모습. 아들 리셴룽과 -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왼쪽이 그의 부인 콰걱추(2010년 사망) 여사, 오른쪽 아이가 리셴룽 총리다. 1978년 덩샤오핑과 회담 - 덩샤오핑(鄧小平·사진 앞줄 오른쪽)은 1978년 싱가포르에서 리 전 총리(사진 앞줄 왼쪽)를 만난 뒤 개혁·개방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1979년 서거 일주일 전 박정희 前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과도 인연 - 1979년 10월 첫 방한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리콴유(오른쪽) 전 총리에게 수교 훈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인 광화훈장을 수여하는 모습(왼쪽 사진)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과 함께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날 청와대 만찬에서 리콴유(오른쪽) 전 총리와 건배하는 모습(오른쪽 사진). /저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페이스북·신화 뉴시스·한국정책방송원·뉴시스
리 전 총리는 당시 경주도 방문했는데, 박 전 대통령은 포스코(당시 포항종합제철)를 보여주고 싶어 일부러 서울에서 포항공항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자동차로 제철소를 지나 경주로 가도록 했다. 자존심 강한 리 전 총리는 차창 밖 제철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리 전 총리가 한국의 발전상을 인정하게 된 것은 경주 관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황금 들판'을 보면서였다. 당시 리 전 총리를 수행했던 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은 "경부고속도로 양쪽으로 누런 벼 이삭과 빨간 고추 등이 가득 펼쳐진 가을 들녘을 바라보던 리 전 총리 얼굴이 부러움과 오기 섞인 표정으로 상기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1986년 도이머이(개혁·개방 정책)에 착수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박정희에게 배우라"고 말하는 등 한국 성공 사례를 곳곳에서 인용했다. 1990년대 중반 리 전 총리를 만났던 새정치민주연합 정대철 상임고문에 따르면, 리 전 총리는 당시 한국에 대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대단한 나라"라고 칭찬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싱가포르는 어떻게 부패 문제를 해결했느냐"고 묻자, 그는 "고위 지도층이 먼저 청렴결백하고 부하들 앞에 깨끗하지 않고서는 모든 게 시간 낭비"라고 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민주주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리 전 총리가 서구를 따라잡으려면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일부 제한할 수 있다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1994년 미국 정치 평론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하자,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이 이후 같은 잡지에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다는 아시아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박 기고를 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정치인의 논쟁에 외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아들 리셴룽 총리의 고별사.














리 전 총리는 한국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한국의 노사(勞使)가 일본이 이룩한 노사 간 협력 관계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했다. 또 "한국도 미국·유럽처럼 투명한 경영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하는데, 한국 기업 관행은 여전히 공식적인 법·규정보다 비공식적 관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했다. 또 성공한 사람과 덜 성공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공정한 관계가 보장될 것이라는 국민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런 신뢰가 회복되면 한국인이 다시 한 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리 전 총리가 생전에 보여준 과거사 철학에서도 한국 등이 참고할 점이 많다. 싱가포르는 150년간 영국 식민 통치를 받았고, 태평양전쟁 때 일본 침략으로 고통받았지만, 이러한 과거사에 대해 원한을 갖기보다는 이를 발전 원동력으로 삼았다.

일본에 대해서는 "점령 기간 일본의 잔인함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면서도 실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일본이 싱가포르 점령 당시 중국 젊은이들을 대량학살한 사건에 대한 사과·보상을 받으려고 1960년대 일본을 방문했다. 이케다 당시 일본 총리는 사과 대신 5000만달러를 보상금 또는 차관으로 제공했다. 보상은 미흡했고 사과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일본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 역대 일본 총리들과도 관계 증진에 힘썼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는 것에는 끝까지 분노했다. 그는 "사과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후회·유감을 표명하는 것은 단지 현재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는 장래 일본의 의도에 대해 의혹을 증폭시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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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언어 초월한 추모물결]

아들 리셴룽, 3개國語 추모사
中·말레이·인도계 국민들 "그분께 감사" 한마음 눈물

23일 오전 8시, 회색 셔츠와 푸른색 넥타이 차림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리셴룽(李顯龍·63) 싱가포르 총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를 향한 추모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로 "오늘 아침 미스터 리콴유가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며 말문을 연 뒤, 약 2분간 말레이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다음엔 중국어로 고별사를 읊었다. "리셴성(李先生·아버지 리콴유를 지칭)이 우리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할 때 목이 멘 듯 잠깐 울먹거렸지만, 다시 영어로 바꾼 뒤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끝을 맺었다. "나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이 나라를 만드는 데 바쳤다. 그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생(生)의 마지막 날, 나는 무엇을 가지게 될까? 싱가포르의 성공이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 바로 내 인생이다."


	23일 리콴유 전 총리가 숨을 거둔 싱가포르종합병원 인근.
23일 리콴유 전 총리가 숨을 거둔 싱가포르종합병원 인근. 시민들이 찾아와 헌화하며 추모하고 있다. 그의 쾌유를 빌며 가져다 놓았던 꽃과 풍선, 편지가 쌓여 있다. 이날 싱가포르 총리실이 인터넷에 개설한 '리콴유 추모 페이스북'엔 13만여명이 방문했다. /싱가포르 일간 투데이
리 총리가 3개 국어로 추도사를 한 이유는 싱가포르의 다양한 민족 구성을 의식해서다. 싱가포르는 국민 약 75%가 중국계, 13%가 말레이계, 나머지 12%는 인도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사용 언어도 다양하다.

하지만 다양한 민족, 언어에도 세상을 뜬 '파파'(싱가포르에서 리콴유를 부르는 애칭)를 애도하는 마음은 모두 하나였다. 46년 전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건너온 토 유 투랏(66)씨는 이스타나 대통령궁 앞에서 땀을 흘리면서 차례를 기다리다 꽃을 바쳤다. 회사를 결근하고 추모하러 왔다는 그는 리 전 총리를 '아버지'(papa)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는 매우 강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같은 사람입니다."

중국인 아버지를 둔 타이 쿤 티압(69)씨는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싱가포르 토박이다. 그는 "내가 어렸을 적의 싱가포르를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의 싱가포르는 그때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에겐 물이 없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사 온 물을 마셔야 했죠. 물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물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 리콴유는 우리에게 물을 준 존재였습니다." 추모 행렬 중에는 중국계, 말레이계뿐 아니라 뉴질랜드 등 백인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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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시대 대한민국이 리콴유를 더 추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1959년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후 1990년까지 31년간 재임했고, 그 후에도 선임장관·고문장관의 직함으로 최근까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세기가 넘는 그의 리더십 아래서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작년에는 5만6000달러로 불어났다. 가난한 어촌을 아시아에서 일본을 뛰어넘는 부유한 강소국(强小國)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싱가포르는 1965년 주석·고무 같은 천연자원이 많았던 말레이시아연방으로부터 강제 분리돼 어쩔 수 없이 독립했다. 싱가포르에 남은 것은 영세 식품 공장과 고무업체 몇 개뿐이었다. 당시 41세였던 리콴유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방법이란 국가 관리형(型) 자본주의 실험이었다. 정부 주도로 선진국들과의 교역과 과감한 외자(外資) 유치를 통해 싱가포르의 살길을 찾았다.

그는 싱가포르의 유일한 자원은 인재(人材)뿐이라며 청년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학교·직장에서 영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인재 대국(大國)을 향한 그의 집념은 외국 우수 인재들을 대거 끌어들이는 정책으로 발전해 지금은 530만 인구 중 130만명이 외국인일 만큼 개방적인 나라가 됐다.

리콴유는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規律)이 필요하다'는 통치 철학에 따라 반(反)부패 정책과 법치(法治)를 철저히 고수했다. 독립 초기부터 공직비리조사국을 설치해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나라로 만들었다. 본인과 가족도 예외를 두지 않았고 누구보다 공직자의 부패 척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공중도덕을 비롯, 위생, 교육, 언어생활 등 시민 생활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관리하는 시스템을 유지했다.

그는 도박을 혐오했고 카지노 사업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국가 발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싱가포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며 끊임없는 혁신(革新)을 지지했다. 그 덕분에 싱가포르는 카지노 복합리조트를 건설해 관광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리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덩샤오핑처럼 개발독재 시대를 상징하는 20세기의 아시아 지도자다. 경제 부흥의 공(功)이 뚜렷하지만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다. 그럼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외부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국가적 과제를 밀고 나가는 추진력, 끊임없는 혁신과 실용의 리더십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벽에 부딪힌 데다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싱가포르보다 앞섰지만 선진국 문턱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정체돼 있다. 이런 답답한 국면을 돌파하기를 갈망하며 국민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리콴유의 장점(長點)을 갖춘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조선일보, 2015/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