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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비참함 기억하겠다"… 70년前 모습 복원한 日가미카제 훈련장

하마사 2015. 3. 26. 16:58

[日서 유일하게 원형 보존… 오케가와市 비행학교 르포]

17~25세 젊은이 1600명이 죽기 위해 비행 연습한 곳… 사진·편지 등 그대로 남아
시민 200명이 자원 봉사 "역사 알아야 반복 막아… 후세에 계속 물려줄 것"

영상 5도의 봄비가 목조 내무반 슬레이트 지붕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이곳은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오케가와(桶川)시 '구마가야(熊谷) 육군비행학교 분교장'. 기차역에서 서남쪽으로 4.5㎞ 떨어진 외진 황야다. 주소를 말하자 택시기사가 의아해했다. "그 외진 데 뭐하러 가세요?"

백발의 자원봉사 안내원 나이토 다케시(內藤武·75)씨가 "이곳은 일본에 있던 육군비행학교 10곳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곳"이라고 했다. 가미카제 조종사 후보생들이 여기서 훈련을 받고 일본 각지의 기지로 이동했다. 그런 기지 중 한 곳이 가고시마현의 지란 평화박물관이다.


	원형대로 보존된 사이타마현 오케가와시의‘구마가야 육군비행학교 분교장’.
원형대로 보존된 사이타마현 오케가와시의‘구마가야 육군비행학교 분교장’.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젊은이 1600명이 이곳에서 비행술을 배운 뒤 자살 공격에 동원됐다. /마이니치 신문
지란 기지와 달리 분교장 유적은 지금껏 황야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오케가와시는 지난달 이곳을 복원해 보존하기로 했다. 오케가와시 공무원은 본지와 통화에서 "가미카제가 멋졌다고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얼마나 처참한지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이토씨 같은 자원봉사자 200여명이 2007년부터 무보수로 자료를 찾고, 외지인에 안내하고, 시민 1만4000명의 서명을 받아 그런 결정을 이끌어냈다.

오케가와 분교장은 1937년 6월 개교했다. 1945년 4월까지 7년10개월 동안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 없는 17~25세 젊은이 1600명이 이곳에 들어와 6개월간 '죽음'을 전제로 한 비행술을 배우고 전장에 투입됐다.

부지(9587㎡·2905평)는 널찍했다. 학생들은 한방에 20명씩 자면서 매일 오전 6시에 나팔 소리에 맞춰 일어나 아침 구보를 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항공역학·기상학·통신기술을 배웠다. 이후 '고추잠자리'라고 불리던 초보자용 비행기로 단독·야간 비행 훈련을 했다. 1인당 100시간씩 조종간을 잡은 뒤 훈련이 끝났다. 내무반 뒤편에 목조 화장실 12칸이 남아 있었다. '푸세식'이지만 용변을 보는 곳은 흰색 도기로 되어 있었다. 그 시절 기준으론 깔끔했다. 나이토씨가 "그땐 군국주의 사회였으니까 군인에겐 뭐든 제일 좋은 걸 줬다"고 했다. 밥도 쌀밥이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 소속 전투기 한 대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연합군 군함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 소속 전투기 한 대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연합군 군함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 조종사를 포함 약 4000명이‘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명분으로 자살 공격에 내몰려 생을 마감했다. /게티 이미지 멀티비츠

	가미카제 주요 공격.

내무반 벽에 사진·편지·서류 200여점이 빽빽이 걸려 있었다. 흑백사진 속 키 작은 학생들이 진시황릉 병마용갱처럼 굳은 얼굴로 활주로에 도열해 있었다. 분교장 정문 앞에서 군복 차림 소년이 까까머리 남동생과 서로 한 발짝쯤 떨어진 채 어색하게 뒷짐 지고 서 있는 사진도 걸려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선발되면 학교 측이 가족을 불러 마지막으로 인사시켰다. 부모가 오면 눈물바다가 될까 봐 암묵적으로 못 오게 했다. 형은 이미 징집됐거나 죽고 없는 집이 많았다. 대개 남동생들이 왔다. 이 학교는 1942년까지 지원자를 받았지만 그 뒤엔 사실상 징집으로 채웠다. 패전이 명확한 전쟁에 투입돼 가미카제로 뽑힌 형과 그런 형을 배웅하러 온 동생이 울지도 못하고 작별했다. 1945년 4월 5일 제79기 생도 12명이 이 학교 최후의 가미카제 특공대로 선발됐다. 이들은 11일 뒤 오키나와 먼바다에서 같은 날 모두 죽었다. 자원봉사자들은 가미카제 특공대가 "이탈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팀원들을 동시에 출발시켰다"고 설명했다. 전사 날짜가 같은 이유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일본 우익은 가미카제 공격의 성과를 과장한다"고 지적한다. 미군이 예측하지 못한 처음에만 먹혔지 나중에는 미군도 익숙해져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미리 발견하고 대공포 사격으로 대부분 격추했다.

자원봉사자 아마누마 하지메(天沼一·83)씨가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전쟁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 일본에 과거사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화의 차이'는 있어도 '역사의 차이'는 없어요. 우리는 이 쓸쓸하고 비참한 건물을 그대로 후세에 전해줄 거요."

전후 이곳은 시영주택지로 활용됐다. 수년 전 한 주민이 이 지역 신사에서 오래된 종이를 발견했다. '지는 벚꽃/남은 벚꽃도/지는 벚꽃'이라는 유명한 하이쿠(일본의 전통시)와 함께 이곳에서 훈련받은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분교장의 의미가 재발견된 순간이었다. 2007년 자원봉사자들이 '옛 육군 오케가와 비행학교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어 보존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1만7600명이 다녀갔다.


☞가미카제(神風)

2차대전 말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郞) 해군 중장이 입안한 자살 공격. 13세기 원나라의 일본 정벌군을 침몰시킨 태풍에서 이름을 따왔다. 제로센 전투기에 250~500㎏의 폭탄을 장착한 뒤, 미군 함대까지 편도 연료만 주입한 채 출격해 수직강하했다. 1944년 10월~항복 전야까지 약 4000명이 투입됐다. 실제로 미군 함정에 부딪친 전투기는 19%이며, 나머지는 미군에 격추되거나 대양(大洋)에 불시착했다. 가미카제 공격으로 미군 함정 34척이 침몰하고 368척이 부서졌다(미군 통계). 입안자 오니시는 항복 이튿날 할복했다.


-조선일보, 2015/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