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등반에서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힘들고 사고가 많았다
후반부에 더 맑은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 최보식 선임기자
요즘에는 '인생철학' 따위는 관심 없는 게 틀림없다. 이번 보궐선거에 정동영·천정배 전 의원이 출마했을 때 선거 판세니 정치적 계산에 대해서만 떠들어댈 뿐 '전성기가 지나면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라는 철학적인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탈당해 출마한 것은 '고뇌에 찬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갓 예순이 넘은 이들은 아직 열정과 의욕이 넘쳐난다. 당내에서 자신이 제값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만 들었어도 굳이 '새로운 정치'라는 명분을 만들면서 이렇게 뛰쳐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명퇴'당할 순 없었을 것이다. 주위에는 여전히 지지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이런 정동영씨에 대해 공격하는 쪽에서는 그가 지역구를 얼마나 옮겨다녔고, 그때마다 "제2의 정치 인생을 동작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겠다"(2008년 서울 동작을 출마 당시)처럼 말을 바꾸었던 전력(前歷)을 들춰낸다.
그게 대수인가. 안 그런 정치인이 몇이나 되나. 상황과 여건이 달라지면 누구나 이렇게 바뀔 수 있다. 비판하는 쪽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대부분 어느 정도 위선자이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기 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 되는, 넘는 순간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경계벽'은 있다. 그 벽은 자신의 과거로 쌓아올린 것이다. 한때 남들보다 높고 힘세거나 명예로운 자리를 누렸을수록 경계벽은 높고 좁다. 높은 지위에는 언젠가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포함돼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설령 불만스러운 상황으로 끌려가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눌러야 하며, '철새'처럼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도 없다는 것을.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뽑아준 당을 떠나 지역구 의원직을 찾아 떠도는 정동영씨는 이런 룰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진정한 정치 개혁'이라고 외쳐댄들 들릴 리 없다. 구질구질한 모습만 우리 기억에 남게 된다.
'전국 정당'의 기치로 열린우리당을 만들었고 그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한 천정배씨가 이제 광주에 달려가 '호남 정치 복원'을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정치인이 이렇게 헤매다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4년 전 별세한 이춘구 전 의원은 그래서 희귀한 인물이다. 육사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 때 정계에 들어가 민정당 사무총장과 민자당 대표까지 맡았다. 그 시절의 이력이니 정치적 평가는 낮게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을 지키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꼬장꼬장했고 자신의 사욕(私慾)과 타협하지 않았다. 점심은 찬물에 만 밥 한 공기와 반찬 두세 가지로 해결했고, 국회부의장직을 그만둘 때는 판공비를 반납했다.
그의 존재가 더 돋보인 시기는 현직에서 잘나갈 때보다 뒷날에 있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그는 이런 성명을 발표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나이 61세였다. "그 사람들(전두환·노태우)이 나쁜 짓을 했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매도할 수 없었다. 정치 자금 문제가 공공연한 정치 관행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자신들은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심한 환멸을 느꼈다." 그 뒤로 그는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몇몇 지인만 만나고 독서로 소일했다. 당시 그를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씨도 안 먹혔던 기억이 난다. 물러난 뒤 그는 어떤 언론 매체와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16년 뒤 숨졌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도 많이 달렸다. 자신의 경력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거나, 아니면 조용히 시민의 의무를 다해도 우리 사회는 훨씬 진전될 것이다. 한때 고위직을 지냈을수록 뒤의 삶을 그렇게 살아줄 의무가 있다. 그의 뒷모습만 보며 따라 올라가는 후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품위를 내세우는 것은 쉽지만 물러나서 품위를 지키는 것은 오래된 인격 단련과 자기 절제를 필요로 한다.
요즘에는 잘나가는 사람들의 인생 후반부가 너무 쉽게 구질구질해지는 모습을 본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주위를 돌며 후배들에게 굽실거리고 부탁하는 고위직 출신을 보면 경제적 여유와 꼭 상관있는 것도 아니다. 방산(防産) 비리가 터질 때마다 현역 후배에게 달라붙은 군 퇴직 선배가 어김없이 '브로커'로 등장한다. 최근 대한변협이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을 막겠다고 했을 때 논란이 많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라고 법(法) 조항만 내세울 일은 아니다.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면 스스로 자신이 내려갈 자리를 돌아보는 게 옳다.
과거에 히말라야 등반을 따라가 보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힘들고 사고가 많았다. 인생 후반전에 더 맑은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탈당해 출마한 것은 '고뇌에 찬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갓 예순이 넘은 이들은 아직 열정과 의욕이 넘쳐난다. 당내에서 자신이 제값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만 들었어도 굳이 '새로운 정치'라는 명분을 만들면서 이렇게 뛰쳐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명퇴'당할 순 없었을 것이다. 주위에는 여전히 지지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이런 정동영씨에 대해 공격하는 쪽에서는 그가 지역구를 얼마나 옮겨다녔고, 그때마다 "제2의 정치 인생을 동작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겠다"(2008년 서울 동작을 출마 당시)처럼 말을 바꾸었던 전력(前歷)을 들춰낸다.
그게 대수인가. 안 그런 정치인이 몇이나 되나. 상황과 여건이 달라지면 누구나 이렇게 바뀔 수 있다. 비판하는 쪽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대부분 어느 정도 위선자이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기 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넘어서는 안 되는, 넘는 순간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경계벽'은 있다. 그 벽은 자신의 과거로 쌓아올린 것이다. 한때 남들보다 높고 힘세거나 명예로운 자리를 누렸을수록 경계벽은 높고 좁다. 높은 지위에는 언젠가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포함돼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설령 불만스러운 상황으로 끌려가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눌러야 하며, '철새'처럼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수도 없다는 것을.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뽑아준 당을 떠나 지역구 의원직을 찾아 떠도는 정동영씨는 이런 룰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진정한 정치 개혁'이라고 외쳐댄들 들릴 리 없다. 구질구질한 모습만 우리 기억에 남게 된다.
'전국 정당'의 기치로 열린우리당을 만들었고 그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한 천정배씨가 이제 광주에 달려가 '호남 정치 복원'을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정치인이 이렇게 헤매다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4년 전 별세한 이춘구 전 의원은 그래서 희귀한 인물이다. 육사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 때 정계에 들어가 민정당 사무총장과 민자당 대표까지 맡았다. 그 시절의 이력이니 정치적 평가는 낮게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을 지키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꼬장꼬장했고 자신의 사욕(私慾)과 타협하지 않았다. 점심은 찬물에 만 밥 한 공기와 반찬 두세 가지로 해결했고, 국회부의장직을 그만둘 때는 판공비를 반납했다.
그의 존재가 더 돋보인 시기는 현직에서 잘나갈 때보다 뒷날에 있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그는 이런 성명을 발표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나이 61세였다. "그 사람들(전두환·노태우)이 나쁜 짓을 했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매도할 수 없었다. 정치 자금 문제가 공공연한 정치 관행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자신들은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심한 환멸을 느꼈다." 그 뒤로 그는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몇몇 지인만 만나고 독서로 소일했다. 당시 그를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씨도 안 먹혔던 기억이 난다. 물러난 뒤 그는 어떤 언론 매체와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16년 뒤 숨졌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도 많이 달렸다. 자신의 경력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거나, 아니면 조용히 시민의 의무를 다해도 우리 사회는 훨씬 진전될 것이다. 한때 고위직을 지냈을수록 뒤의 삶을 그렇게 살아줄 의무가 있다. 그의 뒷모습만 보며 따라 올라가는 후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품위를 내세우는 것은 쉽지만 물러나서 품위를 지키는 것은 오래된 인격 단련과 자기 절제를 필요로 한다.
요즘에는 잘나가는 사람들의 인생 후반부가 너무 쉽게 구질구질해지는 모습을 본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주위를 돌며 후배들에게 굽실거리고 부탁하는 고위직 출신을 보면 경제적 여유와 꼭 상관있는 것도 아니다. 방산(防産) 비리가 터질 때마다 현역 후배에게 달라붙은 군 퇴직 선배가 어김없이 '브로커'로 등장한다. 최근 대한변협이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을 막겠다고 했을 때 논란이 많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라고 법(法) 조항만 내세울 일은 아니다.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면 스스로 자신이 내려갈 자리를 돌아보는 게 옳다.
과거에 히말라야 등반을 따라가 보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힘들고 사고가 많았다. 인생 후반전에 더 맑은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일보, 20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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