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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제조기'로 40년 승승장구하다 첫 '꼴찌 성적표' 받아든 김응용의 실패학

하마사 2013. 10. 30. 12:03

13연패 끝 1승… 야구가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다
- 나의 無知
선수들을 깊이 연구 못했어… 5~6회 버틸 걸로 알았는데 1~2회에 무너지고…
- 패배주의
다들 지는 데 익숙해있어 해보겠다는 의지가 약했어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강훈련 해봤지만 역부족
"지면 잠이 안왔어… 새벽 1~2시 산에 가 고함지르며 태균이 욕도 했지"
- 무능용·킬끼리 등 별명
한화 팬에 너무 미안했어
'밥이 넘어가나' 말들을까 식당 안가고 집밥 먹었지
- '가을야구' 다시 하고 싶다
조지훈·송창현·임기영 등 신인들에게서 희망을 봤어…
- 나의 영원한 꿈
돈 많이 벌면 고향 이북 땅에 가서 야구단 차려 감독하는 거야


	야구 글러브

 

 

 

 

 

 

 

 

 

서울에선 '가을 야구'가 한창이던 지난 18일. 대전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한화 한밭야구장을 향했다. "야구도 끝났는데 야구장은 뭣하러 가느냐"는 택시 기사 물음에 "김응용 감독님을 만나러 간다"고 답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오는 거 아닌가. "어이구, 김 감독 만나면 고맙다고 좀 전해주시오." 팀이 꼴찌를 했는데 뭐가 고맙다는 걸까.


"야구 보다가 득도(得道)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웠거든요. 예전 (한화가) 빙그레였을 때 우리 발목을 번번이 잡은 분 아닙니까. 최소한 꼴찌는 안 할 줄 알았어요. 어휴, 근데 열불이 나서…. 우리 집이 교회를 다니거든요, 근데 막내 아들내미가 언제부터인가 경기 때만 되면 목탁을 들고 돌아다녀요. 몰라요? 한화 팬보고 다들 살아있는 부처라고들 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택시 안에선 기독교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부처'. 올 시즌 한화이글스 팬에게 새롭게 붙은 별명이다. 시즌 내내 압도적인 꼴찌를 달리는 동안에도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는 팬을 향한 위로의 표현이자 자조적인 허탈감이 섞인 말이다. 팬들에게만 새 별명이 생긴 게 아니다. 9년 만에 현장 사령탑으로 복귀한 '코끼리' 김응용(73) 감독에게 일부 팬들은 '무능룡' '킬끼리(무리한 선수 기용으로 팀을 죽인다는 뜻)' 등의 별명을 선물했다.

사실 한화의 하위권 탈출이 쉬워 보인 건 아니다. 한화는 2009년 시즌부터 지난해까지 8개 구단 중 8·8·7·8위로 꼴찌 혹은 꼴찌 근처를 맴돌았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팀의 핵심 투수인 류현진·박찬호·양훈이 빠져나가 전력 누수가 컸다.

하지만 김응용이 누구인가. 그는 야구, 특히 '가을 야구'의 전설이었다. 프로야구 해태 감독 취임 첫해(1983년)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18년 동안 해태를 9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고, 2000년 말 삼성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며 21년 묵은 삼성의 한을 풀었다. 프로 감독 22년 동안 그가 포스트 시즌(가을 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건 단 여섯 차례뿐이다. 선수 때도 그는 홈런왕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야구계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김성근(고양 원더스) 감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타입'이라면 김응용 감독은 '일류를 초일류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꼴찌 한화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그에게 또 다른 타이틀이 붙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즌 그에게 붙은 것은 개막 13연패라는 '신기록'에 '프로야구 최초 9위 감독(9개 구단이 된 시즌의 첫 꼴찌 감독)'이라는 타이틀이었다. 누구나 꼴찌로 예상한 신생팀 NC다이노스에도 뒤진 것이다. 프로·아마 합쳐 감독 생활만 40여년을 한 그에게 꼴찌라는 성적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시즌에 그가 작성한 프로야구 최초 1500승이란 대기록은 팀 성적 앞에서 조용히 묻혀버렸다. 자연스럽게 나이(73) 이야기가 나왔다. 현장 감각이 무뎌졌다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치매 야구'란 고약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간 김응용 리더십의 키워드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에 대한 철저한 신봉 등으로 집약됐다. 제아무리 스타급 선수라도 팀 분위기를 흩트리면 언제든 내치는 등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했다. 불 같은 성격으로 심판들과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도 선수들을 향해선 몰래 화장실에 뒤따라가 조용히 칭찬해주는 '아버지형 지도자'로 불렸다. 하지만 한화에서는 예의 그런 모습이 거의 비치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만난 김응용 감독은 "이런 성적을 기록했으니 비난받을 만하다. 당연하다"며 입을 열었다. 워낙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데다 팀 성적이 바닥을 치면서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 시즌을 되짚으며 때로는 풀이 죽은 채로,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어갔다. "야구가 이렇게 공포스럽긴 처음"이라며 "생애 가장 혹독한 한 해였다"고 밝히는 김 감독의 얼굴에선 바스락 부서지는 가을 낙엽처럼 쓸쓸함이 묻어났다. 몇 마디 하고는 그와 1.5m 정도 떨어져 서 있는 구단 홍보팀장을 흘깃 쳐다보며 허허 웃는 행동을 반복했다.

우리나라야구역사상김응용감독의업적을뛰어넘을사람은당분간없어보인다. 그랬던그가“이보다더호된신고식은없었다. 살다보니지는것도단련되더라”며너털웃음을지었다.‘ 꼴찌’라는얘기가몇번나오니“제발그얘기좀그만하라우”라며인상을찌푸리다가도“올라갈일만남았다. 한화 잘되는 거 빼고 내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다”며 또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가을 야구, 나도 하고 싶다”고 조용히 말했다./대전=신현종 기자
처음 맛본 '공포'와 '초조', 김응용을 뒤흔들다

개막 뒤 13연패. 2003년 백인천 감독의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개막 12연패를 뛰어넘은 기록. 초반부터 이렇게 무너질 거라곤 그도, 팬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공포'와 '초조'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한 템포 빠른 판단력과 특유의 냉정함으로 '코끼리의 몸에 여우의 지략을 갖춘 지도자'로 칭송받았던 그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흔들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개막 후 13연패했잖아. 이게 또 신기록이라잖아. 아주 죽겠더라고. 자꾸 지니까 초조하고 또 초조하고…. 내 평생 이런 스트레스는 처음이야. 13연패하고 겨우 1승 올리는데, 이런 게 야구라는 걸 처음 알았지.

야구라는 게 하루 이기면 그다음에 지고, 또 그다음 이기고 이렇게 주고받고 하니까 흥분되고 짜릿하고 그렇잖아. 그런데 여기 와서는 경기 시간만 되면 겁이 나고 공포심이…. ‘아! 또 오늘 지는구나’ 그 생각에. 경기하러 더그아웃에 들어가는데 그 길이 그렇게 먼 거야. 그런 무서움은 인생에서 처음이었어.”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실제로도 지지 않는다”고 누차 강조하던 과거 김응용과는 한참 거리가 먼 모습이다. 공포는 조급함을 만든다. 조급함은 실패의 출발이다. 그 역시 마무리 송창식의 무리한 투입과 선발 투수의 이른 교체 등 불안정한 마운드 운용으로 호된 비난을 받았다.

“식당도 못 갔어. 팬들 보기 미안해서”

―왜 한화를 택했나요? 전년도 꼴찌였고, 전망도 밝지 못했는데.

“재밌잖아. 매일 강팀에 앉아 있었는데, 약팀 맡아 노력해 우승해 보는 것도 보람 아니야. 한화 쪽에서 같이 한번 해 보자 하니 ‘고맙습니다’ 하고 해보겠다고 했지.”

―감독 그만둘 때 스트레스 때문에 감독은 다시 안 하겠다 하셨던데.

“야구쟁이가 야구 안 하고 있으니 계속 몸살이 나 있는데, 불러주니 고맙잖아.”

―그렇게 돌아왔는데 또다시 스트레스로 고생하셨네요. 극복이 좀 되던가요?

“그래서 내가 산을 타는 거야. 잊어버리려고. 잠을 도통 잘 수가 없으니 새벽 한 시에도 두 시에도 산에 가는 거야. 역전당하거나 근소한 차로 지면 더 속이 끓어서 잠이 안 와. 그날 경기가 계속 머리 맴돌고 복기하게 되는데 잠이 오겠어? 플래시 하나 들고 두어 시간 산을 타고 나야 좀 눈이라도 잠깐 붙일까….”

―산을 타면 뭐가 좋던가요.

“한참 타다보면 우선 잊어버리니까. 사람 없는 데 가서 (김)태균이 욕도 하고, 소리 지르고 ‘그때 말이야 너 왜 그랬냐’고 한참 말을 해. 경기장에서 하지 못했던 말, 산에 가서 실컷 하는 거지. 내가 마흔 살 때부터 산을 탔어. 다른 감독들은 주로 스트레스를 ‘한잔’으로 풀잖아. 선(동열) 감독 얘길 들으니 감독 1년 해보니 약을 이~~만치 먹어야겠더래. 근데 난 생전 약 한번 입에 안 댔으니, 그거이 나보고 존경스럽다데. 난 산 타면 사람 안 다니는 길로만 찾아 다니거든. 사람 보기 싫어서.”

―사람이 왜 싫던가요?

“말 걸잖아. 이기면 이긴 대로 그렇고, 지면 뭐 말도 못하고. 왜 졌느냐고 그렇게 따져 묻는데 일일이 대꾸할 수도 없고. 사람 만나는 게 귀찮고 싫어.”

―올해 ‘밥이 넘어가느냐’는 말 들을까 식당도 거의 못 갔다면서요.

“아니, 여기 대전은, 알잖아. 우리 관중은 심한 야유나 그런 거 없었어. 그래도 속은 얼마나 탔겠어. 미안하지. 팬 보기 미안하고 그래서 식당도 사람 많은 데는 못 가고 밥도 집에서 해먹고 그랬지.”

―인생 처음 맛보는 꼴찌예요. 감독님 인생에 마이너스가 된 거 아닌가요?

“그래도 올해가 제일 재밌었어. 가장 보람돼. 무슨 얘기냐면 남자 군대 갈 때 훈련소 가보면 이 갈면서 두 번 다시 안 온다 해도 그 추억이 제일 남잖아. 끝나고 나니까 인생이 그런 거야.”

김응용 감독은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 하나는 정말 세 보였다. ‘꼴찌를 일등으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김성근(71) 감독 이야기를 물을 때였다.

―김성근 감독의 ‘야신(野神)’이란 별명도 직접 붙여주셨다면서요. (2002년 한국 시리즈에서 삼성 김응용 감독이 LG의 김성근 감독을 만나 막판 역전으로 정상에 오른 뒤, “야구의 신과 경기하는 줄 알았다”고 인터뷰한 데서 ‘야신’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내가 언제 야신이라고 했어? 그냥 신이라고 했지. 신에 종류 많잖아. 짚신, 고무신…. 안 그래? 허허.”

선동열 감독과,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해태와 삼성에서 찰떡궁합을 과시했던 선동열 감독과 김응용 감독은 올해 망신을 톡톡히 샀다. 시즌 초반 선두를 달렸던 선 감독의 KIA는 결국 NC에도 밀려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해태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분이 올해 단단히 망가졌어요.

“얼마 전에 선 감독과 식사하면서 오랫동안 얘기했지. 왜 올해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뭐가 문제일까, 그런 이야기. 변명 같지만 9개 구단 중에서 한화하고 KIA가 2군 구장이 제일 늦게 완성됐어. 한화도 얼마 전까지 2군 훈련장이 없어서 고등학교에서 한두 시간 빌려서 훈련했어. 프로가 그래서야 어떻게 해. 2군서 선수가 올라와 주전의 빈자리를 메워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요즘 야구는 힘들어. KIA도 주전 대여섯이 부상당해 쓰러지니 저렇게 됐다 하더라. 삼성을 봐. 20~30년 전부터 2군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해 얼마나 좋아. 그런 데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지.”

―해태 때 구단의 지원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2군 훈련 시설도 없고.

“그때는 고교 특급 출신이 많아 자원이 풍부했어. 2군에 관심도 덜했고. 그때와 야구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야.”

―10년 공백에 현장감이 무뎌진 건 아닌가요?

“10년 전하고 지금 달라진 게 뭐이가 있어. 한번 말해보라우.(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높아졌다) 삼성 사장 끝난(2010년) 뒤에도 야구장 주변에 난 항상 있었어. 문제가 있었다면 삼성 (사장으로) 있을 때 한화를 깊이 연구 못 한 게 아쉽지.”

그는 “거의 시즌이 끝날 때까지 (선수 성향 등에 대해) 깊이 몰랐다”고 말했다. “시즌이 끝나고 내 처음 판단하고 다른 게 보이니까. 또 투수 같은 경우는 5~6회까지는 한 3점쯤 내줄 수 있는데 1~2회에 작살나는 애들이 눈에 띄는 거야. 또 경기 중에 과다하게 긴장한다든지, 그런 여러 성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데.”

―나이가 많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어요. 전술 운용 능력에 의문을 보이는 거죠.

“나이 얘기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얘기야. 내가 체력은 50대 못지않아. 메이저리그나 일본에선 80세 넘은 감독도 많았는데…. 야구 모르는 것들이나 감독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우리나라는 3만 관중이 죄다 야구 감독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킁킁거리던 콧소리 대신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소리 하려면 그만합시다.” 그는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야구 생각하느라 그래서 다른 것엔 잠깐 깜빡깜빡 하는 건 있어도 매사 얼마나 철저한 줄 알아요? 오늘 약속 시간 착각하고 늦은 건 내년 데려올 선수 생각하느라 잊은 거지. 이런 일도 내 생애 처음이오.”(그는 이날 인터뷰 약속 시간에 40분 늦었다.)

―선수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어요.

“내가 나서면 코치 역할이 없어지잖아. 코치한테 힘을 실어줘야지. 삼성·해태 있을 때도 코치한테 다 맡겼어.”

김응용 감독은 국내 프로야구에서만 승승장구했던 게 아니다.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숙적’일본을 3대1로 꺾고 동메달을 따냈다. 기쁨에 가득 찬 선수들이 경기 뒤 김응용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조선일보 DB
◇“종범이, 차라리 네가 뛰어라….”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도 지켜만 볼 순 없었다. 그는 ‘강수’를 택했다.

“처음으로 정말 훈련 많이 시켰어. 엄청나게 시켰지. 해태나 삼성 있을 때 단체 훈련량이 모든 구단에서 제일 적었어. 한 세 시간 됐으려나? 여기선 거의 종일 했지. 약팀인데 연습이라도 많이 시켜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한화는 올 시즌 팀 평균자책점 5.31로 전체 최하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팀 타율 역시 0.259로 끝에서 둘째였다.

―‘내가 뛰어도 이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을 것 같은데.

“나보다는 옆의 코치들 보지. ‘코치들 인마, 종범이 너 복귀할 생각 없냐?’ 그 얘기 참 많이 했지. 네가 좀 나가라고.”

―뭐가 그렇게 안 되던가요?

“그게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한화가 몇 년 동안 안 좋았잖아. 여기 오니까 팀 분위기가 엉망인 거야. 표정을 보면 자신을 갖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영 자신감이 없는 표정이야. 하도 지다 보니까 패배에 익숙해져 있는 거지.”

―그래서 어떤 방법을 취하셨나요?

“코치들 불러서 ‘잘한다 잘한다’ 얘기해 주라고 했지. 근데 그게 별 소용 없더라고. 자신들도 팀 성적을 뻔히 아는데, 그냥 잘한다고만 해서는 안 됐던 거지.”

―선수들만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감독님도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도 많아요. 특히 예전처럼 심판들과 설전을 벌이거나 하는 카리스마가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걸 바라는 팬이 꽤 많았는데.

“에이, 다 제자들이잖아. 심판도 그렇고, 또 상대 팀 제자들이 다 쳐다보고 하는데 싸울 수도 없고….”

“나는 복장(福將), 선수 복이 많았던 것

김응용 감독은 “내가 그간 복이 참 많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야구쟁이들이 날 보면 뭐라는 줄 알아요? 복장이라고 해. 요 똥뱃심으로 야구한다고 해서 배 복(腹) 자가 아니라 복을 타고 났다 해서 복장(福將)이라는 거지. 내 힘으로 일군 게 아니라 좋은 선수들 많이 만나서 그렇게 잘했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감독은 용빼는 수가 없어. 어느 감독에게나 좋은 선수들이 적어도 딱 한 번씩 모일 때가 있잖아.”

―그것도 감독 능력 아닌가요?

“운이 좋았던 거지. 프로 세계에서 오라고 한다고 다 오고 남으라고 한다고 다 남나? 돈으로 움직이는 세계 아니야.”

김응용 감독의 ‘비장의 무기’ 중 하나는 트레이드를 통한 선수 조련이었다. ‘터줏대감이란 건 없다’고 공언해 선수들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트레이드하면 선수들끼리 신경전이 대단해요. ‘저 녀석 나보다 돈 많이 받고 왔는데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며 이를 갈아요.”

―이번엔 감독님의 조련법이 통하지 않았어요.

“트레이드를 한 게 거의 없으니까. 삼성 (감독으로) 갔을 때 구단의 첫째 주문이 뭔지 알아요? ‘전 선수 다 트레이드해도 좋다’였어요. 근데 여기선 그걸 원치 않잖아요. 앞으로는 선수 끌어와 제2, 제3의 ‘김응용 아이들’만들어 이기는 야구 해야지”

―류현진과 박찬호가 남아있었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어요.

“게네 있었으면 지금 우리 팀에서 몇 승 했겠어요. 기껏해야 합하면 20승이나 됐으려나. 좀 나아졌겠지만, 뭐 그런 거 생각할 필요도 없지. 그 외에도 전력이 많이 빠졌으니까. 서너 명 빠졌는데 보강 못 한 거이, FA 한 명도 못 잡고 트레이드로 바꾼 것도 별달리 없었고, 그런 거 좀 아깝지.”

김응용 감독의 실험이 완전히 실패로만 끝난 건 아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팀의 주축이었던 장성호(롯데)를 내주면서까지 데려온 송창현은 선발로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송창현은 제주국제대를 졸업한 힘 있는 좌완투수로, 김 감독은 야인 시절 제주도에서 그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했다. “FA 시장에서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조지훈, 송창현, 임기영(이상 투수) 같은 신인들에게서 희망을 봤다는 거예요.”

김 감독은 “인간 김응용으로서도 야구 감독으로서도 제2의 삶을 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65세 때 생애 처음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더라고. 내가 맥주·콜라도 궤짝으로, 고기도 10인분씩 먹던 놈 아니오. 의사들이 ‘어떻게 살아있느냐’고 다 놀래. 의사 말 듣고 몇개 월 만에 거뜬히 이겨냈어. 그게 김응용이야. 지금 힘들지만 난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꿈? 북한 고향에 조용히 묻히고 싶어”

23년 프로감독 생활 중에 처음으로 꼴찌 한 번 했을 뿐인데 대중은 그에게 냉정했다. 그의 과거 업적은 어느 새 잊은 듯했다. 포털 사이트는 물론 심지어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까지 감독을 조롱하거나 욕설로 도배된 글이 적지 않았다.

“그런 거 볼 필요도 없지. 신경쓰면 감독 못해. 난 30년 전부터 신문 안 봐. 신문 보면 기분 나쁘잖아. 시합하는 데 영향 있잖아. 우승했어도 한 번 지면 그 다음 날 조지는데. 엄청 조져.”

그는 요즘 유독 고향 생각이 자주 난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그는 1951년 1·4 후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부산으로 향했다 북의 가족들과 영영 이별했다. “내, 돈 많이 벌면 이북 땅 가서 야구단 차려 감독하는 거이 꿈이었지. 북에 두고 온 어머니·누나·형들한테 응용이가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거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에게 지금의 꿈은 무어냐고 다시 물었다. “이제는 꿈이고 뭐고 다 사라졌어. 목표란 게 뭐가 있겠어. 지금 내 상황에. 한화 잘되는 거밖에 더 있겠어? 우승해 봐야지. 인생 9회말인 지금 역전 홈런 한방 날리고, 나중에 그냥 고향 땅에 조용히 묻히고 싶어. 아주 조용하게.”
한화 김응용 감독이 대전 한밭야구장 덕아웃에 앉아 야구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화이글스는 시즌 개막 13연패하는 신기록과 프로야구 최초 9위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신현종 기자

 

-조선일보, 201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