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하원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난 이튿날 23일. 오타와 하원 회의장에 190㎝ 넘는 거구의 장년 신사가 들어섰다. 치렁치렁한 검정 관복에 의례용 모자를 썼다.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시작했다. 쉰여덟 나이에 비해 몇 살은 더 돼 보이는 백발 신사는 눈빛만으로 답례 인사를 했다. 의원들은 책상을 두드려 영웅을 반겼다. 하원에 난입해 총을 난사하던 무슬림을 사살한 케빈 비커스다.
▶비커스는 고등학교를 나와 열아홉 살에 연방 경찰에 들어갔다. 캐나다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조직이다. 비커스는 거기서 29년을 일했다. 2005년 의회로 옮겨 이듬해 보안 총책임자 경위장(長)에 뽑혔다. 몇 년 전 어린이들이 견학 왔을 때 의원들이 그에게 부탁했다. 하원 내 '명예의 전당'을 기자회견장으로 쓰겠다고 했다. 비커스는 "아이들 견학을 방해해선 안 된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비커스는 "미국에선 보안이 모든 것에 우선하지만 그것이 캐나다의 길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의회를 둘러싼 담장도 없애고 싶다"고 했다. 그랬던 비커스가 역설적이게도 의회에 뛰어든 테러범을 막아내 캐나다의 영웅이 됐다. 의원들 박수를 받던 그가 어깨에 1m 조금 넘는 금속 봉을 메고 있다. 금빛 지팡이에 트로피를 얹은 듯한 모양이다. 의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메이스(Mace)'다. 800년 전 영국과 프랑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의회가 열릴 때 경위장이 메이스를 메고 입장하면 의장이 뒤따른다. 충돌이나 소란이 일어나면 메이스를 멘 경위장이 가서 '진압'한다. 누구도 그 권위에 맞설 수 없지만 애초에 충돌이 일어나지도 않으니 쓸 일도 없다. 비커스는 총격전이 끝나고 맨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알렸다. 워싱턴포스트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TV 카메라 앞에 섰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건 후 무용담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묵직한 베테랑의 모습을 보며 영화 '사선에서'에 나온 백발의 대통령 경호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렸다.
▶우리 국회엔 경호관과 시설 방호관이 180여명 있다. 흔히 경위(警衛)라고 부른다. 군경이 아니라 국회가 별도로 뽑은 직원이어서 무기는 지니지 않는다. 국회에선 걸핏하면 의원들이 멱살 잡고 해머로 문짝 내리치는 일이 벌어진다. 경위들은 이런 난장판 중간에 끼여 이리 치이고 저리 욕먹는 모습으로 TV에 자주 비친다. 이들에게 '메이스' 같은 것 하나 만들어주면 어떨까 생각해보지만 그런다고 우리 국회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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