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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 성공 이끈 나경원… 그녀의 인생을 말하다

하마사 2013. 3. 9. 11:34

 

내가 공주? 정치판서 버려진 카드였어요
甲 아닌 乙로, 17개월 뛰었는데… 뭘 부탁하려면 입이 안떨어지더라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 성공 이끈 나경원
고생, 질게 뻔한 서울시장 출마 등 黨의 궂은일 모두 했는데…
유세 지원도 제대로 안하곤 선거 패배 책임은 내게 돌려
억울, 정치권서 할 일 없어지니 스페셜올림픽 진력했다고?
여러 명망있는 인사들에게 위원장 맡아달라 했지만 다들 거절해 내가 하게된 것
아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딸, 그땐 정말 막막했는데…
대학생 돼 결혼 얘기도 하고 엄마 스트레스도 풀어줘요
후회, 도벽 성향 가진 지적장애아 판사 시절 기계적으로 판결,
그 아이의 미래 위해서 그렇게 하면 안됐는데…
아쉬움, 1억 피부과ㆍ조문사진 구설… 내가 사려깊지못해 생긴 일
'배 안고파본 사람이 뭘 알아' 대중심리가 유독 내게 작동
Together we can, 더불어살기, 이시대 시대정신…
정치든 뭐든 뭘 하게 되든지 사회에 선한 영향 주고싶다

점심에 '소맥' 두 잔 반을 마셨다는 나경원(50·사랑나눔 위캔 대표)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석 잔 마시려던 걸 인터뷰 때문에 남겼다며 웃었다. '술은 못한다'거나 '와인만 조금' 하며 내숭을 떨 듯한 그녀가 "워크숍 땐 직원들이 알아서 소주와 맥주를 짝으로 사간다"고 해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실력보다는 외모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억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 나이에도 예쁘다고 해주시면 고맙지요. 하하!" 혹시 공주과냐고 물었다. "제가 공주였으면 질 게 뻔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 고생을 자초했을까요? 어떻게 봐도 난 무수리예요. 당(黨)의 궂은일, 대표 주자들은 주판알 튕겨가며 손익 따지는 일들이 나한테 떨어지면 겁도 없이 그냥 했다고요. 순진하게, 전략도 없이."

정계를 떠나니 한강 고수부지를 거닐 여유도 생겼다. "음악이 아름다운 건 '쉼표'가 있어서래요. 저도 좀 더 깊어지려고요. "조깅하는 사람들이 알은체하자 나경원이 수줍게 인사했다." 이래서 프로 정치인이 못되나 봐요. 넉살 좋게 사람들에게 다가가 먼저 알은체하고 그래야 하는데…(웃음)." / 이명원 기자
지난달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안팎으로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니느라 나경원은 바빴다. 이날 점심도 장애인체육회 사람들과 했다. "선거운동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뛴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스페셜올림픽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오뚝한 이목구비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지적장애인들의 스포츠 축제에 '승부수'를 던진 건 아직 정치를 포기하지 않은 나경원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설령 정치가 아니라도 '을(乙)'로 살았던 지난 1년5개월이 만 50세 나경원의 인생에 약(藥)이 된 건 분명해 보였다.

코윈 선수의 아버지

―정치인 나경원에게 스페셜올림픽은 말 그대로 매우 '특별했던' 것 같다.

"제발 스페셜올림픽을 정치인 나경원과 연결하지 말아달라. 정치인 나경원에 대한 평가 때문에 올림픽의 성과가 폄하되는 거 같아서 아쉽다. 스페셜올림픽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내가 열정을 가지고 뛰어든 일이었다. 사심이 있었다면 그렇게 못 했다."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를 점화하고 있는 나경원 /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조직위원회 제공
―'1등보다 꼴찌가 박수를 더 많이 받은 대회'였다.

"일반 올림픽에서 우리는 뛰어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의 실력에 감탄한다. 그런 경기만 보던 사람들이 지적장애인들의 어설프고 불완전한 경기를 보고 감동할 수 있을까 의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아니더라. 기량은 크게 떨어지지만 최선을 다해 경기한 뒤 금메달을 받고 기쁨에 겨워하는 장애인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내가 반성했다. 그들이 기뻐하고 행복하면 되는 거였다. 올림픽 준비하는 일 자체도 크리에이티브(창의적)했다. 정치는 말 한마디 잘해서 사회를 바꾸기도 하지만, 스페셜올림픽은 100% 발품과 땀방울로 이룬 결실이다. 그래서 각별하다."

―1년5개월간 '을'로 살아보니 어떤가. 당장 돈 때문에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많이 했을 텐데.

"정말 심하게 을로 살았다(웃음). 여당의 대변인이었는데도 뭘 좀 부탁하려니 입이 잘 안 떨어지더라.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했다. 오히려 서울시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공천에서도 배제되니 후원이 잘됐던 것 같다."

―정치권에서 할 일이 없어지니 스페셜올림픽에 진력했다는 얘기들을 한다. 정치 재개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는 시각도 있고.

"스페셜올림픽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9년부터 내 정치 일정과는 상관없이 준비해왔다. 그해 미국 아이다호에서 열린 스페셜올림픽에 갔다가 우리 선수단이 유니폼에 이름표 하나 못 새기고 스티커에 글씨를 써서 붙였다가 자꾸 떨어지는 걸 보고 속상해서 나라도 앞장서야겠다 한 거다. 명망 있는 사회 인사들께 위원장 자리 맡아달라 간곡히 요청했는데 다들 거절하셨다. 이 자리가 그렇게 좋고 힘있는 자리였다면 내 정치적 부침에 따라 위원장을 바꾸느니 마느니 했을 텐데, 전혀 없지 않았나. 어떤 분들은 나더러 '평창동계올림픽' 위원장이 된 거냐고 묻더라. 그만큼 스페셜올림픽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회를 직접 유치할 생각을 한 게 대단하다.

"우리 사회는 점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큰 사고를 한번 쳐야 인식이 달라지지. 스페셜올림픽을 눈앞에 보여주면 지적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정치에서 내가 손을 뗐기 때문에 더 열심히 몰입했고 사고도 칠 수 있었다."

―대회 기간에 맨 섬(Isle of Man)의 개리스 데렉 코윈 선수가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가장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 사건을 통해 위대한 아버지를 한 분 만났다.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코윈 선수의 아버지가 '이 소중한 올림픽이 아들의 죽음으로 방해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시더라. 내가 장애 지닌 자식을 키워본 엄마라 그 아버지의 회한을 안다. 그분이 대회 때마다 아들을 따라왔다가 평창 대회는 사업으로 바빠 오지 못했다. 곁에 있었다면 열이 나던 초기 단계에서 어떻게든 살릴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컸을 텐데 우리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더라.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아팠다."

―홍보를 위해 지독하게 뛰더라. 스페셜올림픽에 대한 국민 인지도가 71%에 달했다.

“인터뷰는 정말 물불 안 가리고 했다. 당 대변인 했던 경험이 크게 도움됐다. 전체 참가 선수들의 이력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스토리를 만들어서 언론에 뿌렸다.”

나경원이 아웅산 수지 여사와 스페셜 올림픽을 관전하는 모습. /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조직위원회 제공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특별 초청 손님으로 와서 화제가 됐다.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분이 인권 문제를 강조해왔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의 인권이 주제인 스페셜올림픽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몸에 밴 분이더라. 정치인으로도 프로였다. 카메라가 없으면 자유롭게 행동하다가도 카메라가 나타나면 곧바로 자세를 고쳤다. 도도하지만 우아하게. 공인으로서 이미지 메이킹을 할 줄 아는 여성이더라.”

―사적인 얘기도 주고받았나.

“개회사에서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 유나 이야기를 잠시 했다. 20대가 되니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데 과연 남편을 만날 수 있을까, 아기는 낳을 수 있을까 걱정한다는 얘기였다. 그걸 듣고 수지 여사가 딸을 좀 만날 수 있느냐고 묻더라. 근데 우리 딸이 안 왔다. 너무 바쁘다면서(웃음).”

전략적 진심

나이 때문일까. 웃음과 넉살이 부쩍 많아진 나경원은 정치하던 시절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게 발탁돼 2004년 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에 당선된 것이 정계에 내디딘 첫발이다. 2008년엔 서울 중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당내에서 입지를 굳혔다. 대변인을 거쳐 원내부대표, 최고위원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야당 후보에게 지면서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는다. 선거 기간에 튀어나온 ‘1억 피부과설’ ‘기소 청탁설’에 휩싸이면서 19대 국회의원 공천에서도 배제됐다. 되짚기 싫은 ‘시련’에 대해 덤덤히 말하던 나경원은 기소 청탁설 대목에서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기소 청탁설은 한 네티즌이 나 전 의원에 대한 허위 사실과 비난 글을 인터넷에 게재한 혐의로 기소된 것과 관련, 남편 김재호 판사가 검사에게 청탁했다는 의혹으로, 결국 무혐의 처리됐다. “다 제가 사려 깊지 못한 탓이었죠. 지금이라면 그렇게 아득바득 대응하지 않았을 텐데.”

―스페셜올림픽을 선거운동보다 더 열심히 했다던데,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이번처럼 했으면 승리했을까?

“서울시장 선거도 열심히는 했다. 모두의 힘을 모으는 데 부족했던 거지. 그냥 나 혼자 열심히 한 거였다, 하하!”

―시장 선거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선거 전부터 이미 20%포인트 우리가 뒤지고 있었다. 당내에서도 이걸 뒤집기란 어렵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후보로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에서 등 떠밀리듯 나간 셈이다. 유세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으면서 선거 패배의 탓을 내게만 돌리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억울해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더라.”

―정계 은퇴한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여성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한계가 세(勢)를 모으는 일이라고 했다.

“꼭 여성이라 그런 건 아니고, 당시에는 내가 서울시장에 낙선하는 것이 당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야 이듬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고. 그게 정치더라. 나는 그저 진심, 순수한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진심이 아니라 ‘전략적 진심’이 필요했던 거다.”

―보궐선거에서 패하고 19대 국회의원 공천에서도 배제됐다. 너무 억울해서 자다가도 속이 아파 깬다는 말을 했던데.

“정치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잘한 선택인지 걱정이 되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서울시장 떨어지고 공천마저 배제됐을 땐 정말 내팽개쳐진 느낌이더라. 기소 청탁설까지 정말 어이없이 당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 그때 나는 당에서 버린 카드이자, 정치권 전체가 버린 카드였다.”

―‘나꼼수’에서 제기한 1억 피부과설에 대해서도 매우 억울해했다.

“에휴, 이제 와서 그 얘기를 또 해야 하나. 그런 고급스러운 장소에 애초부터 가는 게 아니었다. 정치인 생활이 바쁘다 보니 이 병원 저 병원 다닐 일 없이 딸과 내 건강을 한곳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을 들인 것이 화근이 됐다. 사려 깊지 못했다.”

―천안함 빈소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 정치인으로 미숙해 보이는 스캔들도 있었다.

“아, 그건 우리 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모함이다. 빈소에 여야 의원이 많이 갔고, 다들 ‘조문하는’ 사진을 찍었다. 그걸 미니홈피에 올리는 것은 지역구민들에게 내가 오늘 이런 일을 했다는 일종의 활동 사진이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정동영 의원, 당시 야당 대표까지 다 올렸다. 진짜 문제가 된 공성진 의원의 조화 앞 기념사진과는 다른 성격이었는데도 나까지 엮어 비난을 퍼붓더라.”

―스페셜올림픽 위원장이 박근혜 대선 후보의 유세를 지원한다고 해서 또 공격받았다.

“평창동계올림픽 김진선 위원장은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겸하고 있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조건 나경원이 하면 문제 삼는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웃음)”

―나경원이 표적이 된 건 대중적 인지도는 높은데 지지도는 낮아서였다고들 하더라.

“그야말로 세(勢)가 없는 거지. 참 어려운 일이다.”

―나꼼수라면 치가 떨리겠다.

“세상 일이 남 탓을 해서는 발전이 없더라. 그때 좀 더 다시 생각해볼 걸, 곧이곧대로 맞설 게 아니라 좀 더 유연하고 세련되게 대응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생각한다.”

젊은 여성들의 선망 대상이었던 나경원은 '수퍼우먼 콤플렉스'를 버리라고 조언했다. "무한대의 책임감? 뜻을 이루기도 전에 쓰러지죠. 나만의 시간을 만드세요." / 이명원 기자
텔레토비와 유나

서울시장 선거 당시 항간에는 여당 지지자였던 여성들조차 나경원이 후보라 찍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엄친딸’ 이미지 탓이었다. 사학 재단을 설립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서울대 법대, 법학대학원, 사법고시, 판사, 국회의원의 길을 크게 애쓰지 않고 걸어왔으니 별세계에 사는 여자 같았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이 뭘 알까’ 하는 대중심리가 유독 나경원에게 작동했다.

―‘나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해봤을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엄친딸’이라고 한다는데, 겉만 보고 나의 아픔을 알 수 있을까? 가난하지 않았다고, 자수성가하지 않았다고 인생의 아픔이 깊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다운증후군 장애아로 태어난 아기를 처음 품에 안고 무슨 생각하셨나.

“내가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내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장애에 대한 기본 지식도, 상식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최악만 가정해 얘기해주시더라. 심장에 이상이 있을 수 있고, 우유도 받아내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서. 남편과 2주 가까이 아무 말도 안 했던 것 같다. 둘 다 막막했으니까.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서로에게 필요했다.”

―요즘은 어떤가.

“장애아라고 특별하지 않다. 보통 아기들처럼 방긋방긋 웃고 재롱을 부려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물론 발달이 늦어서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벌써 대학생인데, 지금도 유나가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보면서 크게 웃는다.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정말 예쁜 아이인데, 정치하느라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지난 설 연휴에는 모처럼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제 사춘기인지 많이 울고 웃어서 걱정도 된다. 누구나 자식을 품고 살지만 유나를 품고 살면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대한민국이 왜 약자들이 떼쓸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는지, 떼법이 왜 성행하는지 고민하게 된 것도 유나 덕분이다. 그래서 정치에 입문했던 거고. 공천 문제로 심란할 때도 유나가 한 소리 하더라. 스페셜올림픽이나 열심히 준비하라고(웃음).”

―유나가 인기 어린이 프로였던 ‘텔레토비’에 출연했었다.

“아이가 그 프로를 정말 좋아했다. 자기도 나갈 수 없느냐고 해서 용기를 내 신청했다. 나는 장애아들이 비장애 아이들과 어울려서 자랄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유나를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다 교장에게 싸늘히 거절당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이다. 원희룡, 김난도, 조국, 나경원이 동기라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남편 김재호 판사도 동기였고.

“남편과 나, 김난도는 ‘303번파’였다. 303번 버스를 타고 등교했고 스터디도 함께했다. 김난도 교수는 스페셜올림픽에도 힘이 돼주었다.”

―학창 시절 조국 교수의 별명이 ‘입 큰 개구리’였다고 폭로한 게 나경원 의원이다.

“자기 말만 열심히 한 뒤 다른 사람들 말하려고 하면 바쁘다며 가버려서, 하하! 시장 선거 때 박원순 후보 지지한 조국이 자기 책에 나를 실명으로 비판해서 섭섭했는데, 그 말이 귀에 들어갔는지 ‘본뜻이 아니었다’며 문자를 보냈더라. ‘이해해. 괜찮아’ 하고 답했더니 ‘역시 대인이야’ 그러더라(웃음).”

―군부 정권 시절이었는데 고시 준비만 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나도 1학년 때부터 선배들에게 불려가 의식화 교육받았다. 진작에 방출된 것이 엠티(MT)에서 내가 선배들과 맞섰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토론이 아니라 한 가지 답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웃기는 게 그때는 선배들이 여학생들 치마도 못 입게 했다. 어떻게 법대 여학생이 치마를 입고 다니느냐는 거지. 정말 비민주적이었다. 여전히 야당의 문제가 그런 것 아닌가?”

인생의 ‘쉼표’

―부산지방법원을 시작으로 판사 생활도 7년여 했다. 기억에 남는 판결이 있는지.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고 떠올린 재판이 있다. 지적장애를 앓는 아이가 지독한 도벽으로 내게 재판을 받았다. 훔치는 게 나쁜 일이란 걸 교육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데도 내가 기계적인 처분을 내렸던 게 지금도 후회된다.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좀 더 창의적인 판결을 내려야 했다. 영화 보면 주인공인 지적장애인(류승룡 분)에게 법정이 사형선고를 내린다. 장애에 대한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는 기계적인 재판이었다. 그 옛날 나처럼.”

―판사 관두고 말 많고 탈 많은 정치권에 나온 걸 후회하지 않나.

“판사를 했으면 스페셜올림픽은 못 했을 것 아닌가(웃음)? 정치도 그렇다. 대통령을 한들 퇴임할 때 ‘내 손에 뭐가 남았지?’ 하는 경우 대부분 아닐까.”

―장애인에게 진짜 필요한 법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국회에 진출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법안도 많이 만들었고, 다른 일로 출장을 가더라도 그 나라 장애인 관련 시설은 꼭 가서 봤다. 학령기 이후 아이들 교육 문제랄지, 장애인 주거 문제를 중도에 하다 말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초선 시절의 나경원은 참 신선했다.

“그때는 ‘정치를 한다’가 아니라 입법을 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사명감이 엄청 컸다. 누가 ‘정치를 어떻게 할 겁니까?’ 물으면 ‘저는 정치가 아니라 국회의원 할 건데요’ 하고 대답했으니(웃음). 의원이 소속 정당의 부속품이 되는 현실에서 의원 개개인의 입법 활동과 정치 활동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

―2005년인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북한인권법을 주도한 것이 나경원 의원이었다고 하더라.

“겉보기와 달리 내가 꽤 우직하고 용감한 편이다(웃음). 미디어법이나 소고기법도 그렇고, 누군가 당을 대표해 국민을 설득하러 토론회에 나가야 하는데 다들 이미지 나빠진다고 도망가는 걸 내가 했다. 약지 못했던 거지.”

―인생의 멘토가 있다면?

김수환 추기경과 우리 아이들. 추기경이 ‘사랑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하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신 말씀이 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가슴으로 하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요즘 더욱 실감한다. 두 아이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삶의 지표다.”

―어느새 만 50세다.

예전엔 여백을 빽빽이 칠하는 데 매달렸는데, 요즘은 여백과 쉼표가 있어야 인생이 완성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도 버리는 중이다.”

―다시 정치할 건가.

“정치를 하든 뭘 하든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스페셜올림픽처럼. 우리 올림픽 슬로건이 ‘투게더 위 캔(Together we can)’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만, 이거야말로 요즘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대선이 끝나고 지역 간, 세대 간, 노사 간 갈등 지수가 높아졌다고 하더라. ‘이기고 지고’의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치할 때도 100%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법으로만 해결할 수도 없다. 개개인의 의식이 변해야 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작은 실천이 모여야 한다. 요즘 이런 생각 하며 산다. 너무 한가한가(웃음)?”

 

-조선일보, 20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