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올바이오파마 이형철 영업부장]
1994년 WBA Jr밴텀급 챔피언, 기다림의 연속… 뚝심으로 버텨
"솔직함과 적극성, 그게 답이네요"
전북 김제 출신인 그의 집은 아버지의 도박으로 폭삭 망했다. 도망치듯 상경한 판자촌 생활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열다섯 살에 복싱에 입문했다. 프로 데뷔 후 3연패의 좌절을 겪었지만 죽을 각오로 다시 매달려 결국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가난은 변한 게 없었다. 당시 위암 말기였던 아버지에게 작은 집이라도 선사하고 싶었지만 꿈일 뿐이었다. 2년 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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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채호 기자
다시 2년이 지난 1998년, 그는 한올바이오파마에 입사했다. 이후 줄곧 170명 영업사원 가운데 매출 1위를 달리고 있다. 회사 내 '영업 챔피언'이고 상여금도 랭킹 1위다. 10년 만에 평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에 이어 부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 분야도 사내 신기록이다. 하루에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수십 명 다녀가는 병원에서 그도 그다지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영업사원들의 명함을 보고 생각했다고 한다. "차별화를 고민하다가 명함에 세계 챔피언 벨트를 맨 사진을 넣어봤어요. 나라는 사람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리는 거죠." 약에 앞서 자신에 대해 소개했고, 다들 다시 한 번 명함과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영업사원들은 북적이는 환자들 틈에서 원하는 의사를 만나지도 못한 채 허탕 치기 일쑤다. 만나도 제품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별로 없다. "우선 제가 거쳐야 하는 '관문' 격인 간호사와 병원 직원들이 저를 기억할 방법을 생각했어요. 늘 같은 시각에 찾아가고, 메모지·필기구·아이스 커피 같은 간단하지만 반가운 물건도 돌렸죠." 간호사에게 전한 명함이 의사에게 전달되는 비율이 높아졌지만 의사를 만나기 위해 늘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지루하고 힘들어도 한곳에서 계속 기다리면 결국은 만날 수 있어요. 그 시간이 아까워 다른 병원에 옮겨가기를 반복하면 며칠간 아무 성과도 없을 수 있고요."
그가 입사한 시기는 IMF 경제 위기 다음 해로, 경쟁률이 88 대1에 달했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제품 이론 공부에 어려움이 컸다. "대부분 동기들이 생물학이나 화학을 전공했는데, 저는 아예 공부에 대한 개념이 없잖아요. 테스트마다 늘 꼴찌였어요." 하지만 극복 비결은 단순했다. "모릅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솔직하게 대답했고 적극적으로 질문했고, 결국 그것이 가장 당당하고 현명한 길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피플 in 프리미엄조선], 20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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