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코리안 탱크 프로골퍼 최경주

하마사 2012. 10. 6. 14:08

 

죽기살기로 퍼팅하니, 호미로 판 듯 길이 보이더라

탱크가 양복을 입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무리 봐도 잘 지은 별명이었다. 짧은 곱슬머리와 고동색으로 그을린 얼굴, 다부진 체격이 무척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탱크라는 별명은 호주의 골프 선수 이언 베이커―핀치가 그를 두고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저력이 있다"고 말한 뒤로 생긴 것이다.

탱크에서 오른손이 쑥 나와 악수를 청했다. 온기만 없었다면 나무 말뚝을 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습생 시절 하루 4000개씩 공을 쳤다는 그 손이다. 전라남도 완도 농부의 아들 최경주(42)를 '한국인 최초의 PGA 프로골퍼'에 올려놓고, PGA 투어에서 여덟 번이나 우승하도록 이끈 집념과 근성이 그 손바닥에 집약돼 있었다.

최경주가 오는 10일 자서전을 펴낸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비전과리더십 刊)'라는 책이다. 7일까지 열리는 '최경주 CJ인비테이셔널' 골프대회 참가차 귀국한 그를 경기도 한 골프장에서 만났다. 그는 마실 것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주문했다. "한국에 오면 하루 한 잔 정도는 이 커피를 마셔요. 미국에서는 이런 맛이 안 나요. 고향 생각나는 맛이죠. 그리고 과거 연습생 시절에 마시던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생각나요. 참 싸고 맛있었죠." 그가 껄껄껄 웃었다.

최경주는 고1때 우연히 골프를 만난 뒤 골프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처음에는“부모 등골 빼먹는다”며 반대했던 부모도“큰 물에 가서 놀라”며 최경주를 뒷바라지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서울 경(京)에 두루 주(周)다. 그는 전 세계를 두루두루 다니며 승리를 일구는 프로 골프선수가 되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자서전을 미리 구해 읽어보았습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6년 전부터 책 한 권 내라고 권했어요. PGA 투어 3승 했을 때죠. 그런데 책을 쓸 자신이 없었어요. 내가 뭔데 책을 써? 그런 생각이었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목사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니까 책 내자는 말씀도 없으시고. 이제라도 정리해서 쓰자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올해 제가 성적이 안 좋은 편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마냥 잘될 때 책을 내면 '우승하니까 책을 냈네' 할 것 같았어요. 제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아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섬 출신인 그는 "지금도 뱃삯이 없어 섬을 못 나오는 사람, 태풍 피해로 절망한 사람이 많다"고 했다.

―올해 마스터스 대회에서 컷오프되는 장면으로 책을 시작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작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감이 좋았어요. 그런데 마스터스 둘째 날 탈락하고 말았죠.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나무처럼 나도 가지치기를 했어야 하는데 못한 것 같아요. 인간적인 욕심, 승리에 대한 집착, 남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 마스터스 우승의 짜릿함, 이런 것들에 대한 앞선 생각이 집착이 된 거죠. 그러나 이런 실패가 늘 저를 가다듬게 하고 제가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책 첫머리에 썼습니다."

―'4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탈락하는 것'에 대해 썼는데, 그 기분이 어떻습니까.

"진짜 기분 더러워요. 하하하. 물론 탈락할 수 있죠. 그런데 제가 정말 우승하고 싶은 대회가 마스터스예요. 그리고 동양에서 10번째 마스터스에 참가한 선수는 제가 처음이에요. 그런 자부심이 있는데 컷을 당한 거죠. 그건 뭔가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거예요. 집착 때문에 즐기지 못했던 거죠. 골프는 공이 홀컵에 들어가야 끝나는데, 즐기지 못하면 공이 들어가지 않아요. 자신감과 욕심이 뒤섞여서 그런 거죠. 그런 것에서 또 많은 것을 배웁니다."

최경주는 완도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역도를 했다. 완도가 역도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역도부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면제받아 한해 육성회비 8900원만 내면 된다는 것이 좋았다. 용상(聳上)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인상(引上)에 약했던 그는 중3 때 역도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중에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진학한 완도수산고에서 난생처음 골프라는 운동을 만났다.

 

탱크의 프로論
우즈 일으켜세운 힘은
잭니클라우스 대기록
깨겠다는 강한 열망…
그 근성 배우고 싶다

한때 키늘리기 수술 생각
미국 진출 첫해에
작은 키 때문에 고민…
되레 미국 선수들은
내 장딴지 부러워했지

―어떻게 골프를 시작했습니까.

"역도를 하면서 건장한 체격으로 부모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구나 했죠. 그런데 그런 마음의 불똥이 골프로 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역도 해본 사람 나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갔더니 '너는 골프부다' 그래요. 애들끼리 '골프가 뭐대?' '나는 몰라, 너는 아냐?' 하고 웅성거렸죠. 당시에 완도에서 스포츠용품점을 하시던 추강래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완도 최초의 골프연습장을 만들고 완도수산고에 골프부 신설을 제안하신 거죠. 완도에 김·미역 수출 덕분에 일본인 바이어들도 많이 오는데 골프연습장 하나 있을만 하다 해서요. 어느 날 동네에 큰 그물 천막이 올라가는데, 저는 분명히 꿩 사육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크기가 딱 꿩 사육장인데 높이는 훨씬 높더라고요. 친구들은 닭장이라고 하고, 저는 꿩 사육장이라고 옥신각신했었죠. 그 그물 천막을 보면 꿩고기 생각에 침이 고일 정도였으니까요. 바로 그곳이 제 인생의 첫타(打)를 친 연습장이에요."

“우즈, 날 볼때마다 '굿모닝 KJ 개××야' 한국말로 장난”

열여섯 살 최경주가 처음 들어서 본 골프연습장에는 꿩 알 대신 "구슬치기하기엔 너무 크고, 야구를 하기엔 작은" 흰 공들이 가득했다. 그가 '사부님'으로 모시는 골프부 교사 추강래는 공 치는 시범을 한번 보여준 뒤 말했다. "느그들이 한번 쳐봐라. 여기 있는 공을 다 주워담아야 하는데, 저 그물망까지 공을 쳐내는 녀석은 열외여." 난생처음 골프채를 잡아본 아이들이 모두 공을 데굴데굴 굴리거나 땅을 칠 때, 최경주만은 '홈런'을 쳤다. 그는 "파란 하늘 위로 공이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더니 곧 불붙듯 뜨거워졌다"고 했다. 그때의 골프채가 7번 아이언이라는 것과 공이 140m가량 날아갔다는 사실을 최경주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이후 최경주는 본인 표현대로 "골프에 미쳐서" 온종일 혹독한 훈련을 감당했다. 특히 쇠파이프에 쇠뭉치를 달아 폐타이어를 치는 연습은 압권이다.

―쇠파이프로 골프 연습을 어떻게 합니까.

"폐타이어를 땅에 절반쯤 묻어놓고 골프채로 하루 종일 두들기니까 골프채가 금방 부러져요. 그래서 수도 파이프를 120㎝쯤 길이로 자르고 그 끝에 쇠뭉치를 용접합니다. 쇠뭉치 밑을 둥그렇게 자르고요. 다른 끝엔 반창고를 둘둘 감죠. 그러면 대충 골프채 모양이 됩니다. 무게는 보통 드라이버의 열 배 정도 됩니다. 그걸로 폐타이어를 치는데 몇천 번을 치면 땅에 박힌 타이어가 흔들흔들하다가 결국 뽑혀요. 그래서 친구들과 '누가 타이어 빨리 뽑나' 시합을 했어요. 아침저녁으로 타이어를 한 번씩 뽑았습니다. 그렇게 훈련하다가 골프채를 잡으면, 이건 뭐 회초리밖에 안 되는 거죠."

한국의 남쪽 섬에서 태어난 최경주는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줄곧 따라간 결과,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 2010년 마스터스 대회가 끝난 뒤 타이거 우즈와 손을 맞잡은 최경주 / 조선일보 DB

―그렇게 훈련한 것을 미국에서도 이야기했습니까.

"제가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영어 실력이 안 돼요. 하하하." 그는 책에서 "극도로 집중해서 훈련을 하면 나중에는 사람이 멍해지고 주변이 깜깜해지다가 다시 하얗게 된다"고 했다. 이것을 마라톤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달리기 도중 느끼는 일종의 환각증세)'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쇠파이프 훈련을 미국 기자들에게 이야기하면 분명히 좋은 기삿거리가 될 것이다.

―백사장에서 벙커샷 연습을 한 것도 유명한 일화죠.

"완도 옆에 신지도라고 있는데, 거기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어요. 모래가 아주 곱고 부드러운데, 썰물 때는 자동차가 다닐 만큼 단단해요. 그곳이 자연이 나에게 준 최고의 연습장이에요. 백사장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습하니 바람과 모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죠. 모래가 단단할 때는 페어웨이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고, 모래 위에서 샷을 하면 디봇(divot·골프채에 팬 흔적)이 생겨서 스윙의 궤적을 알 수 있어요. 그게 80년대 중반인데, 그때 누가 거기 골프채를 들고 가서 연습을 하겠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는 책에서 "샷 연습은 잔디보다는 맨땅에서, 맨땅보다는 모래사장에서 하는 게 좋고, 가능하다면 명사십리에서 하는 게 최고"라고 했다.

최경주는 고1 때 처음 필드에 나가 108타, 두 번째는 98타를 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완도에서 광주 골프장까지 갈 차편이 없어 소 싣는 트럭 짐칸에 실려 가기도 했다. 완도에는 골프장이 없었으므로, 필드를 밟으려면 광주에 가는 사람들 신세를 져야 했다. 한 번 골프장에 가면 새벽 6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 하루 종일 라운딩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는데, "가장 많이 돈 날은 63홀까지 골프를 쳤다"고 했다.

그는 완도 골프연습장에서 우연히 만난 서울 한서고 김재천 이사장의 권유를 받아 서울행을 결심했다. 골프를 배운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였다. 그러나 최경주를 완도에 붙잡아 두려는 학교와, 그의 서울 생활을 뒷바라지해주기 어려운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다.

8년 넘게 함께 필드를 밟았던 명(名)캐디 앤디 프로저와 헤어지던 2011년의 모습 / 조선일보 DB

―부모님과 학교의 반대를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경주 저놈아가 부모 등골 빼먹는다'고, 절대 골프 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부모님도 그냥 학교 다니다가 원양어선 타라고 했죠. 원양어선 타는 걸 과거 급제하듯이 생각하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고1 때 인생의 방향을 골프로 정하고 나니까 아무도 못 말리는 거예요. 몰래 서울에 올라가서 김재천 이사장님을 만나 '나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하고, 집에다가는 '난 갈라요. 안 보내줘도 맘대로 할 거니까 알아서 하씨오'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부모님도 '저놈 저렇게 좋아하는 것 하게 냅두자' 하신 거죠. 그때 장롱 이불 속 깊이 넣어뒀던 소 판 돈을 아버지가 꺼내시는 걸 봤어요. 학교 선생님들 설득하고, 또 제 서울 생활 뒷바라지하는 데 쓰신 거죠. 그때 제가 '아부지, 제가 나중에 성공해서 소 사드릴게요'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딴생각 하지 말고 골프 열심히 해라. 고기도 큰물에서 놀지 작은 물에서는 그것이 그것이여. 남들 가는 데 가봐야 그물 천지여. 뭐든지 남들이 안 하는 데 가서 해야 뭔가 더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 저를 보내주셨죠."

―소 사드린다는 약속은 지켰나요.

"두 마리 사드려서 그것들이 새끼 치고 해서 잘 보답했지요. 하하하."

'탱크' 별명은 누가
호주 선수 베이커-핀치가
"탱크처럼 밀어붙여…"
말한 뒤부터 생겨났죠

영어가 짧아서…
쇠파이프에 쇠뭉치 달아
폐타이어 쳤던 내 훈련법
美언론엔 얘기못했어요

아버지와 약속 지켰다
서울로 골프 유학할 때
소 팔아 내 뒷바라지 한
아버지에 두마리 사드려

은퇴후엔 자선가로 살 것
메이저대회 한차례,
꼭 우승하는 것 포함해
10승 채우고 싶어요

―아버지가 되니 그때 부모님의 반대를 이해하게 됐습니까.

"호준(최경주의 장남)이가 지금 열여섯 살이에요. 제가 서울 가겠다고 할 때 나이와 똑같죠. 비로소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들이 하겠다는 대로 해주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니까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때 '빚을 내서라도 밀어주마' 했으면 제게 부담이 되지 않았겠어요? 아버지가 반대하니까 저는 저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고, 그렇게 홀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된 거죠. 그래서 호준이에게도 뭐든지 다 해주지 않습니다. 스마트폰도 올해에야 사줬어요. 아무리 바빠도 학교에 부모가 가야 하는 날엔 꼭 갑니다. 가서 꼭 안아주고 기도해 주죠. 지금은 몰라도 20~30년 뒤에 호준이가 반드시 아빠가 안아주고 기도해준 것을 기억하고, 저처럼 그 의미를 되새길 겁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생이 심했지요.

"그때 숙식을 해결하던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당산역까지 와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뚝섬에 있던 9홀짜리 골프코스에 다녔어요. 골프백을 지하철 짐받이에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어디 낚시 가나 봐요' 하고 묻곤 했죠. 그렇게 복잡한 서울을 찾아다니는 일이 힘들었어요. 골프백을 메고 지하철이나 버스 타는 건 흉이 되지 않았어요. 용달차 타고 골프장 간 적도 있는데요. 그런 것 때문에 의기소침한 적은 없습니다."

최경주는 미국에 진출한 뒤 상대적으로 작은 키 때문에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인위적으로 키를 10㎝가량 늘린다는 수술을 알아보기도 했다.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일일이 사인해주는 최경주. / 조선일보 DB

―그렇게 키가 골프에서 중요합니까.

"제가 173㎝가 조금 안 됩니다. 골프에 적당한 키가 있어요. 178에서 185㎝입니다. 타이거 우즈 키가 183㎝~184㎝쯤 될 겁니다. 그래서 내 키가 5㎝만 더 커도 좋겠다 했죠, 나이키와 후원 계약을 할 때도, 신발을 5㎝ 올리면서 균형감을 맞출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물론 그렇게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면 균형을 맞출 수가 없죠. 키 큰 선수가 유리한 것은 샷을 할 때 골프채와 공이 만나는 순간이 짧습니다. 컴퍼스가 길면 돌리기 쉬운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러프가 깊은 미국 골프장에서는 키가 큰 선수들이 공을 더 잘 칠 수 있어요."

―키 외의 부러운 조건도 있습니까.

"키 말고는 없어요. 오히려 미국 선수들은 제 하체, 장딴지를 부러워하죠. 어려서부터 부모님 일을 돕고 역도로 다져진 다리니까요. 그리고 제가 공을 치는 리듬도 좋은 편이에요. 미국 선수들끼리 'KJ초이(KJ Choi·최경주의 미국 이름)의 리듬을 가장 따라하고 싶다'고 말한다고 들었어요."

최경주는 중학생 때부터 완도 화홍포 뻘밭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 뻘을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발달했다. 물고기를 잡아오면 콩밭도 챙기고 소 여물도 베었다.

―야구 선수들이 홈런을 친 뒤 '공이 축구공만 하게 보였다'고 하는 순간이 골프에도 있습니까.

"1999년 일본에서 열린 기린 오픈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기였어요. PGA에 갈 자격을 따야 하는 시합이었죠. 그 마지막 퍼팅이 한 3m짜리였는데, 기도를 하고 눈을 뜨니까 그린 위에 길이 보이는 거예요. 칠판에 분필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공에서부터 홀컵까지 선이 있더라고요. 미국에서 PGA Q스쿨에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그랬어요. 마지막으로 4m짜리 퍼팅을 남겨두고 있는데, 그걸 못 넣으면 짐을 싸서 한국에 가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퍼터가 부들부들 떨렸죠. 그때 기도하기를 '저를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게 하실 겁니까.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했죠. 그리고 딱 눈을 떴더니 이번엔 호미로 골을 파놓은 것처럼 길이 보이는 거예요. 그 '골'에다가 공을 굴리기만 하면 됐죠."

―결정적인 퍼팅을 실수하거나 할 때는 어떻게 분을 삭입니까.

"동전을 셉니다. '에이, 십원짜리야' '이런 이십원짜리 같으니라구' 하는 거죠. 정말 화가 날 때는 70원, 80원까지도 올라가요. 미국 생활 초기에 저를 굉장히 무시했던 캐디가 있어서 제가 참다 못해 '파이어(fire·해고)'라는 말을 처음 쓴 친구가 있는데, 그 캐디 같은 경우는 거의 100원쯤 되죠. 하하하."

―타이거 우즈가 한국 욕을 잘 한다면서요.

"스탠퍼드대 다닐 때 한국인 친구들에게 배웠대요. 장난으로 배웠겠지요. 저를 보면 장난스럽게 웃으며 '굿모닝, KJ. 개××야' 하곤 하죠. 제가 '너 한국 욕 하면 한국 팬들이 싫어한다'고 하면 '그래? 알았어. 개××야' 하는 식이에요."

―타이거 우즈의 스캔들로부터 배운 게 있습니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추어는 운동을 통해 몸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사람이고, 프로는 기록을 세우고 또 깨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타이거 우즈가 그 스캔들을 겪고도 저렇게 되살아나고 버티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그건 잭 니클라우스가 세운 18번의 메이저 토너먼트 우승 기록을 깨기 위한 거예요. 그 밖의 기록은 타이거가 이미 다 깼어요. 지금 타이거가 메이저 우승만 14번 했습니다. 앞으로 5번을 더 이겨야 하죠. 많은 후배가 쉽게 하는 말이 '나는 빨리 돈 벌어서 은퇴하고 싶다'는 거예요. 돈 보고 운동하는 사람은 프로가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건 스포츠가 아니라 내기예요. 스포츠맨십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타이거는 스캔들 이후에 망가질 가능성이 99.9%였는데 지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 그 0.1%가 무엇이냐. 잭 니클라우스의 기록을 깨겠다는 열망이에요. 나는 그런 점이 타이거 우즈의 아주 우수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근성 말이죠. 기록을 깨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연습량, 그런 것을 정말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서전에서 "나는 골프인생 18홀 가운데 11홀쯤 와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나는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 갈 때만 해도 다들 '1년 안에 포기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어요. 실제로 미국 진출한 첫해에 국내대회에 초청받아 왔다가 컷오프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죠. 그러나 13년째 PGA투어에서 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프로 골퍼가 마흔살 넘으면 늙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절반을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앞으로 5년 정도는 충분히 재도약할 시간이 남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야죠. 소망이 있다면 PGA 투어에서 8승을 했으니까 10승을 채우고 싶고, 그중에 한 번은 메이저 대회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투어에서 은퇴하면 자선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최경주는 '인생 18홀' 가운데 "무엇 하나 쉽게 지나간 홀이 없었지만 나는 조금씩 더 강해졌고 지금도 강해져가고 있다"고 책에 썼다. 그는 비록 후배(양용은)에게 '한국인 최초 메이저 대회 우승'이란 타이틀을 빼앗겼지만, 그 이상의 기록을 세우고야말, 안팎이 두루 강하고 단단한 사람 같았다.

 

-조선일보, 201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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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핵심은 절대 포기않는 마음가짐”

 

‘코리안 탱크…’ 자서전 낸 최경주 선수

‘실패가 나를 키운다’는 자기 계발서적인 부제를 붙인 ‘코리안 탱크 최경주’(비전과 리더십)를 읽고 난 뒤 느낌은 최경주가 나에게 보내는 한 편의 응원가를 들은 것 같았다. 성실과 끈기로 미국 프로골프 PGA 투어 한국인 1호가 된 최경주(42) 선수의 자전적 이야기가 책 속에 들어 있었다. 골프와 삶, 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하거나 좌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책을 읽다보니 프로 골퍼였던 닉 팔도가 최경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KJ(최경주 선수의 영어 애칭)는 드라이버 샷도 아이언 샷도 그저 그런 선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우승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팔도는 최경주가 승리의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선수가 아님에도 PGA에서 우뚝 선 이유를 궁금해 했다. 그가 만일 이 책을 읽었더라면 ‘뭔지 모를 최경주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됐을 것이다.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빈번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경주의 시크릿 파워(Secret Power·비밀의 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간간이 나오는 믿음의 이야기야 말로 최 선수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최 선수를 8일 오전 서울 광화문의 모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는 전날 자신이 주최한 한국프로골프투어 CJ인비테이셔널 대회에서 우승, 대회 2연패를 했다.

그에게 다짜고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바로 대답이 들어왔다. “마음가짐입니다.” 부연설명을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키워드도 희망이라고 말했다.

최 선수는 아내 김현정씨와의 결혼 전 약속에 따라 1993년부터 서울 서빙고동 온누리교회를 다녔다. 99년에 세례를 받았다. 처음에는 뭔지 모르는 가운데 교회에 다녔지만 점차 하나님은 그의 삶 최 중앙으로 들어오셨다. 골프를 하면서 그는 여러 차례 기도의 힘을 절감했다. 책 속에는 그가 경험한 기도의 힘에 관한 몇 가지 예가 나와 있다.

99년 일본에서 열린 기린 오픈은 PGA에 갈 자격을 따야 하는, 최경주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경기였다. 3m짜리 마지막 퍼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를 한 뒤 눈을 뜨니 갑자기 그린 위 공에서부터 홀 컵까지 칠판에 분필로 그어 놓은 것처럼 선이 그어져 있었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물론 간단히 성공시켰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PGA Q스쿨에 들어갔던 당시 마지막 4m짜리 퍼팅을 남겨뒀을 때에도 기도했다. 만일 못 넣으면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퍼터가 부들부들 떨렸다. 최 선수는 “저를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이대로 갈 수 없습니다”라며 기도했다. 눈을 떴더니 이번엔 호미로 골을 파 놓은 것처럼 길이 보였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성경구절은 여호수아 1장9절 말씀이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주문과 같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최경주, 강하고 담대하라.”

최 선수는 미국에서 영광의 순간도 경험했지만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실패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도 다시 일어섰다. 그는 말한다. “힘의 원천을 알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는 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지요. 그 힘을 의지 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는 믿음의 만남을 가졌다. 완도 ‘촌놈’이 미국 무대를 호령하는 ‘호랑이’가 된 데에는 믿음과 섭리적 만남의 힘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만남이었다. “김현정 없는 최경주는 없지요. 제겐 로또 같은 아내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어떤 것도 이길 것 같은 엄청난 힘이 솟았다고 말했다. “그래요. 확실히 나에게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의 기도였습니다.”

아내 뿐 아니라 그에게는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주식회사 삼정의 피홍배 회장, 슈페리어 김귀열 회장 등 수많은 기도의 응원군이 있었다. 최 선수는 고 하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 목사님으로부터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나를 보면 언제나 안아주셨습니다. 그 분은 제게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골퍼 인생 18홀 코스에서 이제 겨우 11홀 정도를 마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무엇하나 쉽게 지나간 홀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더 강해졌습니다. 저는 유명한 선수가 되기보다는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품고 스스로 정한 기준을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책에서도 그는 “나는 성공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산다. 내가 승리하고 싶은 곳은 골프장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라고 썼다.

언제 은퇴할 거냐는 질문에는 “골프채가 올라가지 않을 때”라며 활짝 웃었다. 이미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은퇴 이후 자선가의 삶을 살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가 만든 ‘최경주 재단’에서는 현재 ‘꿈의 둥지 건립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책의 인세는 전액 그 프로젝트에 기부된다. “몸과 마음 둘 곳 없어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내일의 희망을 맘껏 키워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모두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국민일보, 201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