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관련자료/기독교인물

[스크랩] 강신명 목사 일대기

하마사 2014. 6. 11. 21:34

강신명 목사 일대기

 

 

강신명 목사님

 

 

 

[글을 올리며] 

 

강신명 목사님은 필자를 유난히 사랑하셨다.

일찍이 김동진과 함께 말스베리 선교사에게

작곡을 공부하여 <강신명 동요곡 99곡집>을

내실 만큼 음악을 사랑하신 목사님은

목사로서 작곡을 하는 나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보시는 듯, 늘 애정어린 눈으로

나를 이끌어 주셨다. (오소운)

 

 

 

 

신앙의 터전, 아버지!

 

강신명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만큼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에서 많이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한 인물이 살다간 자취를 엮어서 역사를 만들고 인물을 바로 세우는 작업은 후대의 몫이다. 기독교 역사의 큰 지도자들의 공과를 구분하여 공을 세워주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3백만 성도운동만큼 중요하다. 한 인물의 삶과 신앙의 자취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예수 믿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신명 목사님은 선천북교회를 목회하시다가 월남하시어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영락교회를 세우시고 동사목사로 섬기다가 선천교회 교인들을 모두 한 목사님께 이양하시고 홀로 새문안교회로 부임하시어 24년을 목회하신 위대한 목회자이다. 그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공을 세우셨는데 특히 서울장신대학교 교장과 이사장을 24년간이나 역임하시면서 학교법인을 만드시고 가진 부동산과 재산을 모두 학교에 헌납하시는 헌신의 모범을 보이셨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두신 강신명 목사님의 면모를 살펴보는 한국장로신문의 기획 시리즈에 박수를 보내며 기대가 크다.

 

/문성모 목사

 

 

 

 

그의 아버지 강병주 목사

 

 

[한글목사]강병주 목사

 

강신명은 태어나면서부터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양육을 받았다. 처음부터 강신명에게는 영적인 일과 육적인 부분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교회의 일과 민족의 일도 그러했다. 그러나 순서는 있었다. 영적이고 내적인 것이 언제나 먼저였다. 육적인 일과 민족을 위한 일은 복음의 일을 할 때 자동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결과였다. 곧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구조요 복음주의가 갖고 있는 원리였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신학은 아버지 강병주로부터 나왔다.

강병주 목사님 가족 사진

 

강병주는 진주(晉州) 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인 강기원(姜祺元)과 이성곡(李星谷)의 장남으로 경북 영주군 평은면 천본리의 내매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심한 정신적 방황과 세상에 대한 반항을 거듭했었다. 강병주가 15살 되던 해, 목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거친 기질을 잠재우려 경주 최씨 가문의 최영주와 부부의 연을 맺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을 살아도 자녀를 얻지 못하자 강병주는 그것을 핑계로 소실을 얻겠다며 고집했다. 부친이 반대를 하자 1907년, 세상을 등지겠다며 해인사로 향했다. 그러나 승려가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도중에 일단의 의병들을 만남으로 일시에 꺾이고 말았다. 당시 경상도 일대에는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적지 않은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7년 7월에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발단으로 영주, 순흥, 풍기 등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의병들이 활동하였다. 그해 7월과 8월에 청풍과 단양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풍기에 나타났다가 영주로 이동했고 8월에는 영주 군내에 의병 300명이 분파소와 우편국을 습격하는 등 그 이름을 크게 알렸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1907년에 영주의 중심지였던 순흥부내의 관아를 비롯하여 민가 180여 호를 전소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맞선 의병들의 의분은 극에 달해 영주 일대에서 가장 크게 활동을 하였던 이강년 부대와 신돌석 부대는 1907년 11월 11일에 영주의 순흥읍을 습격하여 읍 전체를 전소시키기도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강병주는 주막의 담장을 뛰어 넘으면서 예수를 믿는 것을 담보로 목숨을 살려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미 그의 고향, 진주 강씨의 집성촌 내매에는 강재원이 중심이 되어 세웠던 예배처소가 있어 하나님과 기독교회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던 터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강병주의 모습은 단호했다. 그는 강재원과 함께 예배처소를 교회가 되도록 했고 마을 전체를 복음화시켰다. 그리고 장로가 되고 동네 동장이 되어 고향 천본리를 개조시켰다. 마을을 기독교 이상촌으로 만들기 위해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 강기원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바뀐 것에 감탄하여 예수를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러한 점들이 일본을 긴장시켰다. 3·1운동 당시 내매마을 사람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지도자인 강병주가 신학교를 다니느라 평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만세운동 혐의자로 분류해 대구형무소에 8개월 동안 가두었다.

 

강병주는 강재원과 함께 인근의 영주와 풍기까지 전도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내매의 진주 강씨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영주읍교회(지금의 영주제일교회), 풍기읍교회(지금의 성내교회) 등이 설립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이들이 하였다. 영주의 주변에 있던 내매교회가 이들로 말미암아 영주의 모교회가 된 것이다.

 

강병주는 1910년 봄, 장로교가 세운 대구 계성학교 사범과에 입학을 하고 1915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여 1919년 대구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1925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내매교회와 영주읍교회의 조사(助事), 그리고 풍기읍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되어 10년 가까이 목회를 하였다. 그로 인해 이들 교회의 기초가 잡혔고 교인들의 도덕적 생활 방식이 확고하게 되었다. 1933년에 그가 서울로 떠날 무렵, 풍기읍교회는 성인 신자만 4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어 있었다.

 

강병주는 1933년 6월,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과 교사양성 과장이 되어 서울로 옮기기까지 경안지역의 교회지도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총회 종교교육 활동도 활발히 하여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였다. 특히 평북노회에서 그는 명강사로 알려졌었다. 후일 평양신학교를 갓 졸업한 강신명이 선천 남·북교회의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강병주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병주에게는 한글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었다. 그는 어린 자녀들을 곁에 두고 성경을 가르칠 때조차 읽기와 쓰기에 신경을 썼다. 후일, 강신명이 ‘새서방 새각시’ 같은,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던 것도 신앙과 더불어 어린이들에게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훈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병주는 기독교에 입교 후, 바로 강신명을 첫아들로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집안의 토지를 얻어 내매교회 병설로 강석진과 함께 기독내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기독내명학교는 강신명이 공부하던 1910년대에는 동네의 몇몇의 아이들만 다녔던 작은 사립학교였지만 1920년대에는 북장로교 경안노회 중 가장 큰 학교로 발전하였다. 강신명의 아내 이영신도 기독내명학교 교사였다. 아버지 강병주는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사였던 이영신이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강신명은 처음부터 목회자로 길러졌다. 강신명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1920년대 초에 내매교회에서 열린 김익두의 부흥회에서였지만 그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강병주는 일찍부터 강신명을 민족을 사랑하는 목회자로 만들고 싶었다. 기독내명학교 설립의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풍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신명이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만 다닌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강신명은 아버지 때문에 기독교 학교인 평양의 숭실중학교, 공주 영명학교, 배재학당을 거쳐 계성중학교를 졸업했고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마친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던 것이다. 강병주에게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창설된 학교가 신앙교육과 만인 평등의 교육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민족 사랑과 주의 종이 되기 위한 바탕이 바로 거기에서 만들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신명이 목사가 되고 민족을 위하여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남다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강병주로부터 유전된 기질, 남다른 학구열과 복음적 정열, 민족 사랑, 기독교 교육에 대한 강병주의 깊은 신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2회) [[제1209호] 2009년 12월 12일]

주변이 중심으로 상향된다!

 

 

내매교회

 

경안지역의 주변이라 할 수 있던 영주의 기독교가 안동을 극복하고 대구를 지나 한국기독교의 중심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영주의 기독교를 움직였던, 지렛대의 역할을 했던 곳이 내매교회(乃梅敎會)였다. 사면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있고,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관통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어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남쪽이 제법 광활하게 트여진 마을, 내매! 내성천을 경계로 양지(陽地)마을과 음지(陰地)마을로 양분되었던 작은 마을, 겨우 18가구가 살던 내매가 경북지역 복음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선교역사의 패러다임, 곧 주변-중심-세계의 도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889년에 게일(J.S. Gale)이 대구를 처음 방문하고 배위량(W. Baird)이 1892년 이후 여러 차례 경북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에 가서야 비로소 북장로교의 대구선교부가 세워졌다. 그러나 1900년까지 겨우 네 사람의 교인을 얻을 뿐이었다. 이것은 서명원(Roy E. Sheare)의 분석처럼 보수적인 양반그룹들과 이 지역의 보수적 정서 때문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영주의 내매에서 대구로 온 몇몇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에 의해 경안지역과 경북의 기독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본래 영주는 세조 3년인 1458년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으로 영주의 본래 중심지였던 순흥도호부가 폐부되고 풍기군에 부속되었다가 현종 9년인 1683년에 부활되었었다. 그런데 1914년 일본은 경북의병의 활동 근거지 중 하나였던 순흥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영주읍을 지금에 자리에 새로 건설하여 헌병대를 두고 계속 영주를 감시하였다. 그런 이유가 있어 일본은 새로이 만들어진 영주군과 기존의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이름 붙였다.

 

영주의 진주 강씨들은 예천에 살던 13대조 나경공(蘿慶公) 강정(姜貞)이 임진왜란을 피해 영주동 뒷새로 이주해 온 이후 번성하였다. 당시 이들은 남인계열의 소론에 속해있었고 관료사회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다. 영남만인소 사건의 주축을 이루었던 강진규가 영주 유림에서 활약을 했지만 대부분의 진주 강씨들은 몰락한 양반으로 조선사회의 명문가문에서 벗어나 있었다. 영주읍에서 20여리 떨어진, 강신명의 고향 내매마을에도 강정의 후손들 18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한국 최고의 양반들이 살고 있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이미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 나의 대구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배위량(W. Baird)은 자신을 방문한 신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배위량이 지목한 사람이 강신명의 종친이었던 강재원(姜在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내매교회 100년사’는 강재원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는 대구에 유학하여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그곳에서 선교사 배위량과 안의와(James E. Adams)를 만나 전도를 받았고, 그날 이후 예수를 영접한 강재원은 고향 내매로 돌아와 인근 마을 지곡의 강두수와 함께 안동 지방의 최초의 교회 예안 방자미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중략) 그는 본인의 집에 예배처소를 만들고 뜰에는 십자가 깃대를 높이달아 예배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강신유, 강병창, 강석구, 강석복 등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예배처를 확보한 그 시작의 첫 날부터 강재원은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교회사에는 중생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땅을 바쳐 교회를 만들고 자기의 삶의 터를 바꾸며 스스로 전도하였음을 알리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대개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지역의 거민들이 교회를 이룰 만한 터전이 마련되고 나서야 교회조직을 구성하는 일, 곧 교회로서의 조건을 갖추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한국교회 자전(自傳)의 역사는 세계 어디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며, 내매교회에도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강재원을 시작으로 내매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믿었다. 마을의 중심이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철저한 미신의 타파, 유교적 의식구조의 극복, 복음이 갖고 있는 도덕력의 발현, 영농방법의 개선, 새생활 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영주의 작은 마을 내매가 기독교 이상촌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내매는 영주의 신문화의 발상지로 그 이름을 확고히 했다. 물론 이 일은 강병주가 주도하였다.

 

내매교회 초대 영수 강재원은 인근 지역까지 복음을 전했다. 영주, 봉화 등지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영주제일교회, 평은교회, 문촌교회, 척곡교회 등 10여 개 교회가 세워질 때, 그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또한 그 교회들은 인근 각지로 복음을 전하며 지교회를 세워나갔다. 그리고 그 교회들에서 훈련받은 복음의 사명자들이 한국교회를 선도해 나갔고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복음을 외쳤다. 영주의 주변 마을 내매가 영주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경안지역을 주도했으며 나아가 한국의 중심까지 나아가 그 복음의 열정을 알렸던 것이었다.

 

겨우 18가구가 살던 작은 마을의 내매교회는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와 장로들을 배출하였다. 강신명을 포함하여 강병주, 강신정, 강석진, 강신충, 강신창, 강문구, 강병철, 강인구, 강석춘, 강달구, 강병직, 강성구 목사가 그들이요 장로는 강재원을 비롯하여 모두 36명이었다. 내매교회는 거의 모든 교인들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만들 만큼 복음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본래 ‘주변’은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모티브이다. 주변의 것들을 모르고서는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내매로 인해 머지않아 영주가 복음화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변부는 주변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중심을 변화시켰다. 후일 강신명이 서울장로회신학교장 시절, 주로 한국 사회의 주변에 있던 초라한 모습의 소명자(召命者)들을 학생으로 부른 것도 자신의 생애의 시작이 그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때 강신명은 주변의 반대와 많은 냉소를 무릅쓰고 여기에 전념했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광명학원종합계획’을 통해,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중심과 주역으로 탈바꿈한다며 역사의 순리를 피력한 바 있다. ‘주변-중심-세계’라는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도식이 그의 의식세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매교회가 그에게 일찍부터 일러준 것이었다. 주변이 세계를 이끌 수 있다는 강신명의 강한 집념은 내매라는 영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실제 강신명 생애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 영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그가 한국사회의 중심을 이끌었던 것이다. 주변이 중심으로 상향된다는 기독교 역사의 구조는 그의 확신이 되었고 그것은 그의 삶의 체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제3회)

[[제1210호] 2009년 12월 19일]

출신학교의 의미와 교파의식

 

 

1930년대 시대상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경제문제로 휘청거렸다. 여기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식민지 한국 땅에 불어 닥친 공황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땅의 백성들이 경제적 형극을 피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만주 등지로 떠난 사람들이 1925년에는 15만 명 정도였으나 1931년에 이르러서는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은 한국의 쌀을 가져갔다. 1931년에만 1,713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더욱이 삼남 일대의 한발로 인해 기근이 심화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대부분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였고 대공황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체 600여 만 농가의 45%가 소작농이었는데 소작농의 75%가 빚을 지고 있었다. 자영농들도 빚으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1935년 이후는 소작농이 전체 농민의 약 56%까지 늘어났다.

 

일본은 어쩔 수 없이 1932년에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반영구적인 기아상태와 전 민족적인 빈한 상태”를 더 방치할 수 없다는 명목이었다. 자신들도 이 문제를 방관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농민들의 집단적 저항을 막고 약간의 ‘빵’을 줌으로써 당시 만연되어 있던 사회주의 사상의 오염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제공황으로 인한 어려움은 기독교계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선교본부에서도 한국 선교비를 큰 폭으로 삭감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선교 사업은 “부진의 정도를 넘어서 위경(危境)에까지” 이르렀다. 선교사들은 한국 현지에 벌여놓은 사업들을 자신의 생활비로 충당해야 했다.

 

1925년까지만 해도 교세의 감소를 그리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6년 이후에는 달랐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 특히 농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YMCA를 포함해서 한국의 교회는 ‘예루살렘국제선교협의회’를 계기로 “조선 농촌을 구제하기 위하야 또는 교인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야 농촌사업기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 1920년대 한국교회의 절대 명제가 된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도 농촌부를 신설하고 정인과와 배민수로 하여금 이 일을 주도하게 하였다. 1929년에 8개 노회를 시작으로 1930년에는 22개 전 노회에 농촌부가 조직되었다. 개교회에도 농촌부가 설립되어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강신명이 중학교를 다니던 시대는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를 꺼려했던 한국장로교회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중학교 시절

 

강신명은 철저하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기독교 학교를 떠나서 교육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처음 교육은 부친 강병주가 설립한, 내매교회 부설학교인 사립기독내명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강신명을 목회자로 만들겠다는 강병주의 신념으로 인해 강신명과 동기생이었던 사람들은, 강신명을 포함하여 전부 셋에 불과했지만 모두 사역자가 되었다. 바로 대구 서남교회의 목사가 되고 계명대학교를 창설하는 데 공헌했던 강인구와 부산 부전교회 여전도사였던 이성애가 그들이었다. 강신명은 부친 강병주가 풍기읍교회(현 성내교회)의 담임자가 되면서 풍기로 이사를 하여 풍기초등학교로 전학을 해 졸업했다. 그리고 1924년에 동년배의 아이들보다 3,4년 늦은 나이로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열병으로 숭실학교를 휴학하고 있다가 감리교 선교사가 세웠던 공주의 영명과 배재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이후, 1928년에 강병주가 재단의 이사로 있던, 북장로교 소속의 계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을 하였다.

 

숭실중학교, 공주 영명과 배재에서의 강신명의 성적이나 생활태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계성중학교에 보관된 그의 성적표를 보면, 특별히 인문 사회분야의 성적이 평균 90점 이상으로 높았다. 강신명이 기독교 교육을 통해 얻은 것 중 하나는 일본의 황도정신에 대한 저항과 극복에 대한 의식화였다. 그것은 기독교 교육자체에 애초부터 담겨 있었다. 기독교 교육의 구조는 하나님아래 누구나 수평적 관계라는, 인간평등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이 기준이 될 때,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적 전통, 사회적 역할 구조, 신분관계, 관습과 제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절대시 될 수 없다. 따라서 천황의 신성(神性)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에 도전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기독교 교육은 바로 그러한 구조 아래서, 곧 인간의 삶과 행동이 기독교적 정의와 도덕의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교육은 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의와 도덕의 함양, 합리성의 중시, 의식화되고 세계화된 근대시민을 양성함으로써 일본의 ‘천황제 지배이데올로기’를 이겨나가게 한 것이다.

 

강신명이 기독교 학교, 특히 계성학교에서 배운 것도 바로 이런 의식이었다. 그때 그는 계성의 설립정신과 학풍을 통해 시대적 비탄과 질곡의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은 일제에 강점당해 비탄에 빠져있던 시대와 한국이라는 공간이 암울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민족적 사명감, 그리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바로 이렇게 시대적 아픔이 가파르게 치솟을 때, 기독교 학교들은 진리로 인해 배부를 수 있다고 노래했고 어둠 후에 더욱 밝히 비치는 빛을 노래했다. 좌절과 피탈에 시달리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타도 타버리지 않는’ 의지와 희망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기독교만이 새로운 한국에 대한 거대한 희망과 생명의 터전을 약속하고 있었다. 강신명은 바로 절망의 복판에서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기독자의 민족적 사명과 어떤 경우에도 좌절할 수 없다는 의지를 기독교 학교를 통해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신명이 중학교를 다니던 1920년대는 공황과 일제의 수탈적 농업정책으로 인해 한국 농촌의 곤궁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때 한국은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었던 시절이었다. 식민지 한국을 방문하였던 세계적 농업학자 부르너(E. S. Brunner)가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회집된 국제 선교협의회 총회에서 1920~1930년대 한국 농촌사회의 특징을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 농가부채의 증가, 농업의 영세구조가 심화되었다고 보고할 정도로 특별히 농촌에서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강신명도 순조롭게 공부를 계속하기 쉽지 않았다. 강신명과 함께 계성에서 공부를 했던 동생 강신정은 훗날 계성학교가 근로 장학생 제도를 도입하여 궁핍했던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장로교인 강신명이 감리교회에 속했던 공주 영명을 거쳐 서울의 배재에 진학했던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공주의 영명(永明)이 3년제 전수학교여서 강신명은 고등보통학교로 옮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보통학교인 배재에서 졸업 2년을 앞두고 잡종학교였던 계성으로 전학했던 것은 강병주가 계성학교의 이사직에 있어 학비의 혜택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한국교회, 특히 농촌교회의 피폐는 극에 달해 있었다. 헌금 액수는 격감했으며 농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교세의 감소가 계속되었다. 교회당이 문을 닫는 지역도 허다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풍기교회의 담임자 사례비가 충분할리 없었다. 강병주가 다른 교회를 찾아야 할 정도로 식구들의 생계와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강신명은 학교를 여러 번 옮기고 몇 번의 휴학을 거쳐 어렵게 중학교를 마쳐야 했다.

 

(제4회) [[제1213호] 2010년 1월 16일]

출신학교와 교파의식

 

 

한국 장로교를 이끌었던 강신명은 한국교회가 교파의식을 갖고 나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도 서슴치 않았다.

 

“나 자신도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담당 지역에서 태어났고 나의 부모님들이 또 거기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장로교인이 되었을 뿐이다. 요즘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교파가 있는 가운데 내가 교회를 선택하고 교파를 선택해서 장로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강신명의 고백처럼 그에게서는 교파의식의 뚜렷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국교회가 교파주의로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에 대해 매섭게 비판하였다.

 

한국에 있어 교파주의가 필요할까 할 때, 나는 대담하게 필요 없다고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바이다. 교파주의가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에는 많은 교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고 있는 피해와 손실이 무엇이냐고 묻지 아니할 수 없으며, 또는 반대로 유익이 있느냐고 묻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피해는 크고 손실은 많으나 유익은 없다고 대답한다.

 

한국교회 역사에 일가견이 있던 강신명은 한국 주류교회의 신학이나 교리가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일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평신도들의 경우는 “일치와 연합이 아니라 완전 통합과 활동이 가능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교파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목사들의 기득권 싸움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교회가 성서적, 역사적 본래성으로 돌아가 일치할 것과 “최소한 연합사업과 겨레를 위한 복음화 작업에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교회의 일치와 통합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강신명이 한국교회의 일치와 통합을 강조하였던 것은 그의 출신학교 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강신명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 물론 북장로교에서 세운 계성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감리교 학교인 공주 영명과 배재를 택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한국교회는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그 차이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한국교회의 장·감 선교사들은 신학적으로 거의 모두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교파의 차별성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초교파적인 단일교회를 지향했던 일치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 초대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자들이었지 철저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하반기에 북미를 휩쓴 피니(Charles G. Finney)의 부흥 운동과 이어 나타난 무디(Dwight, L. Moody)로부터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개혁신학과 그 교리의 준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특별히 새문안교회와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단일교회를 세우는데 선두에 있었다. 그는 한국 북장로교 선교국 총무인 엘링우드(F. F. Ellingwood)에게 “장로교의 전파가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 가는 것”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교파에 관심이 없었던 일치주의자(unionist)였던 것이었다.

 

스왈렌 (W. L. Swallen)도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 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라부열(S. L. Roberts)까지도 장·감의 양 교회가 모두 한국교회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사실 1907년에 독로회를 시작할 때, 한국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교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신 인도 자유장로교회가 채용한 12신조를 임시 채용했다. 12신조를 채용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곽안련(Carles Allen Clark)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우리 신경은 만국 장로회 신경 중에서 최호한 거시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보다 나흐니 우리 신경은 간단하고 명백하여 알기가 용이한 것이라... 조선신경이 간단하나 유치한 거시 아니요, 완전한 신경이며 이보다 우승한 신경이 세상에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리 신경보다 나은 거시 없고, 고대 신경 중에 우리 신경보다 부족한 거시 만흐며 웨스트민스터 신경이라도 이 신경보다 우승하기 어려우니라…. 이 신경은 현시대 형편에도 적당하고 성경에도 적합하니… 또 장로감리 양 교회 연합 문제를 인하여 회집하였을 시에 연로한 감리교파 선교사의 말이 두 교회가 연합하게 되면 우리 감리파가 웨스트민스터 신경은 채용하기가 극난하나, 이 인도국에서 출래한 신경을 채용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다 하였으니 감리파의 타 교역자는 여하게 생각할 넌지 알지 못하거니 와 가히 알만한 일이라 하였다.”

 

한국장로교회가 처음부터 단일교회를 모색했다는 말인 것이다. 박윤선도 평양신학교가 가르친 것이 칼빈신학이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평양장로회 신학교가 개혁주의 신학을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1905년 재한서울장로회일치위원회(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선교사 단체임)는 대한예수교회(혹은 대한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해 9월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여섯 선교부의 선교사 125명이 감리교 선교사 벙커(D. A. Bunker)의 집에 모여서 단일교회의 창립을 추진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재한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였다. 그때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회장이 되었고 감리교회 벙커 선교사가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한국에 단일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 선교부에서 한 사람씩을 대표로 하는 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구체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단일교회는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 수용을 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지도자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까지 장·감의 선교사들은 단일교회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신학은 한국의 장·감교회의 원형이 되었고, 그러한 의식에서 단일교회를 지향했다. 그러한 신학적 일치감으로 장·감교회는 지역예양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고 장·감 모두 민족교회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신명의 출신지인 영주의 교회들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강신명이 장로교와 감리교를 따지지 않고 학교를 선택하고 졸업했던 것은 신학적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장·감의 터전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강신명에게 교파의 분리의식을 강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제5회) [[제1214호] 2010년 1월 23일]

숭실전문학교와 동요운동

 

 

1930년, 계성 학교를 졸업한 후, 강신명은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강신명이 입학했을 때 숭전은 특별히 음악과 웅변, 운동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축구는 1928년에 일본 갑자원에서 전일본 16개 대표팀을 꺾고 우승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숭실의 교육이념은 첫째 기독교, 둘째 애국, 셋째 학문이었고 언제나 그것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숭실의 학풍이 기독의 복음이 우선이요 바탕이었으며 목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독교의 복음으로 민족을 이끌어야하며, 학문은 그것에 대한 당위성과 이론을 제시한다는 것이 숭실의 이념이요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 아래 숭실은 학생애국운동의 요람이 되었고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숭실의 학생들이 1929년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운동에 적극적 참여하였던 것도 바로 학교로부터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복음과 민족을 우선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숭실은 1936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교시켰다. 숭실의 기독교 신앙이 그만큼 확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숭실의 자부심은 식민지 아래에서 공부하던 청년들에게 격려가 되었고 민족에 대한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숭실은 복음과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한국 청년으로서의 기백을 잃지 않도록 언제나 독려하였던 것이다.

 

 

강신명이 숭실에 입학했을 때, 이사장은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선교사였고 교장은 신사참배의 최초의 희생자였던 윤산온(尹山溫, G. S. McCane)이었다. 교감은 박태준을 길러냈던 모의리(E. M. Mowry) 선교사, 채필근(蔡弼近)이 문과과장이었다가 윤산온과 뜻이 맞지 않아 장대현교회로 가는 바람에 우호익(禹浩翊) 장로가 문과과장이 되었다. 농과과장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던 이훈구(李勳求)가 맡았다. 특히 스코틀랜드계의 미국인 교장 윤산온은 전형적인 보수적 신앙과 엄격함, 동시에 눈물이 많았던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다. 윤산온은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장 때에 일명 ‘105인 사건’의 주동자로 연루된 바 있었다. 그런데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협조했다는 이유로 미국으로 추방되어 있던 그를 숭실전문과 숭실중학교 이사회에서 다시 청빙을 하였다. 숭실은 그를 통해 투철한 신앙심과 모국 사랑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이 땅에 살았던 학생들은 거의 다 가난하여 학비를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숭실은 충남 한산 출신의 이훈구가 미국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농과를 맡고 있었다. 학교 내에 실습농장을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루 일당은 60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돈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고 학생들도 모두 성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느 학생들과 달리 강신명은 교장 맥큔(George S. Mccune, 윤산온)의 남다른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농장을 관리하던 김상근이 그의 성실성을 보고한 이후였다. 강신명은 맥큔이 “신명이 고생 많이 하지! 내 다 알지요”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숭전에 입학했던 해 12월에 강신명은 그의 첫 딸 강석렬(姜錫烈)을 낳았다. 이영신과 결혼한 지 4년만이었다. 아이도 키워야 했고 학비도 조달해야 했지만 아내가 교사로 취직하여 그를 내조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보 제작 등으로도 학비를 마련해야 했고, 방학 때도 고향에 거의 내려가지 못하고 학교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한편, 강신명이 악보를 제작하여 생활비를 벌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일, 영락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고, 새문안교회의 음악활동을 강화하며 서울장로회신학교장 시절, 전교생에게 합창을 의무화했던 것도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배재학교 시절부터 발견되었지만 계명을 거치고 숭실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1925년에 모교 교사로 부임했던 박태준은 당시 계성의 재학생이던 윤복진(13회), 박을송(13회), 권태희(17회), 강신명(18회), 강문구(19회), 이성우(20회) 등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각 지방의 주일학교에 배부했었다. 그렇지만 숭실에서 말스배리(Dwight R. Malsbary, 마두원) 선교사를 만난 후, 강신명의 작곡 기법은 더욱 정교해졌고 동요 작곡에 대한 열망은 더욱더 커졌다.

 

숭실은 1929년에 선교사로 내한했던 말스배리가 음악과장으로 온 이후 서원숙, 이용준, 김동진 등 많은 음악인을 배출하였다. 말스배리의 활동은 특출하여 숭실전문 음악대의 수준을 최고로 높였고 1931년부터 지방순회음악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2월 7일에 열렸던 서울의 공연에 대해 조선과 동아 등 당시의 신문은 숭실 음악대의 수준을 크게 격찬하기도 했다. 말스배리로부터 화성학과 작곡법을 배운 강신명은 많은 곡을 작곡할 수 있었고 악보제작 등으로도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성학교의 박태준이 주도했던 동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동요 작곡에 대한 열정은 평양신학교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1936년에는 자신의 것과 박태준의 곡을 비롯한 동요 300곡을 묶어 ‘아동가요곡선300곡’을 발간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 복음성가와 다름이 없었다. 특별히 1935년 4월 2일, 그가 평양신학교 재학시절 조직신학 강의 시간에 교수의 눈을 피해 몰래 작곡했다는 ‘새 서방 새 각시’는 그를 동요 작가로 알려지게 하였다.

 

1937년, 강신명은 선천 경찰서에서 붙잡혀 정주지청으로 송치되었다. 일제는 강신명의 노래가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일치단결하여 독립을 목표로 하고 전진하자고 호소하는 것이라고 해석, 이것을 간접적인 독립운동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일본은 강신명을 검찰청 정주지청으로 송치하여 심문을 하였고, 약식재판에 기소하여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30원을 선고하였다. 일본은 특별히 ‘아동가요곡선300곡’에 네 번째로 수록이 되어있던 ‘유년주일학교 교가(校歌)’를 문제 삼았다.

 

교가는 찬송가곡으로 애국가를 개사하여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우리 유년주일학교 영원토록 만세’의 표현이 일제를 자극하였다.

 

또한 91번째에 수록되어 있던 권태호 작곡 남궁랑 작사의 ‘조선아기의 노래’, ‘꽃 피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조선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의 가사 내용도 문제시됐다. 일본이 강신명을 요주의 인물로 몰아 구금했던 것은 그의 동요곡집에 한 없는 민족애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의 동요곡집에는 예배나 찬양을 위한 노래만 들어있지 않았다. 사회교육과 계몽, 민족의 사명이 강조되었고, 독립과 해방에 대한 희망과 신념도 내재해 있었다. 여기에 한없이 아름다운 우리 말, 그 모태의 언어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함께 있었다. 일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더욱이 1936년은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가 있었던 해이고 동아일보의 일명 ‘일장기 말살 사건’이 전국을 뒤흔들었던 때였다. 일본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강신명은 선천 남교회의 1937년 1월의 첫 주일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대담한 주제로 설교를 한 바 있었다.

 

강신명은 동요를 통해 복음과 민족을 찬양하고 싶었다. 민족의 당면의 문제에 직접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동요운동을 통해 복음과 민족의식을 확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항일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일본이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내면에 민족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강신명에게 신앙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나뉘어져 있지 않으며 그의 사상에 민족교회의 구조가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와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된 小竹 강신명 목사 (6)

[[제1215호] 2010년 1월 30일]

그의 인맥과 신앙의 터전

 

1934년 강신명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장로교신학교는 1901년에 모펫(Moffet, Samuel Austin)에 의해 세워졌었다. 한국에 들어온 네 장로교회, 즉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와 호주장로교가 함께 연합한 최고의 결실이었다. 1908년에는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Mrs. Cyrus McCormick)의 희사로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5천평 대지에 신축교사를 세우고, 5월 15일에 정초예배를 드렸다.

 

신학교 초기에 북장로교는 성서해석과 실천신학을, 남장로교는 조직신학을, 호주장로교는 원어를, 캐나다 장로교회는 교회사를 맡아 가르쳤다. 학생들에게는 1년에 3개월만 출석하고 5년 동안 학교과정을 이수토록 했었다. 그런데 1920년에 이르러는 학기제를 종전의 3학기제에서 2학기제로 개정하였다. 그때쯤 가서야 학교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던 것이다.

 

당시 강의 과목은 1학년 14과목 중 7과목이 성서학, 4과목이 목회학 계통이었고, 2학년 16과목 중 성서학계가 8과목, 목회학계가 4과목, 3학년에서는 17과목 중 성서계가 6과목, 실제 목회학계가 5과목으로 배정되었다. 전체 47과목 중 37과목이 ‘성서와 목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평양신학교에는 한국인 교수들이 임명되어 들어왔다. 1925년 남궁혁(南宮赫)이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유니온신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남장로교 선교구역이던 전라도에서 목회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남궁혁은 남장로교 선교부의 후원으로 평양신학교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평북 철산 출신의 이성휘(李聖徽)는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헨노이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8년에 귀국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 미국 켄터키 주루이스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형룡이 1931년에 교수로 취임하여 기독교 변증학을 강의했다. 그 전까지 김선두와 김인준이 강사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강신명의 스승이 되었다.

 

숭실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안광국은 그의 회고록에서, 강신명이 조사(助事)로 있던 평양 서문밖교회가 평양신학교에서 불과 200미터 거리에 있었다는 것, 강신명이 운동을 좋아했다는 것과 후일 한국장로교회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쳤다. 그는 신학교 건물 하층에 1회에서 33회까지의 졸업생 명단이 걸려있었다고 회고하였다. 33회 졸업생 사진에는 강신명, 계일승, 김형모, 김규당, 김양선, 김례진, 이창섭, 이학인, 손양원, 배운환, 엄영기, 박성겸, 이태양, 황희섭 등이 있었음도 말하였다. 안광국이 거론한 인물들은 모두 거의 모두 한국교회를 이끌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장차 강신명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때 서로 협력해서 힘을 보태기도 했고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교계 인맥은 대부분 평양신학교로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강신명이 공부했던 1930년대의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이전의 학생들과 다른 신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초기의 선교사들이나 졸업생들이 추구했던, 단일한 신학이나 신앙 태도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유학을 다녀온 교수들이 보강되면서 학생들은 수준 높은 학문을 추구하려 했다. 기존의 신학만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가 나타났다.

 

1920년대까지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은 복음주의자들인 동시에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교회 50주년 희년 기념사에서 모펫(Samuel A. Moffett)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중략) 최근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합니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합시다.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진술은 한국교회에 1930년대를 기점으로 신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정통 보수신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문제들이 1930년 이전에도 간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1916년 황해도에서 김장호(金壯鎬) 목사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고, 1925년에는 선교사 게일(Gale, 奇一)의 의역본(意譯本) 성경이 문제시 된 일도 있었다.

 

1930년대에 유학을 다녀온 교역자들이 늘어나면서 평양신학교의 초기 신학은 일정하게 도전을 받았다. 더구나 1930년 남북감리회 합동과 무교회주의자들의 ‘조선적 기독교’ 수립운동이 장로교회 내의 보수군과 선교사들의 신학적 권위를 흔드는 외적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성서무오설을 보다 확고히 하려 했고 기존의 신학을 굳건히 견지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다양한 학문적 견해들을 접하고 싶어했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강신명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평양신학교 시절, 강신명은 신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박윤선의 주선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몸이 건강치 못하여 신학의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그래서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공부하려 애를 썼다. 1940년 4월에 선천 남교회에서 휴가가 주어지자 동경신학교로 갔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강신명은 약 8개월 동안 구마노(能野義孝) 교수와 무라다(村田) 교수에게서 ‘현재종말론’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고등학문에 대한 강신명의 관심은 지대했고 신학적 운신도 넓었다. 사람들의 다양한 신조에도 관대했다. 일본에서의 신학공부가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목회가 우선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언제나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곧 민족교회의 전통을 따르려 했고 복음주의의 성서적 신앙에 투철했었다. 여전히 평양신학교는 강신명에게 있어서 ‘대장로교를 길러낸 어머니’였다.

 

강신명은 한국 장로교가 추구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파에 대한 편견이나 고집이 없었고 당시에 만연했었던 지역적 편견도 없었다. 다양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치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철저히 교회와 성서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치를 향한 그의 기준이었다.

 

강신명에게 있어 성서중심의 표지는 성서학자들의 수준에서 해석되는 신학적 비평의 수준이 아니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애호하는 성서중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성서적 신앙이 사도적 계승권을 갖고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생각이 거기 있었다. 역사 속의 교회를 통해 성서적 신앙이 계승되어 온 것처럼 장차도 그러한 전통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있다. 곧 시간적이며 수직적 구조를 갖는 것이다. 바로 1907년의 대부흥 운동에 담겨있는 구조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기초를 평양신학교로부터 배웠다.

 

교회와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된 小竹 강신명 목사 (7)

[[제1216호] 2010년 2월 6일]

선천에서의 목회시절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그 눈부신 기적의 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평북의 선천이 선두에 있었다. 그런데 선천의 기독교도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지 않았다. 기독교에 입교하여 1896년에 평양에서 되어 돌아온 노효준과 1897년 역시 평양에서 입교한 나병규가 친구 조규환의 도움을 받아 선교에 나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선교사 휘트모어 (Norman C. Whittemore, 위대모)가 평양에서 선천으로 주거지를 옮기고 양전백(梁甸伯)이 1897년에 선천읍교회 초대 담임자가 된 이후, 선천은 한국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북장로교 선교 스테이션은 1901년에 가서야 세워졌다.

 

1911년 읍내의 장천(長川)을 경계로 남부지역에 선천남교회가 김석창에 의해 세워지면서 북교회와 남교회로 나뉘어졌다. 교인이 급증하면서 1930년 북교회에서 선천중앙교회가, 1931년 남교회에서 선천동교회가 분립되는 등 많은 지교회가 설립되었다. 2만의 인구와 4천여 호의 소읍이었지만 1906년에 신성중학교와 1907년에 보성여학교 등 학교들이 기독교에 의해 세워졌고 최이손(William H. Chisholm)이 봉직하고 있던 미동병원 등으로 인해 주민들은 근대의식으로 깨어 있었다. 남녀 기독교청년회가 주야학관을 열어 공부를 하지 못한 이들을 교육시켰고, 교회연합으로 설치한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있었다. 여기에 이영학이 자비를 내어 선천회관을 건립하여 도서관과 상업학교를 운영하였다. 특히 양전백이 세운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경의선이 부설되고 교통이 원활해지자 선천은 더욱 각광을 받는 기독교 지역이 되었다. 1919년에는 선천 기독교청년회(YMCA)가 만들어져 계몽운동도 이끌었다. 일제하에서 선천이 한국의 예루살렘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의 선천지역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과 1906년에 완전히 배가(倍加)가 된 것이다. 세계교회는 한국교회, 특히 선천교회의 이러한 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가 아시아를 밝혀주는 빛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한 것도 선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천의 교인들 모두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교인들 대부분은 중산층과 자립농들이었다. 그래서 여유가 있었고 교회의 재정은 든든했다. 주일이면 곳곳의 예배당 종소리가 읍 전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읍민의 60% 이상이 기독교인이어서 주일에 장날이 겹치는 날이면 장이 서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천의 교회는 경쟁하지 않고 서로 연합했다는 것이다.

 

매주일을 앞둔 성경공부는 언제나 네 교회(북교회, 남교회, 동교회, 중앙교회)가 연합으로 했다. 토요일 하오 2시에는 여자들을, 그리고 저녁에는 남자들을 모아 공부시켰다. 공부가 끝나면 비공식 회합이지만 네 교회 교역자와 장로들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항상 상의하곤 했다. 이러한 교회의 단합을 일제당국은 좋아하지 않았다.

 

강신명은 이렇게 선천의 교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천의 교회는 언제나 하나로 뭉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일본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일본은 늘 직·간접으로 교회 정보를 입수하고 내정간섭을 해야 했다. 또 불온 분자로 생각되는 인물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사실, 선천은 한국의 전통과 체제에서 소외받았던 지역이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주변부에 속했었다. 교회사적으로도 그 시작은 미미했던 곳이었다. 휘트모어 선교사가 처음 선천에 도착했을 당시 기독교인이 단 두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전래되었던 기독교가 한국의 주변부였던 선천을 한국근대화의 새로운 요람, 새로운 중심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때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을 이끄는 중심에 서려면 순수한 복음 이외에 또 하나의 조건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의 절대 명제, 곧 항일과 독립이라는 민족의 요구도 함께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선천은 그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켰다. 선천은 신앙의 요람지인 동시에 민족운동의 터전으로도 그 이름을 떨친 것이다. 선천의 교회들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과 민족의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답과 참여를 하였고 그것이 전통이 되었다.

 

한국에서 항일운동이 가시화 되었던, 1911년의 일명 ‘105인 사건’의 발단도 바로 선천이었다. 1910년 12월, 선천의 안명근이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암살하려던 사건을 핑계로 일본은 1908년 황해도의 김구와 최광옥이 조직한 해서교육총회, 1906년 도산 안창호가 주도했던 신민회, 1909년 안창호가 윤치호와 함께 조직하여 전국에 확산시켰던 청년학우회를 없애려 하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의 이런 계획아래 조작된 것으로 저들은 특별히 평안도 일대의 북장로교 교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 몰아,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일제는 신민회의 뿌리를 뽑고,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상을 꺾어 한국통치의 장애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총독부는 가장 악독한 고문을 지시했다. 그 결과로 6백 명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이 기소되었다. 1심(審)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불복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이 무죄 석방되었지만 지도자급에 속했던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명이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선고를 받고 복역해야 했다. 선천의 기독교가 일본의 통치에 가장 큰 저항이 될 만큼 조직적으로 성장했다고 보았고 그 힘을 제거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선천 기독교의 항일정서, 민족정신의 고취와 그 열정이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3·1운동 때도 선천은 평안도를 선도했다. 이승훈과 양전백의 기획으로 선천의 남·북교회와 신성중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매 토요일 하오 2시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던 선천의 남·북교회의 어른들은 1시 반 초종치는 것을 신호로 준비를 갖추고 나와서 재종치는 것을 신호로 만세를 부르도록 비밀리에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또한 남강 이승훈도 신성중학교 성경교사였던 홍성익에게 학생들이 시위할 것을 독려했다. 학생들은 예정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선천역 앞 오리정 광장에 모인 그들은 교사 김지웅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북교회의 담임자였던 양전백은 33인중 1명이 되었고 남교회의 김석창도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천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외치다가 그 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일본의 발포로 숨졌고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한편, 1919년경에 선천기독교청년회가 농촌 선교를 위해 조직되면서 1937년의 ‘수양동우회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다. 일본이 ‘수양동우회 사건’을 크게 취급했던 것도 선천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선천 기독교가 한국의 민족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강신명이 교회와 민족의 소통을 부르짖은 것도 선천의 기독교에서 체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과 민족, 이것은 민족교회의 절대 명제요 한국을 이끄는 힘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더욱더 확인하였던 것이다.

 

강신명과 부인 이영신은 늘 선천을 그리워했다. 선천은 그들에게 있어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선천으로 돌아가 목회를 할 것이라고 그들의 아들 석공에게 늘 말하곤 했었다.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감! 선천의 기독교는 이 양자를 모두 갖고 있었다. 한국의 주변부에서 중심이 되었고, 한국기독교가 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민족애에 대한 드높은 이상을 선천의 기독교는 세계에 알렸다. 바로 강신명의 사상과 꿈이 뿜어져 나왔던, 그 내연의 터 중 하나가 선천이었던 것이다.

김명구 교수 <서울장신대 한국교회사>

 

교회와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된 小竹 강신명 목사 (8)

[[제1217호] 2010년 2월 13일]

서문밖교회와 선천남교회의 목회

 

 

 

1936년 1월, 평양신학교 재학시절 강신명은 잠시 평양 서문밖교회의 유년부 담당 전도사로 목회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 해 12월 선천남교회의 전임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한 후인 1938년에는 선천 남교회의 동사(同事)목사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서문밖교회는 총회가 자주 모이고 지식층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 한국교회는 유년부를 전담하는 목회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는 한국 최초의 유년부 전담 목회자였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주일학교의 역사는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전담자는 그가 최초였다. 자신의 첫 목회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주일학교 운영에 대한 전체적인 책임을 가지지 못한 곳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나 자신이 여기에 대한 충분한 예비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과 연구가 부족한 탓이라 하겠다. 한 주일에 주일학교 시간을 제외하고라도 세 번 예배를 보았다.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여 주일학교 시간과 세 번의 예배시간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런고로 이것은 연습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는 남학생들과 그룹 운동 같은 것을 시도하였으나 원만치 못하였다. 그 외에는 주교생들 집에 병자가 있는 경우 방문하는 정도였다. 나는 이것을 나의 목회의 시작인 동시에 완전히 실패라고 보고 있다.

 

 

면려회 지도교사를 오래 하고 어린이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동요를 만들었던 강신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년 담당 목회에서 실패했다고 자책했다. 유년주일학교 운영에 대한 구체적 교육방법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담 목회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실망이 따르는 것이었고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었다. 그래서 신학자가 되겠다며 유학을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목회에 실패했다는 낙담과 실의는 젊은 강신명을 한동안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1938년 3월, 강신명 목사는 계일승, 김양선, 손양원 등 41명의 동창생들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하던 해였고 제33회 졸업생이 된 것이다. 졸업을 앞둔 강신명은 박윤선의 주선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목회를 고집했던 그의 아버지로 인해 그 생각을 잠시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곳이 선천에 있던 남교회(南敎會)였다.

 

졸업하던 해 8월, 강신명은 제54회 평북노회에서 남교회의 청빙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남교회는 1911년 8월 28일 선천의 천남동 중구에 예배당을 건립하면서 창설된 교회였다. 신학생시절 한 두 차례 잠깐 들른 일은 있지만 남교회의 담임자 김석창(金錫昌)과는 특별한 관계는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선천북교회가 후임 담임자를 뽑을 때, 김석창은 강신명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강신명도 평생에 잊지 못할, 존경하는 교역자로 김석창을 지목하였다. 김석창에게서 목회를 배웠던 그는 교회가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목회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강신명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있던 남예배당은 북예배당보다 10년 후에 지어졌으나 천장에서 비가 새고 목재도 상한 곳이 많아 개축(改築)하게 되었다. 교인들이 세 차례나 헌금을 하고 정성을 들여 결국 새 예배당을 지었다. 그런데 새 교회 입당 예배를 앞두고 주일학생들이 새 집에다 낙서를 해버렸다. 당시 당회 서기로 일하신 박찬빈(朴贊斌) 장로는 성미가 급하신 분이라 주일 학생들을 막 야단을 쳤다. 이것을 본 김석창 목사는 웃으면서 “집이란 짓는 그 순간 낡은 집 아니오, 헌당식 할 때 한번 손질하면 되지 않겠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오늘까지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지난 번 새문안 예배당을 짓는 동안에는 더욱 그랬다.

 

 

강신명은 3년만 교역 경험을 쌓은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했고 남교회와도 그렇게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부임 후 한 달 만에 터진 중일전쟁과 이어서 발발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설립되는 곳에 병설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은 선교의 접촉점을 이루는 한국교회의 선교방식이었다. 또한 선교와 교육이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대개 이 학교들은 선교사들이 보조를 하였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층들이 참여하였는데 초등학교 수준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선천의 교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천의 교회들도 사설학원을 병설하였다. 그는 남교회가 설립한 학교에서 한글 보급운동을 펼쳤고 보통학교 교과서를 가르쳤다. 성경공부 때에는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따로 한글반을 개설하였다. 교회에 가면 글을 깨우칠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반대하는 가정도 주일이면 처녀들까지 교회에 보냈다.

 

강신명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강병주는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교회의 한글보급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평북노회 회집 시에는 참석을 하였고 평북노회 목회자들과의 관계가 돈독하였다. 그는 아들을 설득했고 평북노회로 인도하였다.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강병주의 힘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강신명을 남교회의 동사목사로 부른 것은 최종적으로 김석창 목사의 결정이었다. 그때 김석창은 평양신학교 출신들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는 제15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남교회 목회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노회 선교부원으로 만주선교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고 국산품을 전용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김석창 목사는 애국운동에도 선봉에 있었다. 105인 사건과 3·1운동에 모두 가담하였고 선천경찰서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었다. 이 일로 김석창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일제의 고문이 악랄했음을 잘 말해준다.

 

 

지내간 가을에 평안북도 션쳔왜경찰셔가 독립군의게 부서젓다 함은 각 신보에 게재되엿거니와 소위 폭탄법으로 명사를 붓처가지고 무죄한 에슈교회의 목사당로 수십여명을 신의쥬로 잡아다 여러 달동안을 별별한 악형으로 뒤다리다가 지나간 달 二十一일에는 소위 판결언도가 잇섯는데 방텅인은 六백여명에 달하엿고 김셕챵(金錫昌) 목사는 왜놈의 쇠몽치애 한편다리가 부러져슴으로 소위 재판뎡에 업어내여다 안지고 팔결언도 하는데 (중략) 김석챵목사난 미국시찰단이 올 때에 請원셔를 드리쟈고 도모하엿다고 十二년 징역으로 언도한바 김목사난 놉흔 소래로 왜재판당의게 말하기를 나는 다리가 상하야 세상에 사라도 일할 수도 업고 또 이 몸을 가지고 十二년 복역을 할 슈도 업스니 고맙컨대 나도 박티일과 갓치 사형에 쳐하라 하난 소래 참 하날이 무셔운 무리판걸이엿다고.

 

 

그런데 1926년 15대 총회장이 된 이후, 김석창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문제의 시작에는 복음의 내적 동기가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야웨 하나님께 민족의 장래를 위탁하는 태도, 곧 정치에 직접적 개입을 피하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맡기는 민족교회의 전통을 계승키로 한 것이었다. 그는 오직 “예수 사랑”만을 설교했다. 물론 교회가 민족을 이끌어야 하고 그래서 민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에게는 교회가 민족운동의 도구가 아니었다. 교회는 민족을 선도하지만 복음이 민족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그런 신앙형태로의 전환이었다.

 

강신명은 김석창으로부터 그런 사상적 태도도 배웠다. 민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교회가 언제나 우선이었다. 교회와 복음의 정신을 통해 민족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초월의 하나님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강신명에게 분리되지 않았던 것은 김석창으로 인한 것이었다. 강신명이 교회와 민족의 상관적 관계에 대해 확고하게 정착한 것은 바로 선천 남교회의 김석창 때문이었던 것이다.

 

교회와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된 小竹 강신명 목사 (9)

[[제1218호] 2010년 2월 27일]

목회와 면려회운동

 

 

강신명은 소년면려회나 청년면려회 활동에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새문안교회의 담임자가 되었을 때에도 그의 면려회에 대한 한없는 애정은 계속되었다. 1963년에 강신명은 면려회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과거 40여 년 동안 우리 교회 안에서 면려회 운동이 평신도 지도자를 얻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이제 면려회의 연장단체라고 할 수 있는 장년면려회가 그 체제와 목표를 일신하여 명실공히 평신도 운동으로 나간다는 것은 때에 알맞는 운동이라고 하겠다. 면려회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던 일을 회상해 보라.

 

그것은 회원 하나하나가 순서에 동참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원마다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 의무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그와 한 가지로 대외적으로 좋은 푸로그램을 가졌었다. 교회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그 시대에 있어서 필요한 일들을 시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 가치를 높이 휘날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은 많은 변천이 있느니만큼 꼭 같은 푸로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대로 급격히 변천하는 이 사회에서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할 것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써 온줄 한국교회문제와 나아가서는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공헌이 있기를 바란다.

 

 

강신명은 장로교회가 면려회 운동의 역사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선천에서의 강신명은 면려회 운동에는 적극 가담하였지만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민족운동 계보에 속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기에 묘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일본은 서북지역의 가장 큰 민족운동조직이었던 수양동우회에 강신명이 직접 연계가 되어 있다고 의심했었다.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인 동시에 서문밖교회의 유년부 전담 전도사인 강신명이 선천의 청년면려회에서도 가끔 강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그만큼 면려회를 민족운동조직의 일환으로 보았다.

 

장로교의 기독청년면려회는 반일의식이 강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일본이 항상 경계의 눈을 떼지 않았었다. 또한 면려회가 진행하는 의식화 훈련은 언제나 일본을 긴장시켰다. 당시의 면려회 모임의 진행에 대해 강신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매주 통상예배에 쓸 성구와 주제가 주어지면 돌아가면서 토론하고 간증을 했다. 약 30분간 예배하는 가운데 처음 찬송과 마지막 찬송 인도를 각각 다른 사람이 했다. 기도하는 것도 한 사람이 긴 기도를 다 하지 않고 미리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한 두 마디씩 몇 사람이 계속 기도를 하게 하여 각 회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훈련을 쌓게 하였다. 이러한 청년운동은 토론회도 가지고 웅변대회도 하여서 자신들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 략) 당시 많이 불려지던 노래가 “인생아 권세 있느냐?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 것만 못하다”였던 것만 보아도 얼마나 자유를 추구했었는지 알 수 있다.

 

 

자유를 추구하고 자신들의 의사를 가감없이 표출하는 면려회 청년들의 이러한 태도에 일본이 의심의 눈초리를 겨누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교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교파는 처음부터 장로교회였다. 그 숫자는 다른 교파를 압도하는 것이요 교권의 힘도 거기에 비례하였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교권은 서북에 기울여져 있었고 한국교회의 지도력도 거기서 나왔다. 결국 서북계 북장로교 선교부와 이에 따라 세워진 장로회가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면려회(CE)는 서북교권과 밀착된 안창호계의 동우회(同友會)계, 곧 정인과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운동인 면려회 운동은 전통적으로 서북교회가 추구하던 전통, 곧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해 무심했던 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로교 면려회 운동은 YMCA를 비롯한 비서북계가 추구하던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던 것이다. YMCA나 비서북계 활동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운동을 서북의 교권이 택한 것이었다.

 

강신명이 면려회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애정을 보인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강신명의 개방성이다. 경북의 영주기독교 출신인 그는 중학교 시절 장감 학교를 두루 거쳤다. 영주의 기독교는 서북과 비서북의 신학형태를 통합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갖추었다. 장감학교, 평양의 숭실, 공주의 영명, 서울의 배재, 대구의 계성을 거친 전력이 그에게 포용성과 개방성을 가져다 준 것이다.

 

둘째, 그가 선천에서 목회를 배웠다는 것이다. 선천은 서북지역 중 민족주의 세력이 가장 왕성한 곳이었다. 따라서 평양신학교를 통해 배운 서북의 전통인 초월적 하나님과 교회 우선의 신학, 선천 지역을 통해 얻은 것, 곧 교회가 민족과 소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강신명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당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이끌었던 물산장려운동은 그 시대에 있어서 생활 혁명이었다. 인습에 젖어 있던 세대의 반발은 컸으나 교회가 여기에 호응하고 뒷받침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올렸던 것이라 행각한다. (중 략)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그런 것은 세속적인 문제요, 기독교는 영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영혼 구원에 관한 것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강신명에게서 선천의 교회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적 열성은 찾아내기 어렵다. 그의 목회 지향 자체가 서북계 민족주의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오히려 민족운동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활동이 진정한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평소에 예수의 능력있는 역사를 본 것과 같이 예수는 꼭 해방자로 오신 것이 분명하고 또 그러한 능력의 소유자인데 언제 그 일을 하려는지 기다려도 기다려도 착수하지 않으니 이렇게 팔아 넘겨서 잡히게 되면 궁지에 몰린 예수가 한 번 능력을 발휘해서 외세를 무찌르고 유대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키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배신적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고들 짐작해 본다.

 

 

그러나 강신명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에게서 목회를 배웠다. 따라서 그는 사회의 당면과제나 민족의 문제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따라서 교회와 민족의 소통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강신명은 면려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애정을 가졌지만 그것을 민족주의 운동의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교회의 구조를 가진 것으로 한국교회의 민족과의 소통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면려회 운동은 서북과 비서북의 신앙형태를 통합하는 것으로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성경과 교리와 교회 권위의 절대 시인, 복음의 사회적 실천, 극좌경의 사회적 기독교에 대한 배척 등의 목표를 그는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출처 : ..........오소운 목사의 [찬송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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