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1848년 2월혁명이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을 지지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를 프랑스에 대한 배신자로 규정하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대로를 뛰어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그에게 누군가가 팸플릿을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하자 "아니오, 무기를 들어야 하오!" 하고 답했다. 당시 파리에서만 400명이 학살당했지만,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져 벨기에로 피신했다.
망명 중에도 계속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다가 벨기에에서도 추방되어 도버해협이 보이는 영국령 건지(Guernsey)섬에 머물게 되었다. 후일 루이 나폴레옹이 사면령을 내렸으나 그는 망명 생활을 고집했다. 그곳에서는 다소 불편하기는 했지만 멋진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하다.
부인과 자녀, 게다가 연인인 쥘리에트 드루에까지 한집에 살았고, 기회만 되면 하녀들을 쫓아다니며 정사를 벌였다. 그는 사랑과 필력 모두 왕성하기 그지없었다. 머리에 유리 지붕을 이고 발 아래 바다를 굽어보는 곳에서 작은 탁자에 팔을 괴고 서서 집필을 하던 이 시기에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정(帝政)이 무너지자 그는 파리로 돌아와 시민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곧 '자유의 화신'이자 '공화국의 대부'로 칭송받았다. 그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될 정도였다. 1885년 81세의 나이로 임종했을 때에는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다.
스무 명의 젊은 작가가 팡테옹으로 그의 관을 옮겼고, 200만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거인의 죽음은 프랑스의 좌파와 우파, 민중과 엘리트를 모두 모이게 만들었다. 그가 미리 쓴 유언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게는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문인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권력의 나팔수가 되거나 서로 치졸한 말싸움을 벌이는 꼴은 보기 안타깝다. 위고처럼 온 국민의 추앙을 받는 문인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조선일보, 20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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