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6:36-38
제목: 너희도
찬송: 430장
목표: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게 한다.
성경은 ‘하라’와 ‘하지 말라’로 되어있습니다. 십계명도 그렇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로 시작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와 같이 8가지 계명은 ‘하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두 가지 계명은 ‘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왜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비롭기 때문에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사랑해주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비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1. 이해하는 사람(37상)
37절 상반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사람은 누구나 비판하고 판단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만이 사람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모습이 내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속에 어두운 그림자와 욕망이 있듯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똑같은 죄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잘못하는 사람,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단점이 있지만 그중에 비판하려는 마음이 가장 나쁜 듯합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다른 운전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신호를 지키지 않고 운전하는 사람들, 무개념으로 주차한 사람들,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사람들, 얌체 운전자들이 저의 비판의 대상들입니다. 한데, 제가 그렇게 할 때는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약속시간 때문이라고 자기합리화를 시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는 합리화시킵니다.
성경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했습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워 세리를 비판하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비판을 넘어 정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끌고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올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정죄할 수 있는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셨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죄인이 어찌 죄인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정죄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남을 정죄합니다. 정죄할수록 자신이 더욱 깨끗하고 의롭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철저히 회개했다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누구도 정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당당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신분으로 변화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 받으며 살아갑니다. 유익한 평가도 있지만 때로는 잘못된 평가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판단과 분별력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유니버설영화사 책임자로부터 “전혀 배우가 될 가능성이나 소망이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릴린 먼로도 모델 회사 책임자에게서 “모델은 포기하고 비서 일이나 가정주부로 살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모델을 거쳐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의 자리에서 해고당한 월트디즈니는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는 큰 실망을 안고 할리우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오늘의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의 평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소질을 개발해 자기 분야의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정확하지 못한 사람들의 평가를 듣고 그들이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재능을 땅에 묻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맙시다.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맙시다.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2. 용서하는 사람(37하)
37절 하반절,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장사를 하는 두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날마다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며 저주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그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주시고,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주시고, 장수를 원하면 건강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앞 집 사람을 용서하고, 그와 화해하십시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청하는 것을 두 배로 앞 집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사꾼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눈을 하나 멀게 해 주십시오.”
‘죽음을 죽음으로 되갚을 순 없다.’ ‘내 가족 세 명을 죽였지만 유영철, 사형은 안 됩니다.’ 이 말은 2003년 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아들을 모두 잃은 피해자 고정원씨가 했던 말입니다. 그는 살인마 유영철을 사형시키지 말라고 판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용서의 의미를 ‘고통 속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삶을 하루아침에 파괴해버린 가해자를 용서한 것은 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동안 그 칼에 먼저 베이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할 때 용서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었듯이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은 염치없는 기도입니다.
(예화) 요셉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보디발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죄수의 신분으로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시 형들을 만났습니다.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 원수를 갚는 대신에 형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형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왜 없었겠습니까? 요셉은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믿었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살았다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에 스스로 망가졌을 것입니다. 미움이 독이 되어 그의 삶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 대한 복수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용서했던 마음으로 그들도 용서했을 것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말씀 같습니다.
(예화) 야드 바쉠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의 이름은 ‘야드 바쉠(Yad Vashem)’입니다. 그 뜻은 ‘잊지 말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념관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 유대인 600만명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해자인 독일은 백배사죄하고 있습니다. 전범들을 색출해 감옥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가해자인 일본은 아직도 역사적 반성이 없습니다. 8·15가 우리에겐 광복절이지만 그들에겐 패전일입니다. 전범들을 신(神)으로 섬기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참회하거나 뉘우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력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한 상처를 안겨준 가족일 수 있습니다.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입힌 사람일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모멸감을 주고 학대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폭언이나 폭행을 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잊으려 해보고 의지적으로 노력해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자이며 상담가인 폴 투르니에의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성빈혈로 고생하는 한 직장 여성을 반년 이상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병가를 내고 입원해서 집중치료를 받도록 권했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온 여인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검사를 해 보니 악성빈혈 증세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놀란 의사가 물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죽도록 미워하던 한 사람을 용서했어요. 바로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지더니, 삶에 희망이 생기고 이렇게 행복해졌어요.”
여인에게 만성적 악성빈혈이 발병한 원인은 미움과 분노였고, 특효약은 ‘용서’였던 것입니다.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한은 ‘의학과 성서’라는 책에서 “사람이 마음속에 분노를 품으면 각종 질병이 생기고, 기꺼이 용서할 때 이런 질병들이 치유된다.”고 말했습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채 계속 미워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 속에 매여 살아갑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말씀합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처를 안겨준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모르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 알려주고 고치게 하는 것도 또 다른 상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악행을 계속한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이 연락이 되지 않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면 스스로 극복하고 치유해야합니다.
인간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해도 안 될 때는 하나님이 처리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화) 지우개
존 브로크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을 포함한 인류의 121가지 위대한 발명품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대단한 발명품 중에 지우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우개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인류의 기록문화가 극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우개가 아니었다면 지구상 여러 위대한 예술가의 데생이나 스케치, 또는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들은 모두 현재와 같은 완성도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작가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을 예수님의 용서라는 지우개로 지워주셨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지우개가 우리를 하나님의 명품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본받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3. 베푸는 사람(38절)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황금율은 마 7:12절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도 너무나 좋습니다. 그것보다 선물을 줄 때가 더 기쁩니다. 주는 기쁨, 주는 행복을 아는 사람은 베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질이 많다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많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물질이 없어도 작은 것을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풀기를 잘하는 어떤 권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퍼낼수록 고이는 샘물의 원리를 알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맑은 샘물이 다시 고이지만 그대로 두면 썩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습니다. 받을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지만 줄 때는 고민하고 헤아릴 때가 많습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시는 성경의 원리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아는 목사님 부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부의금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카톡으로 회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머니 형편을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설교를 준비하며 묵상하다가 마음에 찔림이 있어 은행계좌로 부의금을 입금했습니다. 이렇듯 사소한 물질에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줄 때는 다시 받을 수 있을까를 헤아려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일단 다시 찾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베풀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던지는 것을 주저합니다. 못 던지기 때문에 도로 찾을 것도 없습니다. 물론 찾을 것을 기대하고 던지면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기대하고 던졌다가 찾지 못하면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버리는 심정으로 던져야 실망하지 않습니다.
(예화)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목초지 문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생업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양보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롯은 물이 넉넉하고 비옥했던 소돔과 고모라땅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해 보는 듯 했지만 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죄악이 가득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해서 롯의 가족은 모든 재산을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부전자전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자 여러 번 양보하고 떠났습니다. 우물을 양보하고 떠날 때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우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우물을 빼앗았던 그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양보하고 베풀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간증)
저는 딸을 키우면서 얻는 것이 많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주시는 은혜도 있지만 딸로 인해 웃는 일이 많습니다. 작년의 일입니다. 시골에 계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어르신들과 친척들이 어린 딸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딸은 차를 타고 오면서 돈을 세며 좋아했습니다. 다음날 지은이가 아내의 지갑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엄마 몰래 돈을 가져가나 생각하고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한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받은 용돈을 아내의 지갑에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제 지갑에도 넣어주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돈 걱정을 하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린 딸이 자기 용돈을 모두 부모의 지갑에 넣어주는 그 마음이 너무나 기특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용돈의 수백 수천배가 딸에게 안겨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케 했으니 시집갈 때 넘치도록 안겨줄 것입니다.
금년 1월 2일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크리스천투데이 국제판이 2015년을 맞아 기독교인들을 위한 8가지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오늘의 설교와도 연관된 내용입니다. 1. 원수를 사랑하라2.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말을 버려라3. 신앙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듯 비기독교인과 대화하라4. 목사에게 친절하라5. 좀 더 베풀라6. 자전거 타기와 걷기를 시작하라7. 기도를 최우선 순위에 둬라8. 험담하지 말라
‘험담하지 말라’는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는 첫째 대지 ‘이해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둘째 대지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베풀라’는 셋째 대지 ‘베푸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8가지를 실천하기 어렵더라도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이해하는 사람이 됩시다. 용서하는 사람이 됩시다.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