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야당의 굴욕

하마사 2012. 9. 18. 20:00

 

민주투쟁 선봉 섰던 한국 야당
그러나 지금의 민주통합당은 자기 당 후보 불쏘시개 여기고 장외인사에게 무릎 꿇을 태세…
만약 야당의 적통을 자처한다면 집권 포기하더라도 굴욕 피해야

김대중 고문

일선 기자 시절 야당만 3년 취재했던 나는 우리 야당에 깊은 애착(愛着)을 갖고 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민주정치를 궤멸시키던 시절, 오로지 우리의 야당만이 이에 맞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다. 김영삼·김대중 등 '40대 기수'가 당(黨)의 중심이자 전위가 되어 대여(對與) 투쟁을 했던 당시의 야당(신민당)은 우리 기자들의 보람이자 희망이었다. 마침내 당시 민주투쟁의 선봉장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집권에 성공했고 한국 야당의 지도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겼다.

실로 우리나라의 야당은 험난한 변천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한민당)으로 시작되는 야당의 족보는 민주국민당(신익희·조병옥)→민주당(1955)→신민당(1960)→민주당(1965)→신민당(1967:유진오·유진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고 정치 부재의 암흑시기를 거쳐 1985년 신한민주당으로 재탄생했다. 한국 야당의 적통(嫡統)은 여기서 갈라진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민자당(노태우)과의 3당 통합으로 반여(半與)의 길로 갔고, 김대중의 평민당은 계속 야당의 길을 갔다가 YS에 이어 집권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노무현)을 거쳐 2007년 민주당으로 다시 야당이 됐고, 이어 민주통합당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새삼 야당의 족보를 되뇌는 것은 오늘의 야당, 즉 민주통합당이 과연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야당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고 적통임을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기 위해서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두고 민주당은 그야말로 지리멸렬 상태다. 야당이 문재인이라는 대통령 후보를 뽑았는데도 사람들은 당외(黨外)의 안철수의 행방에만 열중한다. 당내에서조차 자기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를 장외인사(場外人士)와 단일화시키려는, 말하자면 자기 당 후보를 '불쏘시개'처럼 여기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한국 야당의 원조 격인 송진우·김성수·신익희·조병옥 등 어르신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심지어 김대중·노무현도 '죽 쑤어서 누구에게 갖다 바치는' 식의 민주당 심리상태(멘탈리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민주당이 안철수를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민주당으로서 차선(次善)의 카드일 수 있다. 독자적 힘으로 거대 여당을 이길 수 없었던 경우, 김대중도 김종필과 손잡고 DJP연합으로 집권할 수 있었고, 노무현도 정몽준과의 단일화에 사실상 성공함으로써 막판 뒤집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이 안철수에게 대권을 양보하거나 헌납하거나 또는 불평등한 연립(coalition)으로 대선 정국을 귀결시키는 것은 역사에 없었던 일이고 역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전통 야당의 그 누구도 정권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자당 후보를 사실상 장외인사와의 결선에 내보내거나 급기야 무소속 인사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감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안철수씨는 조만간 출마를 선언하리라는 보도다. 당을 만드는 것인지 무소속의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나서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 것을 보고 나서야 출사표를 던지는 것을 보고 두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민주당 알기를 우습게 아는 교만함의 발로이거나, 아니면 막판 단일화로 야당에 표몰이를 해주기 위한 위장성 술수이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자기가 '갑(甲)'의 위치에 있다는 도전적 과시이거나 아니면 막판에 문재인 후보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3파전 '밀고 당기기'의 성격일 가능성을 의미한다.

문제는 두 사람의 인기도, 즉 여론조사 내용이 쭉 지금의 연장선으로 이어질 경우다. 그럴 때 축이 안철수 쪽으로 기울어질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 집권만을 염두에 둔다면 당내의 분위기는 물론 범야 지지 세력이 문재인 쪽에 붙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단호히 처신해야 한다. 이런 소리를 음모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겠지만 야당의 적통을 자처한다면 집권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굴욕스러운 선택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하긴 이제 야당에 대한 애착을 접을 때도 됐다. 오늘의 야당이 내가 보고 겪고 배운 그런 전통의 야당이 아니고 집권을 위해서라면 종북(從北)이 도사린 진보 세력과도 손잡고, 정치적 이득이 있다면 헌법을 무시하는 자들과도 연계할 수 있다는 그런 '잡종(雜種) 연대'로 변질되는 상황에서 개인적 애착은 이제 낡을 대로 낡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서 우리에게도 선진국의 좌파다운 좌파 정당, 즉 독일의 사민당, 프랑스의 사회당, 영국의 노동당 같은 진보·리버럴·좌파 정당이 정착했으면 한다.

 

-조선일보 사설, 2012/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