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0:29~34
제목: 변두리 인생의 변화
찬송: 369장
목표: 변두리 인생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만나게 한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씨들이 길가에 혹은 돌짝밭에 그리고 가시떨기와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변두리 인생이 있습니다. 자신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밟히기만 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변두리인생 말입니다. 거리의 부랑자들과 버려진 아이들,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쪽방 사람들, 주민등록증도 말소되어 자신의 신분마저 잃어버린 소외된 이웃들이 변두리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변두리인생에 속합니다. 공중의 새로 비유되는 마귀가 먹어버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뿌리가 없어 영적으로 곤고하고 지친 심령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두 명의 변두리인생이 등장합니다. 두 맹인입니다. 막 10장에는 맹인이자 거지였던 바디매오라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맹인은 변두리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영광의 무리 속에 한 일원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두리인생이 변하여 주님과 더불어 영광의 무대를 거니는 중심배역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합니까? 두 맹인의 변화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기회포착입니다.(30절)
30절,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고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두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문으로 들었던 그 예수님이 지금 자기가 구걸하고 있는 현장을 지나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의 길가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주어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떠한 병도 고침 받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지금 이 순간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음을 깨닫고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큰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속에 휩싸여 소리를 못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이 자신들이 눈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여리고로 오실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일생에서 최초이자 마지막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가 있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오늘 이 새벽이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말라 타들어 가는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절호의 기회일지 모릅니다. 두 맹인처럼 해결할 수 없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이 새벽에 성전을 찾은 분이 계십니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임을 믿고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의 간절함입니다.(31절)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한 번 불러보고 안되면 그만이지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한 번 불러서 안되면 두 번 부르고 두 번 불러서 안되면 아마도 열 번이라도 부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그의 간절함이 그의 외침 속에 잘 배어나 있습니다.
그러자 앞에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성경에는 ‘잠잠하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아마도 지금으로 말하면 ‘입닥쳐’ 혹은 ‘아가리 닥쳐’와 같은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맹인은 그러한 멸시, 천대,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 표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외침을 들으신 주님이 드디어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묵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러나 너무나 간절하고 다급할 때는 두 맹인처럼 외치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할 때 작은 소리로 하겠습니까? 다급하게 외칠 때는 주변사람들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두 맹인이 그런 심정으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토록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새벽에 주님을 만나려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자존심과 교만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간절하게 불러야 합니다.
3. 준비된 응답입니다.(32~33절)
32~33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간절하게 불러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 가까이 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두 맹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생동안 자기가 품고 있던 소원을 즉각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질문이었고 말하고 싶었던 대답이었습니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더니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3:5)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왕상 3:9) 이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한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를 누린 왕이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할 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맹인이 주님을 목청껏 불러서 발길을 멈추게 하고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질문까지 받았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솔로몬과 두 맹인은 주님께 구하는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주님께 이것을 꼭 구하겠다는 확실한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눈을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를 수 있었고 또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답은 둘러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도 보면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러 온 로마의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자 주님은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하시며 그 시로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만 능력의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오늘 새벽 우리들도 두 맹인처럼 간절하고 확실한 소원을 가지고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두 맹인은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구걸하던 인생이 변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 2000년 전의 여리고 근처 길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새벽에 두 맹인처럼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두 맹인처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간절하게 주님을 불러 봅시다. 다른 사람의 소리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외칩시다. 주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부르짖읍시다. 그러면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분명한 질문과 함께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아픈 상처를 싸매어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더불어 호산나 하면서 새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영광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