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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열등감 딛고 메이저리그 정상에 서기까지

하마사 2013. 6. 29. 10:15

"촌놈·영어, 그리고 노모 이 세 가지 콤플렉스가 나를 키워낸 힘"

 

박찬호, 열등감 딛고 메이저리그 정상에 서기까지

촌놈
1991년 임선동·조성민 본뒤
"난 뭐지" 큰 열등감에 직면… 그들 이기려 야구에 미쳤다
주말에도, 밥 먹을 때에도… 늘 공 던지는 생각만 했다

영어
동료가 시비 걸어 벌인 싸움
영어 못해 더 큰 징계받아… 매일 문장 하나씩 써가지고
선수들에 써먹으며 외웠다
또 마늘 냄새 얘기 안들으려… 몸에 냄새 밸 만큼 치즈 먹어

123<노모의 MLB 동양인 최다승>
노모의 신인왕 파티 다음날
난 마이너리그로 떨어져… 노모 이기겠다는 열망으로
온갖 굴욕 참고 이 악물었다… 이후 그를 넘어 124승 新기록

"엄… 줘어 영어는 좌알 못 해요." 지난 18일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40)는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하자 '박찬호식 빠다 발음'으로 맞받아쳤다. "제 발음이 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도 막 고쳐야겠다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발음을) 약간 굴리면 고급스럽게 보더라고요, 사람들이. 우리 문화가 영어를 우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지요."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박찬호는 웃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차이조차 모르고 스물한 살 때 미국에 가 LA(로스앤젤레스)다저스에서 뛰었던 그는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영어 때문에 숨이 막혔다. 초기에 내 콤플렉스(열등감)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영어였다"고 했다.

한양대 학생이었던 1994년 메이저리그 투수로 발탁, 2주 만에 마이너리그로 강등, 재기, 8차례 이적, 16년 만에 아시아 투수의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124승 달성….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장을 쓴 후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와 한국 한화 이글스에서 차례로 뛰고 지난해 말 은퇴한 박찬호는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을 움직여 온 열등감이라는 동력(動力)에 대해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다. 최근 낸 에세이집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에 그는 "콤플렉스가 나를 강하게 지배할수록 강한 자극을 느꼈다. 콤플렉스가 나를 키웠다"고 적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그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려고 멈추지 않았어요. 난 살고 싶었어요. 콤플렉스가 죽이거든, 사람을…."


	인터뷰 중인 박찬호 선수
박찬호는 한국에 있을 땐 쟁쟁한 92학번 동기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에, 미국에 진출한 후엔 영어와 일본인 메이저리거 노모 히데오(野茂英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더 많은 땀을 흘렸다. 결국 그는 콤플렉스를 동력으로 삼아 승자로 남았다. / 김연정 객원기자
◇'난 뭐지.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박찬호는 요즘 선수로 생활할 때보다 더 바쁘다고 했다. 시즌·경기·연습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선수 때와 달리 내키는 대로 살 수 있게 되자 '괜찮은 것'이 많아졌다. "늦게 자도 괜찮고, 억지로 고기 안 먹어도 괜찮고, 술 한잔 해도 괜찮고…. 술, 좋더라고요. 선수 때는 술을 권하면 딱 잘라 거절했거든요. 밤새 놀고도 잘 뛰고 던지는 선수들이 있지만 저는 안 그랬어요. 친구들 덜 만나고, 술 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 날을 준비하는 투자라고 생각했지요. 이겨야 할 사람이 참 많았거든요."

박찬호는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야구의 황금 세대'라 여겨진 92학번이다. '제2의 선동열'이라고 불렸던 임선동, 별명이 '리틀 쿠바'(당시 야구 실력이 좋았던 쿠바의 선수들을 연상케 한다는 뜻)였던 박재홍, 고등학교 때부터 '초특급'으로 불린 고(故) 조성민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그의 동기다. 당시 고교 투수의 '빅3'엔 보통 임선동·손경수·조성민이 들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찬호는 1991년 한·미·일 국제 청소년 야구 굿윌대회 선수로 나섰을 때 쟁쟁한 동기들과 처음 만났다. 박찬호의 별명은 '촌놈'이었다. 처음으로 큰 열등감을 경험했다. 그는 당시 느낌을 책에 이렇게 썼다.

"전국대회 우승 멤버들은 달랐다. 공주에서 올라온 수더분한 변두리 야구 선수와 달리, 이들은 마치 자기 홈그라운드처럼 행동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소위 야구 명문 학교에서 국제대회를 거치며 텔레비전에 등장하던 전국구 스타들이었다. 난 충격을 받았다. '난 뭐지.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92학번의 쟁쟁한 선수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직전까지 그를 움직이는 힘이 됐다. "대학 때였죠. 토요일에 일단 조성민이랑 임선동 집에 전화를 걸어 봐요.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면 기분이 아주 좋은 거예요. 놀러 나갔다는 뜻이거든. 그러면 나는 학교에 가서 혼자 연습을 했어요. 남들이 캠퍼스에서 데이트하는데 나는 혼자서 공을 던진 거죠." 밥을 먹을 때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포수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공 던지는 상상을 했다. 반찬 그릇을 보면서 몸쪽·바깥쪽 공 던지는 방법을 계산할 정도로 야구에 미쳐 있었다. 그는 "꼭 그렇게 해야 성공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로 자기가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기고도 야구를 잘하는 선수들도 있어요. 난 단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애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단 거죠." 결국 '촌놈' 박찬호는 '92학번 빅3'를 제치고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다저스에 발탁돼 한국의 첫 메이저리거에 올랐다.


	첫 완투승후 1997년 8월 12일.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다음 처음으로 완투승을 한 뒤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모습.
첫 완투승후 1997년 8월 12일.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다음 처음으로 완투승을 한 뒤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박찬호를 버티게 한 '일이삼' 콤플렉스

박찬호는 미국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메이저리그 인생을 끌고 갈, 거대한 콤플렉스와 맞닥뜨린다. 박찬호보다 11개월 뒤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LA 다저스의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野茂英雄)였다. 풋풋한 아마추어로 뛰다 미국에 온 박찬호와 달리 노모는 이미 일본 프로야구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박찬호는 책에 이렇게 썼다. "노모 선수의 라커(사물함)는 하필 내 옆자리였다. 가끔 팬들이 보내주는 책 한 권, 한국 기자들이 홍보용으로 놓고 가는 신문만 쌓여 있던 내 라커. 그와 달리 노모의 라커에는 항상 온갖 비싼 선물이 쌓여 있었다. … 당시 나에게 노모 선수는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적'이었다."

그는 1995년 9월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일시적으로 복귀하기 전날 밤, 박찬호의 방 바로 맞은편인 노모의 방에서 밤새 파티가 이어졌다. 노모가 그해 신인왕을 받기로 정해진 날이었다. 다저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이미 확정됐기 때문에 다음 날 경기는 팀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감독은 박찬호를 가늠해보고 싶었는지, 그런 경기에 선발을 맡겼다. 복귀전을 앞두고 박찬호는 노모에 대한 부러움과 경기에 대한 긴장 탓에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호투(好投)했지만 결국 마이너리그로 다시 내려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말 그대로 이를 갈았다. 그(노모)를 정말 이기고 싶었다"고 했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로 되풀이해 돌아갔다. 2007년 마이너리그에서 뛸 땐 모텔에서 라면이나 햇반·참치·김·김치로 한 끼를 먹으며 버텼다. 모텔 전기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 먹은 다음엔 잘 닦이지 않는 기름을 어렵게 씻어내야 했다. "한때는 죽음만이 괴로움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까지 착각할 정도였어요. 힘들었습니다. 죽음이 정말 가까이에 있다고 느낀 적도 있고, 길게 좌절했죠." 한국이나 일본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온갖 굴욕을 겪으면서도 미국에 남아 있었던 이유를 묻자 박찬호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일이삼이죠." '일이삼(123)'은 노모가 2005년 달성한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기록이다.

박찬호는 "123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목적… 아니, 집착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복수심 같은 것도 있었어요. '구질구질해지기 전에 은퇴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 그들은 내가 왜 메이저리그에서 떠나지 않고 싶은지 알지 못했어요. '일이삼'을 넘어서고 그 사람들에게 깨우쳐주고 싶었어요. 인제 와서 보니까 그게 꼭 올바른 생각은 아니었던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런 분노와 복수심을 힘으로 삼아 내가 성장한 건 사실입니다." 노모는 2008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그러나 노모를 상대로 한 박찬호의 싸움은 2년 더 이어졌다. 그는 "'일구일구(一球一球)'… 즉 공 하나를 집중해서 던지고, 그리고 또 하나, 그리고 그다음 것 하나를 전력을 다해 던지면서 목표에 다가가려 했다"고 말했다.

2010년 10월 2일. 피츠버그 파이리츠 대 플로리다 말린스 경기, 피츠버그가 3대1로 이기는 5회 말 상황. 피츠버그의 동료들은 구원투수였던 박찬호에게 5회에 마운드를 넘겨준다. 5회까지만 던지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는데도 선발투수였던 대니얼 매커친이 박찬호에게 '승리'를 양보한 것이다. 그는 "우리 팀의 선수, 감독, 코치가 모두 내 목표를 존중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박찬호는 그날 경기장에 나가 3회를 던졌고 타자 9명을 상대로 삼진 6개를 기록했다. 스물두 살 때 노모를 보며 외로이 세웠던, '지금은 못 따라가지만, 은퇴할 때는 노모보다 앞선 사람이 되자'고 한 목표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촌놈' 박찬호, 살기 위해 영어 공부하다

미국에 간 '한국 촌놈' 박찬호는 1995년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을 때 동료와 큰 싸움을 벌여 징계를 받았다. 박찬호보다 열 살 많은 한 선수가 "마늘 냄새가 지독하다"고 놀렸고 박찬호는 욱해서 달려들었다. 감독에게 불려간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먼저 놀린 선수보다 박찬호가 더 큰 징계를 받았다. 분하고 억울해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잘 지내지?"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차마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태연한 척 잘 지낸다고 하고 끊었다. 그러고는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다짜고짜 잘 있느냐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린 거죠. 이젠 한국 못 가게 됐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더라고요. 살아야 하는데, 내일 야구장엔 또 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된 박찬호는 영어 콤플렉스와 싸움을 시작했다. 일단 통역 도움은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하루에 문장 하나씩을 종이에 써서 들고 다니면서 선수들에게 돌아가면서 써먹으며 외웠다. 미국 선수들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미안하지만(Sorry)'이라고 하며 들릴 때까지 되물었다.

"그때 감독한테 설명을 못 한 게 쪽팔리고(창피하고) 억울하더라고요. '얘가 마늘 냄새가 난다고 내 감정을 건드렸고…' 이런 식으로 영어로 설명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징계는 둘째치고 적어도 내가 '똘아이'나 교육도 못 받은 사람 취급은 안 받았을 거 아니에요. 분노와 외로움과 열등감이 너무 컸고, 그만한 용기와 노력을 동원해 이를 극복해야 했어요. 마늘 냄새 소리 다시 안 들으려고 몸에서 미국 녀석들과 비슷한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치즈를 먹어대기도 했죠."

한국에선 그때부터 박찬호의 '빠다 발음'이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는 "내가 원래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것도 있지만… 아마도 머리가 한국어를 잊어버린 게 아니고 내 혀가 잊어버려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박찬호는 영어에서도 노모를 뛰어넘었다. LA 다저스 전 구단주인 피터 오말리는 박찬호에게는 요즘도 때때로 전화를 직접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노모와는 여전히 통역을 통해 대화한다.

박찬호는 "선수 생활을 되돌아보면 나는 늘 못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언제나 모자라는 놈이었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보려 계속 노력해왔을 뿐이다. 그러니 그 속에서 아프고 덧나는 일이 새삼 두렵지 않았다. 겪어보지 못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처가 나고 아물고, 또 덧나고, 다시 상처 입고… 그러면서 19년 프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조선일보, 2013/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