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저성장 난쟁이로 취업 경쟁은 몇백 대 일
외교·국방까지 막혔는데 정치 해결사는 대리기사
남북통일 버금갈 만한 파괴적 대혁신 없으면 내리막길 가는 수밖에
- 양상훈 논설주간
대표 기업이라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나마 이 두 회사는 이익이라도 나고 있지만 몇몇 대기업은 듣기에도 무서운 숫자의 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재계에선 "실질적으로 돈을 버는 계열사가 하나도 없는 그룹이 있다"는 얘기들이 퍼진다. 외환위기 때 세계 11위였던 우리 경제 규모는 15위로 떨어졌다. 브라질·러시아·인도에 추월당했고 이제 더 내려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한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 벽을 못 넘고 계속 줄고 있다.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내후년이 더 어렵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자랑스러웠는데 중국의 이름 없는 회사들이 자체 공장도 없이 조립해 훨씬 싼 값에 팔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앞으로 4년 안에 자동차·반도체를 제외한 전 산업이 중국에 따라잡히거나 추월당할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 산업의 얕은 경쟁력이 결국 중국에 잠식당할 운명이었다고는 해도 막상 그 현실이 눈앞에 닥치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리가 가진 막대한 공장 설비들이 하루가 다르게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데 별다른 원천 기술도 없고 새 산업도 보이지 않는다.
한 기업인은 "다른 사업을 해보려 검토했더니 재벌 그룹에 납품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토로했다. 그 재벌들 몇 개에 일렬로 줄 선 이 나라의 꽉 막힌 구조가 사람들의 창의와 용기를 꺾고 사회 전체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10년간 망해서 폐업한 자영업이 800만에 육박한다. 그 숫자 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모두를 답답하게 한다. 부동산 경기는 거의 '백약이 무효' 수준으로 다시 고꾸라지고 있다. 1000조원을 넘은 가계 부채는 마침내 소비를 위축시킬 단계에까지 왔다는 것이 한국은행 총재의 진단이다.
지금 취업해야 하는 청년들은 1990년 전후에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즈음에 외환위기를 겪었다. 고교 졸업쯤에 리먼 사태를 만났고, 괴상하고 끔찍한 입시 지옥을 지나 이제 대학을 졸업하려니 취업문이 보통 '몇백 대 일'이다. 그들에게 밝고 멋진 미래란 TV 드라마에나 있는 얘기이고 현실 세상은 늘 회색이었다. 좋은 일자리에 취직 안 되는 게 당연한 걸로 안다. 자신들이 늙으면 연금조차 고갈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들이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세계 최악의 고령화를 만들어낸다. 이야말로 북한 핵폭탄보다 더 무섭게, 더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를 망가뜨릴 것이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성장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물가(物價)란 '늘 내리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그런 인식이 자리를 잡으면 경제활동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우리 젊은이들의 인식이 바로 그렇게 가고 있다.
한 기업인은 "사업을 하면 느낄 수 있는 감(感)이 있다. 우리나라는 천장을 지난 것 같다"고 했다. 무서운 얘기지만, 이 내리막길을 막을 방법이 없다. 국내·국외가 다 저성장에다 저물가이고 엔저까지 겹쳤다. 경제 부처 관료들은 공개적으로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없다"고 실토한다. 재계는 "우리 대표 산업이 다 위기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세월호법을 둘러싼 진퇴양난을 해결한 것은 대통령이나 여야가 아니라 대리기사였다. 이 기막힌 한국의 여야가 국민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어느 날 머리를 맞대리라고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망상(妄想)이다. '나라, 사회, 회사야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손해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드러눕고 쇳소리를 지른다. 북핵은 이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암 덩어리가 될 것이 확실해지고 있고, 외교는 중국과 미·일 사이에 끼어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는데 대통령과 청와대는 뭘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낡은 발상과 형식적 의전 행사만 이어진다. 그들이 나라 전체에 퍼지는 답답함과 불안감을 함께 체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음 대통령 후보 중에 이 정체를 뚫고 나갈 만한 큰 전략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권자 눈치나 보는 얄팍한 표 상인들뿐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이 답답함이 일시에 뚫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희망 사항이다. 결국 통일에 버금갈 정도의 대(大)혁신, 문제의 곁가지가 아니라 근원을 파괴하는 혁신이 시작돼야 한다. 지금의 이 답답함은 일시적으로 앞길을 가린 안개가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여기 이 시점이 역사적 갈림길이라는 신호다. 역사의 갈림길에선 편한 길, 늘 하던 대로의 길이 보이면 그게 망하는 길이다.
-조선일보, 201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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