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감동을 주는 사람

하마사 2013. 9. 8. 17:04

 

본문: 살전 1:2-7

제목: 감동을 주는 사람

목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한다.

 

 

현대인은 감동을 원합니다. 인심이 각박해질수록 감동을 갈망합니다. 기업에서도 고객감동을 경영의 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고객감동경영대상이라는 상을 만들어 고객을 감동케 하는 기업을 시상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감동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백부장은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 하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하시며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외에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에게 감동하셨던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솔로몬은 자기가 구한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받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억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2절). 주님을 본받은 자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며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칭찬했습니다. 바울을 감동시킨 교회와 성도들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1.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3절)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A.D. 50년경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로마의 영토였던 마게도니야의 수도로서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 도시로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제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와 함께 이곳에 와서 4주 동안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가 개인의 가정에서 출발했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바울이 밤에 급히 도망을 가야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충분히 가르치거나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교회를 걱정하며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보내 교회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데살로니가교회는 주변교회의 본이 될 정도로 건실하게 성장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타지방에 가서 전도하던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에서 비롯된 역사’를 의미합니다. ‘역사’라는 말은 ‘일’, 또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행함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으로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은 선한 열매로 입증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함으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자연적으로 행함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하였습니다. 또한 행함이 없는 사람을 ‘허탄한 사람’(약 2:20)이라 했습니다. 공허하고 속이 빈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으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거짓되고 생명이 없는 우상을 과감히 버리는 믿음을 발휘했으며,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믿음이란 말이 동사의 형태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은 정적인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믿음이지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역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들, 불가능한 문제와 질병을 믿음으로 극복한 이야기들, 심지어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죽은 딸을 살려낸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모세는 믿음의 지팡이를 들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바로가 듣지 않자 지팡이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합니다. 지팡이를 던졌을 때 뱀이 되었습니다. 나일강을 치자 물이 변하여 피가 되었습니다. 지팡이로 개구리와 이, 메뚜기를 나오게 했고 우박이 내리게 했습니다.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리킬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지팡이를 잡고 산위에 올라 손을 들었을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지팡이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지팡이를 잡고 행동으로 옮길 때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난공불락과 같은 여리고성 조차도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 앞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함이 동반될 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믿음도 힘을 잃게 됩니다.

(예화)고당 조만식 장로님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때문에 학교 정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고당은 꼭두새벽부터 나가 정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모두 쓸었습니다. 당시 오산학교에서 고당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고당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여러 은사들에게 배워왔지만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자는 오직 고당 한 분뿐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결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이 역사하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결국 내 안에 역사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망했던 것처럼 우리의 공동체에도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의인들만 있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은 99%의 불가능 속에서 1%의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선한 열매로 입증되는 역사하는 믿음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행함 있는 믿음, 선한 열매로 입증되는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2. 수고하는 사랑의 사람(3절)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우렁이는 알이 깨어나면 자신의 살을 먹여 새끼를 기릅니다. 새끼는 어미 우렁이의 살을 파먹고 자라나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때쯤이면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아 물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살을 주는 숭고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왜 고귀하고 아름답습니까?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수고를 동반한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흉년이 되면 어미는 굶어죽고 자식은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흉년에 어머니는 굶으면서 자식들을 먼저 챙겼습니다. 과거 흉년의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는 생명줄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예화)

지리산 반달곰의 야생 방목은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지난겨울에 겨울잠을 자는 줄 알았던 반달곰 가족에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미 반달곰이 탈진해 죽은 것입니다. 30% 정도의 체중 감소와 탈진이 주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달곰 곁에는 4마리의 새끼 곰이 살아있었습니다. 도토리의 작황이 좋지 않아 모든 야생동물이 힘겹게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반달곰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적은 양의 양식으로 인해 어미 반달곰은 새끼들을 위해 아예 금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감동을 주는 숭고한 모성애입니다.

제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일생을 수고하고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시골에 가면 땀을 흘리며 지은 농작물들을 아낌없이 싸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수고가 동반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부모님의 사랑은 세상에서 감동적인 사랑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사랑은 반드시 수고와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저 또한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주로 아내가 학교에 데려다주었는데 그날은 날보고 데려주라 했습니다. 아내의 명령(?)에 순종하여 딸의 가방을 들고 우산을 받쳐주며 학교까지 함께 걸어가는 길이 행복했습니다. 수고하면서도 기뻤습니다. 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롬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기까지 희생적인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본받아 수고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이 복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슈바이쩌박사가 대학교수직을 내려놓고 식인종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환자들을 돌보며 살 수 있었던 것도, 다미엔 신부가 평생 나병환자를 돌보며 살 수 있었던 것도 수고와 희생이 동반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사랑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바우어새

조류학자들은 뉴기니의 바우어새(Bowerbird)를 ‘장식품을 만드는 유일한 조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우어새 수컷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둥지 안에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듭니다. 나뭇가지와 잎사귀, 꽃과 열매로 화려한 집을 건축합니다. 심지어 각종 열매의 즙을 이용해 장식품에 형형색색의 채색을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노래로 암컷을 유혹합니다. 암컷은 아름다운 저택과 화려한 장식품에 현혹되어 둥지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암컷의 비극은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수컷은 암컷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후부터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틈만 나면 암컷을 부리로 쪼아대며 폭군으로 돌변합니다. 새끼를 낳아도 새끼의 양육은 오로지 암컷의 몫으로 돌리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제멋대로 날아다닙니다.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수고하는 사랑이 수단으로 변질된 경우입니다. 감동을 주는 사랑은 끝까지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 얼싸안고 맞아주는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의 수고로 바울 일행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수고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성도들로 인해 감동을 받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살전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쁘게 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 수고하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말로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고와 희생이 동반되지 않은 사랑은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닌 수고와 희생이 동반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3. 인내하는 소망의 사람(3절)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예화)발가락 피아니스트 류웨이

10세 때 감전사고로 두 팔을 절단하고 피아노를 못 칠 거란 비아냥에 굴하지 않고 피아니스트가 된 26세의 청년이 있습니다. 중국의 발가락 피아니스트 류웨이입니다.

류웨이가 처음부터 피아니스트를 꿈꾼 것은 아닙니다. 그는 2002년 전국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딴 수영 선수출신입니다. 2008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하던 그에게 다시 시련이 닥쳤습니다. 원인 모를 악성 홍반(紅斑)이 온몸에 퍼져 더 이상 수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선수의 꿈을 꺾어야 했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거의 달관한 기분이었어요. 수영을 할 수 없으니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떠올랐지요."

어머니가 인근 음악학교를 찾아가 입학 상담을 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댁의 아들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발가락 사이가 찢어지도록 하루 7시간씩 피아노에 매달렸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후엔 '발가락 피아니스트'로 일약 스타가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불행할까 같은 생각은 쓸데없습니다. 그런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잠을 자는 편이 나아요. 현실에는 '이미'와 '비록'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운명의 길을 따라 어둠으로 가게 될 겁니다. '비록' 일어나긴 했지만 극복해야겠다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삶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하여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발가락 피아니스트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소망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품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을 바라는 소망의 인내라는 뜻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장차 심판하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들을 기쁨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교회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는 구절에 ‘많은 환난’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환난이란 단어의 뜻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틀에 넣고 압박하여 으스러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반대했던 유대인들로 인한 핍박과 이교도들로부터 당한 극심한 고난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으로부터 황제숭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했고,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했고, 또 직장이나 그밖에 어떤 단체에서든지 핍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난과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의 투병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망입니다. 다시 낫는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과 자포자기한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투병생활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에서 그렇습니다.

(예화)매미

더운 여름철에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매미는 수명이 한 달인데, 그 한 달을 울기 위해 6년을 굼뱅이로 지냅니다. 미국에는 17년 매미가 있는데, 이 매미는 한 달을 위해 무려 17년을 굼벵이로 생활한답니다.

매미는 여름에 나무에 붙어 마음껏 노래하겠다는 희망으로 몇 년간을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멋진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니 매미보다 더욱 인내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화낼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서운한 것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무시와 멸시를 당해도 덮어둘 수 있습니다.

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토록 모진 고문을 견디며 사자의 밥이 되거나 톱으로 켜는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 있었습니까? 무덤 속 토굴에 살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며 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잘못된 종말사상은 과거에 다미선교회와 같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며 교회의 이미지에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거기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깨어지고 영혼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속에서의 삶을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살되, 세상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믿음의 소문이 나는 교회,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 수고하는 사랑의 사람, 인내하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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