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수안보 쪽으로 문경새재를 넘다 보면 길 왼편에 '문경새재 아리랑 비(碑)'가 서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구성진 가락에 담긴 짓궂은 해학에 웃음 짓는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지만 100년 전만 해도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거의 없었다.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처음 정리한 사람이 호머 B 헐버트였다.
▶문경아리랑은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採譜)한 아리랑이다. 그는 1896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논문을 쓰며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줬듯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애환을 버텨왔다는 뜻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을 가사도 박자도 제각기 여러 가지로 부르는 한국인들을 두고 '즉흥곡의 명수'라고 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스물셋에 이 땅에 왔다. 성(姓)의 음을 따 우리 이름을 할보(轄甫)라고 지었다. 교육자, 의사, 선교사, 언론인, 역사학자, 언어학자, 체육인,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한국에 젊음을 바쳐 얻은 호칭은 그렇게나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3남2녀를 한국에서 낳았고 그중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한국에서 잃었다.
▶1907년 일제의 핍박을 받아 쫓겨났던 헐버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49년 여든여섯일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8·15 광복절 기념식에 그를 초청했다. 나라 형편이 좋지 않아 비행기 표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미군 군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AP 기자가 42년 만에 한국 가는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랜 소원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국 땅에 발 디딘 지 일주일 만에 광복절과 건국 기념행사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호머 헐버트의 증손자로 컬럼비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서른다섯 살 킴벌이 할아버지 추모식과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때맞춰 문경시는 새재 옛길박물관 옆에 헐버트의 초상과 그가 채록한 문경아리랑 악보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서울 마포구는 킴벌에게 명예 마포구민증을 줬다.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호머 헐버트와 난 지 한 해 만에 죽은 그의 큰아들이 묻혀 있다. 증손을 반갑게 맞는 한국인들을 보며 지하의 헐버트가 미소 지을 것이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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