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바라보면 됩니다.

하마사 2013. 1. 26. 10:58

본문: 미 7:1~10

제목: 바라보면 됩니다.

찬송: 354장

목표: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살게 한다.

 

1~6절은 유다 특히 선민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타락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절망하는 이유를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계절상 봄에 곡식을 추수하고 여름 끝에 과일을 추수합니다. 따라서 여름 과일을 따고 나면 땅은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 되고 맙니다. 미가 선지자는 자신의 처지가 이처럼 여름 과일을 딴 후의 과수원의 황량함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당시 선민사회가 여름 과일을 다 딴 후의 과수원처럼 절망적이고 황량한 상황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이처럼 절망적이 된 이유를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의인이 없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미가 시대에 예루살렘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그 가운데서 예루살렘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경제적 지표나 군사적 지표가 위험을 경고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의인을 찾을 수 없는 영적 윤리적 지표가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얼마나 타락한 상태에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훗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향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했습니다.(3절)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 두 손을 가지고 능숙하게 열심히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도자와 재판관들이 스스로 뇌물을 구하고 권세자들이 자기 마음의 악한 욕심을 따라 말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곳이 미가 시대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선한 자와 정직한 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가장 선한 자가 가시와 같았고 가장 정직한 자가 찔레 울타리보다 더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선한 자와 정직한 자를 찾는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하고 정직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을 바라보면 도리어 그들로부터 찔림을 당할 뿐이었습니다. 가장 선한 자와 가장 정직한 자가 가시와 찔레 울타리보다 더 하였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였겠습니까?

또한 예루살렘이 이웃과 친구, 심지어는 품의 아내와 다른 가족들까지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신이 팽배하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마치 가족들끼리 원수가 될 정도였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불신이 만연된 사회에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적인 감정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민 공동체인 예루살렘과 선민의 가정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미가는 죄악이 가득하고 선하고 정직한 의인들을 찾아볼 수 없는 예루살렘의 실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날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시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성에 가득한 죄악을 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할 때 그들을 심판하셨고, 예루살렘에 죄악이 가득할 때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처럼 죄가 가득하면 필연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의인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 재앙이고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없는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그들은 물질적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 성에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회의 보존과 유지에 의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성도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의인으로서 속한 공동체와 사회, 국가 안에서 약할을 잘 감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구원과 직결된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의 보존과 유지에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미가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망을 딛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소망을 가집니다. 7절부터 13절까지는 선지자의 기도와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심판 이후 선민이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는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1. 들으십니다.(7절)

7절,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예루살렘이 맞은 위기는 세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가 당시 있었던 일로 앗수르의 유다침공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여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해방된 사건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도들과 관련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심판은 성도들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죄를 범하였을 때 징계를 당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도를 파멸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궁극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확실한 구원에 이를 것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위기상황에서 미가는 여호와를 우러러보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러러본다’는 의미는 ‘바라보다, 주시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라본다’는 의미는 ‘기대하다, 바라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의미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의 뉘앙스는 다릅니다. 우러러본다’(차파)는 의미는 파수꾼이 망루에 서서 성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주목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바라본다’(야할)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믿음과 확신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즉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영적 기다림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미가선지자는 한 번은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주목하는 표현을 언급하고 다음 한 번은 단지 시선의 집중이 아니라 마음의 관심까지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고 바라고 소망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참된 회복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힘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민들이 하나님을 떠나 서로에게 악행을 하고 있지만 자신만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께만 소망을 둘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화)두 맹인이 기도응답 받은 이야기

마태복음 20장에 두 맹인이 구걸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고 계실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두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떠한 병도 고침 받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한 자기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닫고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큰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속에 휩싸여 소리를 못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앞에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성경에는 ‘잠잠하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아마도 지금으로 말하면 ‘입닥쳐’ 혹은 ‘아가리 닥쳐’와 같은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맹인은 그러한 멸시, 천대,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 표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간절하게 불러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두 맹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생동안 자기가 품고 있던 소원을 즉각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질문이었고 말하고 싶었던 대답이었습니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더니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3:5)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왕상 3:9) 이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한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를 누린 왕이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맹인이 주님을 목청껏 불러서 발길을 멈추게 하고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질문까지 받았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솔로몬과 두 맹인은 주님께 구하는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주님께 이것을 꼭 구하겠다는 확실한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눈을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를 수 있었고 또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답은 둘러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한 소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응답받는 기도의 7단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1단계: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을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2단계: 하나님의 약속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3단계: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4단계: 구한 것은 받은 줄 믿어야 합니다.

5단계: 의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6단계: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묵상해야 합니다.

7단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화)프로골퍼 최경주의 2012년 10월 국민일보 인터뷰 내용

―야구 선수들이 홈런을 친 뒤 '공이 축구공만 하게 보였다'고 하는 순간이 골프에도 있습니까?

"1999년 일본에서 열린 기린 오픈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기였어요. PGA에 갈 자격을 따야 하는 시합이었죠. 그 마지막 퍼팅이 한 3m 짜리였는데, 기도를 하고 눈을 뜨니까 그린 위에 길이 보이는 거예요. 칠판에 분필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공에서부터 홀컵까지 선이 있더라고요.

미국에서 PGA Q스쿨에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그랬어요. 마지막으로 4m짜리 퍼팅을 남겨두고 있는데, 그걸 못 넣으면 짐을 싸서 한국에 가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퍼터가 부들부들 떨렸죠. 그때 기도하기를 '저를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게 하실 겁니까.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했죠. 그리고 딱 눈을 떴더니 이번엔 호미로 골을 파놓은 것처럼 길이 보이는 거예요. 그 '골'에다가 공을 굴리기만 하면 됐죠."

그의 아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김현정 없는 최경주는 없지요. 제겐 로또 같은 아내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어떤 것도 이길 것 같은 엄청난 힘이 솟았다고 말했다. “그래요. 확실히 나에게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일어납니다.(8~9절)

8~9절,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미가선지자는 대적을 향해 선민이 멸망할지라도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적’이란 예루살렘을 포위한 앗수르 내지는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등을 가리킵니다. 유다를 침공하여 46개 성읍을 함락하고 예루살렘마저 포위한 앗수르 군대, 또는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자기들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현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미가는 자신을 선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여 이스라엘이 현재 처한 상황과 장차 있을 회복의 역사를 넘어진 자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이라고 확신있게 예언합니다. 비록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나고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정한 때가 되면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지라도 하나님은 깨끗하게 치유하여 다시 일어서게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147:2-3)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성도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일곱 번이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영영 엎드러지지 않고 칠전팔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넘어질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자가 아니라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며 최후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굳게 설 자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을지라도 신실하고 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화)구리뱀 사건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이 경험했던 구리뱀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에돔땅을 통과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아 먼 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빨리 도착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더 나아가 먹고 마시는 문제를 가지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듣고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물어 죽게 하자 백성들은 회개하며 불뱀들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아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9)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뱀에게 물렸지만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살 길이 열립니다. 죽음의 구렁텅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생명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캄캄한 곳에 앉을지라도 하나님이 빛이 되어주심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도 구덩이에 빠졌지만 건짐을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에 빠졌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도 뚜껑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건짐 받았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보면 엎드러지는 자리에서도 일어나는 은혜가 있음을 믿고 용기를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승리합니다.(10절)

10절,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유다를 침공한 대적들은 유다의 패배로 인하여 기뻐하며 조롱하였습니다. 미가는 하나님과 선민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심판으로 인해 거리의 진흙과 같이 짓밟히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있느냐”고 하였던 앗수르군대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몰살당한 일, 유다를 멸망시키고 조롱하였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도구로 사용된 메대바사에 의해 멸망당한 일 등으로 일차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을 당하거나 패할 때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대적들은 하나님과 선민들을 멸시하고 조롱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넉넉히 이기리라고 고백한 것처럼 반드시 최후 승리의 자리에 굳건히 서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예화)부림절 유래

에스더서에는 부림절의 유례가 나옵니다. 부림절이란 바사(페르시아)의 총리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음모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지혜와 결단력으로 유대인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만의 흉계에 의해 반포된 아하수에로왕의 조서에 따라 유대인의 멸절이 작정된 날에 상황이 바뀌어 하만이 처형되고 모르드개가 하만이 가졌던 권한을 다 갖게 됨으로서 오히려 유대인을 죽이려던 대적들이 멸망당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더불어 궁극적 심판이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날에 악인과 의인이 당할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예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화)6일전쟁의 영웅 다얀장군의 신무기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을 이끌던 모세 다얀 장군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을 했습니다. 다얀은 100배의 인구를 가진 아랍연합과 맞서는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새로운 무기가 있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세계 사람들은 그것이 틀림없이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능가하는 신무기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다얀 장군은 “우리를 승리하게 할 신병기는 바로 시편 121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그 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힘겹게 영적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승리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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