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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t us?(우리가 못할 이유 있나?)… 핸드백 女心 잡은 뚝심

하마사 2014. 7. 12. 13:15

[세계 名品 핸드백 제조업계 판매액 1위… '시몬느' 박은관 회장]
“시몬느는 아내의 애칭… 독자 브랜드名 0914도 아내 만난 날이죠”

‘끝물’ 봉제업서 ‘꿀물’ 얻다
‘메이드 인 코리아 누가 사나’ 고개 젓는 美 바이어 향해
“Why not us? 1%만 맡겨달라” 핸드백 수출神話가 시작됐다

세계 핸드백 시장 10% 차지
다른 브랜드 상표 달렸지만… 美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백 10개중 3개가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이죠

시작은 말단 직원
대학 졸업후 수출 中企 취직, 대기업 간 친구들과 달리
하고 싶은 대로 맘껏 일했죠. 그게 32세때 창업 자산 됐다

사업가의 피 물려받아
수산업체 운영하던 아버지, 생선량 속이는 선장 쫓아내
“신용 쌓는덴 수십년 걸린다” 우리회사 최고 강점도 신뢰

해외 영업의 귀재인데…
특별한 왕도나 노하우는 없다 절실하니까 통했을 뿐…
단, 수백만달러 물어주더라도 실수는 절대 회피하지 않았죠

지난 4일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에서 박은관 회장이 내년 정식 출범을 앞두고 있는 자체 브랜드 ‘0914’ 핸드백들을 옆에 놓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는 199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국 명품 핸드백 브랜드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지금도 DKNY·마크 제이콥스 등이 판매하는 핸드백의 60~70%를 도맡아 만들고 있다. 지난 4일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에서 박은관 회장이 내년 정식 출범을 앞두고 있는 자체 브랜드 ‘0914’ 핸드백들을 옆에 놓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태경 기자
"뉴욕 맨해튼 5번가에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혼자 웃는다. 5분쯤 보고 있으면 우리가 만든 가방을 든 사람을 20명도 넘게 본다. 미국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 10개 중 3개는 우리 제품이니까."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의 박은관(59) 회장은 해외 출장 때면 노천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여성들의 핸드백을 보는 게 즐거움이다. 미국 유명 브랜드 상표를 달고 있지만, 그는 시몬느 제품을 금방 알아본다.

전 세계 핸드백 제조업체는 약 1만3000개쯤 된다. 시몬느는 그중에서 압도적 1위 업체다. 지난해 수출액은 6억4000만달러. 넘버 2인 중국 시토이피혁의 두 배가 넘는다. 시몬느는 지난해만 핸드백 1800만개를 만들었다. 세계 핸드백 시장의 10%(소비자 가격 기준)를 차지한다. 미국 시장 점유율은 30%에 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몬느' 브랜드를 달고 나가는 건 아니다.

◇"우린 여름 휴가철에도 공장 돌린다"

박은관의 핸드백 이야기는 26년 전 뉴욕에서 시작된다. 1988년 5월 미국 뉴욕 맨해튼 7번가에 있는 패션업체 도나카란뉴욕 컬렉션 본사. 핸드백 제조업체를 설립한 지 1년도 안 된 젊은 사업가 박은관은 개발 담당자 앞에 샘플 10개를 풀어놓았다.

"당신들이 파는 제품과 비교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

샘플 핸드백을 살펴본 도나카란 담당자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소재, 디자인, 바느질까지 흠 잡을 데가 거의 없다고 했다.

박은관은 말했다.

"우리가 이탈리아보다 40% 싸게 만들 수 있다. 8월 휴가철에도 공장을 돌려 크리스마스 시즌 제품을 납품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도나카란 담당자들은 뜻밖에 고개를 저었다. 고객들은 2000달러짜리 '메이드 인 이탈리아'를 사지 1200달러짜리 '메이드 인 코리아'를 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대를 이어 100년 넘게 핸드백을 만들어온 이탈리아 업체들이 갖고 있는 경험과 역사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이틀 후 박은관은 다시 그들을 찾아갔다.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있고 경험도 적다. 하지만 품질은 되지 않나. 이탈리아에 있다는 그 120년 된 공장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는 누군가 처음 시작한 거 아닌가. 당신과 내가 아시아에서 처음 명품 핸드백 제작의 교두보를 만들어보자. 왜 우린 안 되나(Why not us). 한번 해보자. 1%만 맡겨달라."

그렇게 명품수준의 첫 해외 물량을 따냈다. 핸드백 120개, 2만달러어치였다. '시몬느'가 명품 핸드백 업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때 시몬느가 훗날 핸드백계의 강자가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이후 '왜 우린 안 되나'는 핸드백계의 전설이 됐다.

지난 4일 경기도 의왕에 있는 시몬느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노타이에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편안한 차림이었다.

―미국 브랜드 도나카란을 첫 공략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당시 미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패션 브랜드가 뭔지 알아보니 10명 중 7명이 도나카란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인이 공식 행사나 외국 출장 때 애용하고, CBS·ABC 방송의 여자 앵커들 절반 이상이 찾는 브랜드라고 하더라. 장사 전략엔 두 가지가 있다. 밑에서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과 한번에 정상을 정복해서 나머지를 허무는 것. 힘들지만 정상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 백화점에서 2000~3000달러짜리 도나카란 핸드백을 샀다. 한 올 한 올 실을 풀었다 다시 박음질하길 몇 차례. 똑같은 재료를 구입해 똑같은 품질의 샘플을 만들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업체였으니 도나카란도 큰 기대는 안 했을 것 같다.

"'난 경영학석사(MBA)도 안 했고 마케팅 전문 지식도 없다. 하지만 상품의 3대 조건은 잘 안다. 디자인 좋고 품질 좋고 가격 경쟁력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용주의적인 미국인이라면 납득할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제품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마이스터(명인)들이 부족해 5년, 10년 후면 시장이 원하는 수량을 댈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연평도 파시(波市)의 기억… "바다에서 배워라"

‘시몬느’는 박은관 회장이 대학 때 만난 부인 오인실을 부르던 애칭이다. ‘이상형’ ‘당신’ 등의 뜻을 가졌다. 사진은 두 사람이 1985년 6월 신혼여행 중 이탈리아 로마 트레비분수 앞에서 찍은 것이다.
‘시몬느’는 박은관 회장이 대학 때 만난 부인 오인실을 부르던 애칭이다. ‘이상형’ ‘당신’ 등의 뜻을 가졌다. 사진은 두 사람이 1985년 6월 신혼여행 중 이탈리아 로마 트레비분수 앞에서 찍은 것이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 제공
박은관은 부잣집 아들이었다. 부친이 세운 '황해수산'은 인천에서 가장 큰 수산해운업체였다. 어선이 18척, 조선소와 냉동창고도 있었다. 출어(出漁) 자금 대주고 유통을 대행하는 객주(客主) 사업 규모도 컸다. 부친은 "바다에서 많은 것을 배우라"며 그를 배에 태웠다.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 4학년 때까지 여름방학이면 짧게 3주, 길게 6주 배를 탔다. 연평도·어청도·흑산도·백령도 등 연근해는 물론 동중국해·남중국해까지 나갔다.

―사업가의 피는 역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가. 아버지의 가르침 중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면.

"한번은 큰 소나무가 죽어 비싸고 잘생긴 소나무를 사다 심었다. 내가 '내년이나 후년이면 보기 좋겠네요'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많은데 나무, 정원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소나무가 뿌리 내리고 새순 나고 그 밑 돌에 이끼가 끼어서 운치와 멋이 생기기까지 7년, 10년이 걸린다. 아무리 멋있는 몇 천만원짜리 나무라도…. 네가 나중에 일을 할 때도 시간이 무르익어야 되는 게 있다. 돈으로 시간의 무게와 깊이를 사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업가로서 조기교육을 받은 셈이다.

"생선을 상자에 담을 땐 3~4단 층을 쌓는다. 중매인들은 다른 어선이나 상회의 상자는 속을 흩트려본다. 위에만 큰 게 있고, 아래는 작은 것들로 깔아놓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아버지 회사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선장이 밑에 작은 거 깔고 위에 큰 거 올려놓다가 두 번 혼났다. 세 번째 그런 일이 있자 아버지가 당장 나가라고 쫓아냈다. '한번 신용 쌓는 데 10년, 30년 걸리는데 너 때문에 다른 선장도 피해를 보고 회사 평판도 나빠졌다'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1960년대 말 연평도 일대의 모습은 중학생 박은관에게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음력 4월 초 파시 때가 되면 어선 2000~3000척이 해 질 녘에 투망(投網)을 하고 해 뜰 때 그물을 끌어올렸다. 어선이 바다를 꽉 채워 '소연평 사는 동생이 대연평 형님에게 고추장 얻으려 배 위를 건너다녔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였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겠다.

"어로등이 최대 15만개다. 배에서 내뿜고 바다에 반사된 불빛은 황홀했다. 무교동·광교 야경이 일품이라 했는데 비교도 안 된다. 그보다 더 강한 자극을 망막에 받은 적이 없다. 그물을 끌어올릴 때 어부들은 노동요를 불렀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동틀 때 올리는 그물에서 싯누런 조기 비늘이 떨어져 바다를 가득 메웠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빛 물결은 엘도라도 금광보다 더 빛났다."

―그런 바다에서 무엇을 배웠나.

"폭풍 치는 바다에 나가봤나. 정말 두렵다. 세상에서 작은 걸 이뤘다고 내세우고 자랑하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겸손해야 한다. 그때 추억은 평생 자산이고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 됐다."

박은관 회장은 인터뷰 도중 자주 넉넉한 웃음을 내보였다. 노타이에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그는 “1년에 넥타이를 매는 경우는 2~3번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박은관 회장은 인터뷰 도중 자주 넉넉한 웃음을 내보였다. 노타이에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그는 “1년에 넥타이를 매는 경우는 2~3번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핸드백 수출업체 말단 직원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한 박은관은 1979년 수출 중소기업 '청산'에 취직했다. 국내 핸드백 제조·수출 분야의 선구자 격인 회사이다. 그는 청산의 대졸 1기 사원이었다. 그는 "아버지 온실이 아닌 곳에서 3년만 사회생활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 학력이면 대기업 취직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해외에 가고 싶었다. 집이 먹고살 만 했지만 여권이 안 나와 그때까지 외국에 한 번도 못 가봤다. 청산이 뭘 만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땐 핸드백이 뭔지도 몰랐다."

―3년 다니겠다고 했지만 결국 7년 근무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당시 대학 동기들은 대기업에 들어가 금융·전자·건설 분야에서 일했다. 친구들 하는 일이 200호, 300호 대작이라면 내 그림은 20호, 30호 소품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회사 부속품이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칠하고 싶은 색을 맘대로 칠했다. 소재 찾아내고 디자인 잘해서 납품하면 몇 달 후 뉴욕·런던에서 그 백을 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신나는 시절이었다. 그가 취직할 때 청산의 수출은 600만달러 규모였는데 7년 후 그만둘 땐 7000만달러가 됐다. 승진도 빨랐다. 1년 만에 대리, 6개월 후 과장, 또 1년 지나 차장, 또 1년 만에 해외영업부장이 됐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해외 영업을 무척 잘했는데, 바이어를 설득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인가.

"절실하니까 통했다고 봐야 한다. 또 되도록 상대방이 돈을 더 벌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에서 행동했다. 왕도나 노하우는 없다. 진정성 있게 열심히 하는 게 최고다. 프로답게 깔끔하게 '노우(no)'라고 말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무조건 예스(yes)라고 말해서 상대방 기대를 크게 하면 안 된다. 기대를 적게 주고 결과를 좋게 해줘야 한다."

◇'끝물' 봉제에서 발견한 블루오션

7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1987년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시몬느. 직원은 15명이었다. 주변에선 다들 걱정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아직도 공장을 하시나요'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주위에서 왜 시몬느 창업에 부정적이었을까.

"봉제는 끝났다고, 끝물이라고 했다. 그건 사람들이 모르는 소리였다. 해외에 다녀보니 명품 핸드백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창립식 때 말했다. '우리가 좀 힘들더라도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서 거기에 침목을 깔고 철로를 새로 깔면 그건 막차가 아니다. 열심히 해서 그 길을 가보자'고 했다."

―이전 직장에선 경쟁자 생길까 봐 걱정하지 않았나.

"아니다. 당시 사장은 '7년 일했는데 독립시켜준다면서 혼자 내보내는 건 뒤통수 치는 일'이라며 비서와 운전기사, 디자인 담당 등 6명을 보내주셨다. 나올 때 거래처 손대지 말라는 말 안 들었고, 나도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청산 바이어와 거래한 적은 없다. 그런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시몬느가 만드는 핸드백 제품들. 왼쪽부터 DKNY, DVF,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케이트 스페이드.
시몬느가 만드는 핸드백 제품들. 왼쪽부터 DKNY, DVF,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케이트 스페이드.
시몬느는 세계 유명 브랜드에 핸드백을 납품했다. 겐조·지방시·버버리·셀린느·로에베·케이트스페이드·폴로…. 미국 3대 브랜드는 출범을 함께 했다. 한번 맺은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마크 제이콥스는 16년, 마이클 코어스는 12년, 도나카란뉴욕은 27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와 마이클 코어스 제품의 60%, DKNY의 70%를 시몬느가 만든다. 미국 브랜드 물량 비중이 크게 늘면서 거래처는 35개에서 15개로 줄였다.

―신뢰를 오래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시몬느는 소재·디자인 개발 능력이 되고, 창의성 있는 제품을 만들고 납품도 잘한다고 인정받는다. 하지만 우리 경쟁력의 핵심은 예측 가능성과 연속성이다. 한마디로 믿을 수 있다는 얘기다. 첫 수출 물량 120개 납품 때 240개를 만들어 제일 잘된 것만 골라 보냈다. 지금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래처는 소재를 10% 더 들여 제품을 만든다."

―그러면 생산 단가가 올라가 손해 보는 것 아닌가.

"멀리 봐야 한다. 우리도 실수한다. 그런 실수를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 측 잘못으로 클레임이 들어와 한번에 600만달러를 물어준 적이 있다. 2011년엔 납기 맞추려고 비행기로 제품을 실어 보냈는데, 비용이 1300만달러가 들었다. 거래처와의 관계는 파트너십보다 우정이라고 생각한다. 핸드백으로 만났지만 오래되니 삶의 일부가 되더라."

―인간적으로도 친하다는 뜻인가.

"오래 사귄 친구들이 업계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우리가 잘나갈 수 있었다. 마이클 코어스의 존 아이돌 CEO는 25년 친구고 마크 제이콥스의 리즈 프레이저 사장은 22년, DKNY 마리 왕 사장은 27년째 함께 일한다. 우리는 서로 잘하는 거 하자고 한다. 그들은 브랜드와 마케팅, 세일즈에 전문성이 있고 우린 소재·제품 개발, 제조, 품질관리를 잘한다."

시몬느의 강점은 상품기획과 소재·디자인 개발은 브랜드 측에서 하고 제조업체는 단순 제작만 맡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과 달리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하는 ODM(제조자개발생산) 또는 '풀 서비스 컴퍼니'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같다.

"사실은 그래서 시몬느 역사와 스토리에 감동이 없다. 굴곡도 있고 그래야 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해외 공장 파업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당연히 겪어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출장 보고서를 내실있게 작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산 다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CEO(최고경영자)들 중에 '직원들이 감도 없고 비전도 없다. 나는 높이 보는데 직원들은 턱밑도 못 본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다. CEO 덕목은 자신과 직원들 눈높이 차이를 얼마나 좁히느냐에 있다. 끌어안아서 같은 곳을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내가 보고 생각했던 것을 함께 느끼고 아는 사람이 많은 게 내 힘이 된다. 출장 다녀오면 그런 마음으로 보고서를 썼다."

Who is… 박은관 회장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 부상했다. 1960~70년대에 유럽 패션 업체들이 치고 나갔다.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핸드백에 패션과 디자인이 가미됐고, 판타지와 스토리도 첨가됐다.

1990년대 들어 미국 브랜드가 급부상했다. 약간 낮은 가격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매스티지'의 탄생이었다. 전체 명품 시장에서 핸드백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11%에서 2000년대에는 21%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때 주요 미국 브랜드의 핸드백을 시몬느가 만들었다. 박은관은 "솔직히 어느 누구도 이런 성장을 예측하진 못했다"며 "앞으로는 유럽과 북미 시장이 주춤하거나 정체하고, 중국과 인도·러시아·브라질 등 신흥국의 성장이 전체 시장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 서울 강남에 핸드백 박물관을 열었다.

"핸드백의 뿌리, 역사가 뭐냐는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 우리 회사 직원 330명의 경력을 다 더해 보니 3800년이 되더라. 우리가 가진 핸드백 스타일이 16만개이다. 세계에서 핸드백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가장 많은 회사가 우리다. 이탈리아 공방이라고 해봐야 10명, 20명이다. 오래도 했고 많이도 했으니 이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독자 브랜드 출범… "히트했다는 말 안 나올 것"

'0914'는 박은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숫자다. 대학 1학년 때 친구 동생 오인실을 처음 만나 4학년 때부터 사귀었다. 이후 헤어졌다가 1984년 다시 만났다. 9월 13일 밤 오인실 꿈을 꿨고, 다음 날 그녀와 자주 갔던 카페에 들렀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자기도 그의 꿈을 꿨다며. 회사 이름 '시몬느'도 그가 오인실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두 사람은 1985년 결혼했다.

박은관은 내년 9월 14일 첫 자체 브랜드 '0914'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세계 핸드백 제조 1위 업체라도 자체 브랜드가 없다는 건 한계 아닌가.

"해외 지인들이 '왜 너는 만들기만 하나. 화가라면 남의 그림만 그려선 안 된다. 자신의 핸드백을 만들어보라'고 하더라. 우리 명품백을 만들겠다는 도전은 10년 전이면 안 됐을 것이다. 실력도 부족했고, 한국에서 패션 명품 브랜드가 나올 수 있는 국가·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세계적 디자이너가 배출되는 건 일본이 세계 일류 상품을 만들 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이후였다. 이제 우리도 그런 수준이 됐다고 생각한다."

―성공할 자신이 있나.

"20년은 걸릴 것으로 본다. 몇 년은 아주 특이한 것만 할 생각이다. 시장에 없는 것, 남이 안 했던 것, 독창적인 것을 할 거다. 가격 낮춰 많이 파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게는 안 한다.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한다' '독창성 있고 노력 많이 했다' '신선하다' 그런 평판을 몇 년 동안 쌓을 거다."


-조선일보, 201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