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축구의 힘

하마사 2014. 6. 19. 18:12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결승 날 옛 소련에서 철도 건널목 사고로 서른한 명이 숨졌다. 버스 운전사는 열차가 온다는 신호에도 차를 세우지 않았다. 어서 일을 끝내고 서독·아르헨티나 결승전 중계를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소련은 일찌감치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뒤였다. 방글라데시에선 시민들이 TV로 개막전을 보다 정전이 되자 발전소를 습격했다. 월드컵이 열리면 방글라데시와 태국에선 휴교하는 학교가 많다. 무더기 결석이 뻔해 아예 문을 닫는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국 군부가 지난주 브라질월드컵 무료 중계방송을 지시했다. 중계권을 지닌 방송사가 유료 방송을 하려 하자 나랏돈 132억원을 주고 지상파 방송으로 돌렸다. 군부는 월드컵 개막일에 맞춰 야간 통금도 풀었다. 경기를 자유롭게 즐기도록 해 민심을 달래려는 조치다. 중국 직장인 사이에선 '월드컵 병가(病暇)'가 유행이라고 한다. 5만원쯤 주고 가짜 진단서를 떼면 경기를 집에서 편히 즐길 수 있어서다.

[만물상] 축구의 힘
▶자기 나라가 출전하지 않았어도, 자기 나라 경기가 아니어도 세계인은 월드컵에 열광한다. 축구만큼 원초적인 놀이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며칠 승패에 조바심 낼 필요 없는 경기들을 보며 그 원시성을 피부로 느꼈다. 전사들은 사냥감 몰듯 일제히 몰려갔다 몰려오며 격렬하게 부딪쳤다. 땀방울 빗방울 범벅인 채 화면 밖으로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 환희와 도약, 분노와 탄식…. 축구는 현대판 사냥이고 그라운드의 전쟁이다.

▶축구가 지닌 패싸움 본능은 축구와 국가를 한몸으로 여기게 만든다. 뉴욕타임스가 브라질월드컵 출전국 중에 열아홉 나라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나라가 경기할 때 그 상대팀을 응원하고 싶은가." 쉽게 말해 '졌으면 하는 나라'를 묻는 질문이다. 한국인 38%가 일본을, 일본인 40%가 한국을 꼽았다. 영국과 포클랜드전쟁을 치른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가 지길 원했다. 미국은 러시아·멕시코·호주·이탈리아 그리고 미국 스스로가 미워했다. 미국에선 미식축구 인기가 축구를 압도한다.

▶우승국으로는 열여섯 나라가 브라질을 점쳤다. 스페인·아르헨티나·미국 사람만 제 나라를 꼽았다. 미국인은 자기네 대표팀에 애증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브라질을 '가장 멋진 경기를 하는 팀'으로 지목한 나라도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없는 게 축구공이다. 네덜란드가 남아공월드컵 챔피언 스페인을 무참하게 유린한 것만 봐도 그렇다. 우리 첫 경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승패는 다음이고, 투지로 나라의 위신을 빛내주길 기다린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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