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온국민 감격에 떨게한 탁구 여왕 양영자, 89년 돌연 사라진 뒤

하마사 2013. 1. 8. 09:59

돌아온 녹색 테이블 여왕… "만리장성 깰 공격형 스타 나와야 탁구가 삽니다"

80년대 한국 탁구의 여왕, 양영자가 돌아왔다. 88서울올림픽 여자 복식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국가대표 후보 선수단 감독이 됐다. 그는“결혼, 해외 선교 활동으로 라켓을 놓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녹색 테이블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한순간도 탁구 잊은 적 없다
1989년 은퇴, 1992년 결혼… 1997년부터 15년간 해외 선교
"출국할때 탁구대·라켓 갖고 가 현지 아이들·클럽팀 지도했죠"

中제자, 한국으로 귀화…
네이멍구서 만난 中2 이은혜, 승부욕 남다르고 가장 성실…
어느날 그의 아버지가 찾아와 한국에 데려가 키워달라 부탁
지금은 국내 실업팀서 뛰어요

후배 현정화는…
다들 라이벌이라고 부추겼지만 우린 환상의 복식 파트너였죠
고 3·중1로 처음 만났을 때 5점 잡아주고했는데 제가 졌죠

'지도자 양영자' 스타일은…
요즘 탁구는 백핸드·포핸드 둘 다 고루 잘하길 원하지만
저는 상대가 공포감 느낄정도의 폭발적 포핸드를 강조합니다


칼바람 한파가 전국을 강타한 새해 첫날, 대구체육관은 제66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초·중·고교와 대학, 일반팀 최정상급 선수 300여명이 한국 탁구의 왕중왕을 가리는 무대.

남녀 단식과 복식, 혼합 복식 경기가 동시에 열렸다. 선수들의 스매시 동작과 풋워크를 바라보는 양영자(49)의 눈길이 매서웠다. 초등학생 선수가 고교생 언니를 상대로 야무진 공격을 날리자 "예스!"라는 짧은 탄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양영자는 80년대 한국 탁구의 여왕이었다. 1988년 9월 30일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결승전에서 현정화와 짝을 이뤄 중국의 자오즈민·첸징 조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만리장성이 무너지던 그 순간, 온 국민이 벅찬 감격에 몸을 떨었다.

양영자는 이듬해 돌연 은퇴했다. 잠시 트레이너로 활동했지만 곧 결혼하며 탁구계와 멀어졌다. 남편과 해외 선교 활동에 나서 15년을 보냈다. 강력한 드라이브를 상대에게 퍼붓던 파워 플레이어 양영자는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작년 초 귀국한 양영자는 7월 국가대표 후보 선수단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는 "라켓을 놓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녹색 테이블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 팽팽한 승부의 긴장감이 그리웠다는 양영자.

선수 때와 다름없는 짧은 커트 머리, 하얀 탁구공의 궤적을 추적하는 날 선 눈매에서 승부사의 본능이 느껴졌다.

"공격형 스타가 나와야 탁구가 뜬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보입니까.

"한국 여자 탁구가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남자 선수 중에는 키워볼 재목감이 있는 것 같은데, 여자 선수들은 좀 부족해요."

―2012 런던올림픽에서 노메달에 그쳤지요.

"한국 여자 탁구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딴 건 88올림픽 이후 처음이었어요. 올 것이 온 것이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위기를 계속 느껴온 게 사실이에요. 2008년 베이징 대회 때도 메달을 땄지만 자신 있게 이긴 시합은 아니었거든요.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 여자 탁구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열심히 준비해서 2020년 이후를 준비해야 할 거예요."

―탁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탁구장도 많이 사라졌고.

"꼭 그런 건 아닌데…. 생활체육 탁구 교실이 꽤 늘어났으니까. 어른들이 많이 하다 보면 자녀에게 권할 수도 있겠죠. 문제는 스타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세대는 사라예보 신화를 창조한 이에리사와 정현숙 선배를 보고 자랐어요. 근데 요즘은 그런 영웅이 없어요. 골프에는 '박세리 키즈'가 있지요. 대형 스타 선수가 나와야 후배들에게 자극이 되고 롤 모델도 됩니다."

―'탁구 얼짱' 서효원 선수의 인기가 높은데요.

"기량은 괜찮지만 수비형 스타일이라는 게 좀 그래요. 수비 선수라도 공격력을 갖춰야 1위를 할 수 있어요. 중국의 통링 선수가 그랬듯이. 우리 선수들은 왜 공격 안 하고 수비만 하다 지냐고 말이 많잖아요. 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시원하게 후려치는 화끈한 공격형 선수가 있어야 팬도 신나고, 탁구에 인생을 걸겠다는 꿈나무도 나오지 않겠어요?"

―청소년 국가대표 후보 선수단 감독은 어떤 자리인가요.

"대한체육회가 지원하는 후보 선수단 전임 지도자예요. 임기는 4년. 청소년 유망주를 키워 대표 선수급으로 키우는 역할이죠. 전 고등부 담당입니다. 남녀 15명씩 30명인데 재능이 보이면 초·중학생이라도 데려올 수 있어요. 동계·하계훈련 뛰고 한·일 교류전과 국제대회에도 나가죠. 훈련이 끝난 뒤에는 전국 각지의 학교에 찾아가 선수들이 잘 성장하고 있는지 꾸준히 체크합니다. 그러면서 숨겨진 진주를 캐내기도 하죠."

―협회에서 감독직을 요청했나요.

"아뇨. 제가 신청했어요. 정말 해 보고 싶었거든요. 전임 고수배 감독이 인삼공사 팀으로 가시면서 자리가 났어요. 일단 남은 임기가 2월 말까지예요. 저는 계속 하고 싶은데 체육회가 허락해야겠죠. 개인적으로는 더 어린 유소년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싶어요. 기초부터 차근차근."

―좀 더 영향력 있는 자리도 있었을 텐데요.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 은퇴한 뒤 늘 청소년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지금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연말까지 전남 진도에서 열린 전국남녀중고대회를 지켜봤고 끝나자마자 대구로 올라온 거예요. 이 대회가 끝나면 새롭게 선수 선발해서 13일부터 훈련 들어갑니다."

해외 선교 15년… 탁구를 잊은 적 없다

전라도 처녀 양영자는 경상도 총각 이영철(52)과 1992년 결혼했다. 은퇴한 지 3년 만이었다. 같은 교회 청년부에 다니며 얼굴만 알던 두 사람은 출장과 휴가차 찾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연합통신 국제부 기자였지만 선교사를 꿈꿨던 이영철, 어머니를 간암으로 잃고 우울증을 앓던 양영자. 둘은 신앙으로 하나가 됐다. 남편은 어려운 결심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고, 아내는 흔쾌히 그 뜻을 따랐다. 신학 공부와 선교사 준비…. 부부는 호주 어학연수 중 알게 된 WEC국제선교회를 통해 1997년 몽골로 떠났다.

―왜 몽골이었습니까.

"남편은 처음에 쿠바나 라오스를 생각했대요. 몽골에 다녀오더니 생각을 바꿨어요. 마음이 뜨거워지는 곳을 찾았다며. 울란바토르에서 2년 정도 선교 활동을 하며 현지 언어와 문화를 공부했어요. 그러다 '셍샨드'라는 유목민 도시로 떠났죠. 울란바토르에서 동북쪽으로 450㎞ 떨어진 동고비 사막 한가운데. 기차로 가면 10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인구가 1만2000명쯤 됐는데 한국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고생이 많았겠어요.

"창문을 두세 겹으로 해도 집 안에 모래가 수북이 쌓여요. 바람이 불면 입 안에서 모래가 서걱서걱하고. 여름이면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엔 영하 45도까지 뚝 떨어져요. 물이 귀해 여름철에도 물차에서 양동이에 받아 써야 했죠. 일주일 넘도록 머리를 못 감은 날도 많았는데, '왜 이렇게 사나' 생각은 안 들었어요. 목표가 뚜렷했으니까."

―음식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던데.

"제가 야채와 생선을 좋아해요. 소고기,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닭고기도 안 먹어요. 선수 시절 고기를 먹으면 오히려 힘이 빠지는 체질이었으니까. 근데 몽골은 육식 나라잖아요. 설 명절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양고기에서 허연 기름 덩어리를 쓰윽 베어서 건네요. 그게 손님에 대한 배려거든요. 음식 문제 때문인지 안면 마비가 와서 애를 먹었죠."

―탁구와 자연히 멀어졌겠군요.

"제가 어떻게 탁구를 잊을 수 있겠어요. 출국할 때 탁구대와 라켓, 탁구공을 몇 개씩 가지고 나갔어요. 셍샨드 아이들에게 똑딱똑딱 가르쳤죠. 그게 참 보람 있더라고요. 거기 사람들은 탁구를 '오떰 범버크'라 불러요. 탁구공이 작아서 그런가, '별 같은 공'이란 뜻이래요. 나중에는 클럽팀을 돌아다니면서 기술 지도를 하고 그랬죠."

"쉼 없이 달리는 토끼는 잡을 수 없다"

2004년 양영자는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떠났다. 해발 1000m의 고원도시. 그곳에서 중국 탁구를 다시 만났다. 선수 시절 양영자는 '중국 킬러'로 통했다. 실업 1년차 막내로 참가한 1983년 일본 도쿄 세계탁구선수권에서 그는 16강전부터 겡리유안, 통링, 황준취인 등을 연파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차오옌화에 세트스코어 1―3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세계선수권 개인 단식에서 사상 첫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사를 새로 썼다.

―중국에서도 탁구를 지도했습니까.

"네이멍구 대표팀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쳤어요. 기술 고문쯤 됐는데, 중국 국내 대회를 여러 차례 지켜봤어요.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전국 체전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초대형 경기장에 출전하는 선수와 임원, 관중이 바글바글했죠. 프로 리그도 대단해요. 수퍼 1부 아래 층층이 리그가 있는데, 하위 리그에서 1등을 해야 상위 리그에 올라가는 구조예요. 상금도 엄청나게 많고. 중국 탁구의 힘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깨달았죠. 이런 중국 선수들을 제가 어떻게 이겼나 싶었어요."

―중국 탁구를 처음 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유고 노비사드 세계선수권에 후보 선수로 따라갔어요. 그때 벤치에서 중국 선수들을 처음 봤죠. 그땐 중공이라 그랬어요. 공포의 스카이 서브, 그걸 처음 본 거예요. 한국에 돌아와서 혼자 연습했죠. 중국 것을 모방해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나중에 제가 한국에서 처음 스카이 서브를 한 선수라고 하더라고요."

1986년 9월 25일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여자 단체전에 출전한 양영자(오른쪽)와 현정화. 양영자의 파워 드라이브, 현정화의 송곳 같은 속공을 앞세운 한국은 2시간 55분에 걸친 격전 끝에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선일보 DB
―특히 기억에 남는 선수는.

"1983년 도쿄 세계선수권에서 붙은 차오옌화. 제 탁구의 모델이자 영웅이었어요. 선배들도 두려워했는데, 드라이브 속공 스타일로 저와 비슷했어요. 참 매력적인 탁구를 했어요. 재능도 타고났고. 운이 좋으면 이길 수도 있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졌습니다. 그래도 벽이란 느낌은 없었어요. 언젠간 넘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노력이 천재를 이길 수 있습니까.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근데 요즘은 재능있는 선수들이 노력도 엄청나게 해요. 토끼가 잠을 자지 않고 쉼 없이 달리는 셈이죠. 그런 토끼는 누구도 이길 수가 없어요."

―한국으로 귀화시킨 중국 선수가 있다던데.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에서 만난 이은혜 선수예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죠. 중국 이름은 자오칭.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대한항공에서 뛰어요. 오늘 단식과 혼합 복식에 나갑니다. 실업팀 유니폼 입고 처음 뛰는 경기라 긴장하던데…."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당시 30여명 정도 가르쳤는데, 은혜는 제일 성실하고 승부욕이 남달랐어요. 목표도 확실했고. 특히 백핸드가 좋아요. 빠르고 파워도 있고. 어느 날 은혜 아버지가 저를 찾아와 그래요. 여기보다 기회가 더 많은 한국으로 데리고 가서 잘 키워 달라고. 제 수양딸로 삼아서라도 데려오려고 했죠. 근데 잘 아는 다른 목사님이 입양을 해 줬어요. 은혜 친구인 이시은 선수는 지금 귀화 수속을 밟고 있습니다."

"정화에게 라이벌 의식을 더 느꼈어야…"

현역 시절 양영자는 '독종'으로 통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은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 4강전에서 기적 같은 역전극을 가능케 했다. 세트 스코어 2―2, 11―18로 7점을 뒤지던 상황. 모두가 "경기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양영자는 한 점 한 점 따라붙어 결국 21―18로 경기를 뒤집었다. 가슴 떨리는 한국 탁구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였다. 그는 지금도 후배 선수들에게 정신력을 강조한다고 했다.

―기술이 중요한 시대 아닌가요.

"반드시 이기겠다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스코어가 좀 벌어졌다고 '나는 졌구나' 하면서 대충 치는 요즘 선수들. 저는 선수 자격이 없다고 봐요. 체력·기술·정신력 세 가지 중에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이 정신력이에요."

―원래 승부욕이 강했습니까.

"이리 남성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탁구 라켓을 잡았어요. 이종학 코치님은 시합 때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걸었어요. 타이틀이 걸리면 더 재미있고 신나고 집중력도 생겼죠. 전 내기에 강했거든요. 딴 돈으로 친구들과 뭘 사 먹기도 했죠. 이일여중 2학년 때 전국 대회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고, 여고 2학년 때 서울국제오픈대회에서 단·복식과 단체전 3관왕을 했습니다. 드라이브를 강하게 거는 스타일이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진통제를 달고 살았죠. 기권하면 했지 일단 출전해서는 대충 뛴 적이 없어요. 사실 기권한 적도 없었지만."

―지도자로서 양영자 스타일은 어떤 것인가요.

"요즘 탁구는 백핸드, 포핸드를 50대50으로 골고루 잘하기를 원하지만 저는 좀 달라요. 강력한 포핸드를 강조합니다. 상대가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폭발적인 포핸드. 선수들이 그런 폭발성을 갖도록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요."

―현정화 선수는 파트너입니까 라이벌입니까.

"라이벌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우린 환상의 복식 파트너였죠. 라이벌은 선배나 동료였지 후배나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대표 선수이던 고 3, 정화가 중학교 1학년 때 부산 계성여상 체육관에서 둘이 처음 만났어요. 5점 잡아주고 시합했는데 제가 졌어요. 나중에 탁구 최강전에 나갈 때마다 주변에서 라이벌이라고 부추기고 그랬지만 그때도 별로…. 지금 생각하면 제가 좀 더 라이벌 의식을 느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은퇴 후 지도자로 화려한 경력을 쌓고 탁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현정화 감독이 부럽지는 않습니까.

"축하할 일이죠. 본인이 이룬 것을 찾아나간 거예요. 그게 당연한 것이고. 정화의 근성은 저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죠. 제가 선수 시절 아파서 훈련을 많이 못 해 아쉬운 점은 많지만…. 서로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다른 것 아닐까요. 자기의 목표와 비전에 맞게 사는 것!"

힘든 순간은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감정 컨트롤이 잘 안 됐을 때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勇士)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城)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는 말씀을 떠올렸고, 마음이 약해질 때는 '약한 자를 택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구절을 마음에 새겼죠."

―좋은 엄마, 좋은 아내였습니까.

"큰딸 반재(20)와 작은딸 윤재(19)는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의 바이올라 대학에서 다문화 공부를 하고 있어요. 몽골에 데려간 게 여섯 살, 다섯 살 때인데 얘들이 지금도 거기서 모래 장난하던 걸 기억해요. 즐거운 추억이었다면서. 중 1때부터는 대전 국제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하며 스스로 컸죠. 든든하게 곁을 지켜 준 남편도 고마워요. 지난 10년 동안 몽골인들을 위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주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대회 첫날 경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단식 경기를 마친 은혜가 관중석의 양영자를 찾아왔다. 아쉬움에 고개를 떨군 제자의 손을 꼭 잡고 양영자가 말했다.

"괜찮아. 잘했어. 너도 연습해서 더 많이 발전하면 돼. 힘내자. 할 수 있지?" 은혜가 환하게 웃었다.

 

-조선일보, 2013/1/5 

 

'자기계발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레리나 강수진  (0) 2013.01.22
'대통령 경호원들의 師父'장수옥 특공무술협회 총재  (0) 2013.01.12
신바람 전도사 고 황수관박사  (0) 2012.12.31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0) 2012.12.20
빅토르 위고  (0) 201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