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사악한 참배

하마사 2012. 10. 20. 20:25

일본 전범(戰犯)들의 혼령을 한데 모아놓은 야스쿠니 신사를 현직 일본 총리가 처음 공식 참배한 것은 1985년 나카소네 총리 때였다.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일자 나카소네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는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고 소련에는 무명용사 묘지가 있다. 국가를 위해 쓰러진 사람에게 국민이 감사를 바치는 장소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해 서독을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비트부르크에 있는 독일 전몰용사 묘지를 찾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독일 미국 양쪽에서 "그 묘지에는 나치무장친위대 소속 전몰자도 묻혀 있다"며 "나치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냐"는 논란이 인 것이다.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해 레이건과 콜 서독 총리는 그날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갇혀 있다 죽은 강제수용소도 급하게 방문해야 했다.

▶일본과 독일은 같은 2차 대전 전범국이지만 전몰자를 추모하는 생각과 방식이 그렇게 다르다. 2차 대전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도조 히데키 같은 인물을 받들어 모시며 그냥 '법적인 일로 죽었다'는 뜻으로 '법무사(法務死)'라고 표시해놓는 게 야스쿠니다. 신사 옆 전쟁박물관 안내판에는 중국인 20여만명이 죽은 남경대학살에 대해 이렇게 써놓았다. "마쓰이 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엄정한 군기, 불법 행위 금지'를 시달했다. 시내에서 패잔병 적발이 벌어졌지만 일반 시민의 생활엔 평화가 되살아났다."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들 목 베기 시합을 했다든가 수많은 여성을 강간 살해했다는 얘기는 없다.

▶독일 통일 후 베를린에 들어선 국립 중앙전몰자추도소에는 '전쟁과 폭력 지배의 희생자를 위하여'라는 비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추모의 대상은 병사들만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600만 유대인과 공습으로 억울하게 숨진 시민, 나치 억압 체제에 저항하다 죽은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그래서 프랑스 시라크, 러시아 옐친, 체코 하벨 등 2차 대전 때 독일과 싸웠던 나라 대통령들이 기꺼이 이곳을 찾아 꽃다발을 바쳤다.

▶일본의 다음 총리로 유력한 아베 자민당 총재와 현직 장관 2명, 여야 의원 67명이 잇달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중국 언론 표현마따나 정치 목적으로 우경화를 부추기고 주변국 시선을 일부러 깔아뭉개는 '사악한 참배'다.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岸信介)는 A급 전범으로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냉전이 시작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한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풀려났다. 그때 기시 같은 인물들을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했다면 동북아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 조선일보 만물상, 2012/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