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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주년 맞은 '국민 성악가' 박인수

하마사 2012. 10. 13. 18:10

 

데뷔 50주년 맞은 '국민 성악가' 박인수
"사람이든 정치든 예술이든 권위주의가 몸에 붙는 순간 망해요"

 

“진짜는 과녁, 10점짜리 흑점을 단박에 뚫어요. 심장 언저리까진 왔으나 주춤거리면 9점, 귀만 살짝 스치면 7점. 처음엔 확 끌리는데 금세 싫증이 나면 그것도 가짜예요. 음악과 정치, 사랑이 다 그렇지요.”

설악발(發) 첫 단풍 소식이 들려온 날, 왕년의 스타 테너 박인수(74)가 싸구려 핫도그를 씹으며 예술과 정치를 이야기했다. 올해는 그가 성악가로 데뷔한 지 50주년 되는 해다. 제자들 마스터클래스로 사용하는 백석대 연구실에서 박인수(석좌교수)는 ‘진위(眞僞)시비’를 이어갔다. “고급이라고 진짜가 아니지요. 이를테면 리어카에서 파는 이 싸구려 핫도그가 진짜예요. 밤낮 경찰 눈 피해가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아주머니의 설움과 애환이 담겨 있으니 맛있지요. 오갈 때마다 내가 ‘충성!’ 하고 인사를 해요. 그 아주머니한테.”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로 90년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테너 박인수는 ‘미성(美聲)의 잘생기고 반듯한 서울대 교수’가 아니었다. 수원역 신문배달부에서 뉴욕 오페라계를 활보한 ‘돈키호테’였고, 술을 너무 좋아해 목소리를 잃을 뻔한 주당(酒黨)이었으며, “수육에 날새우젓을 곁들여내는 냉면집은 가짜”라고 일갈하는 미식가이자, “내 인생 최고의 스캔들은 여자”라며 껄껄 웃는 한량이었다.

박인수는 지난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사회를 본 팝페라 가수 카이가 스승에게 헌사했다. “형편이 어려워 바텐더로 일할 때 교수님이 찾아오셨어요. 술 한잔 드시더니 제 주머니에 100만원을 넣어주시며 ‘노래 공부나 제대로 해, 인마’ 하고 돌아서시는데….”

박인수를 만났다. 호걸의 풍채는 세월로 사위었으나, 그 허세와 패기,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젊은이의 것이었다.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한 서울 예술의전당 뜰에서 박인수 교수가 가을 햇살을 즐겼다. “ 예술의전당 오프닝 무대에도 섰으니 애정이 각별하지요.” ‘성악가’보다 ‘가수’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다는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우리 민요와 클래식의 크로스오버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언더그라운드로 살기

―50주년 공연에서 사제 간 애틋한 정을 과시했더군요. 국내외 내로라하는 테너들이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였다고 하던데요.

“존경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간 학교(서울대) 있을 때부터 제자들이랑 놀았어요. 동료 교수들은 폼만 재지 재미가 없잖아요. 점심, 저녁을 늘 제자들이랑 먹고 다니니 서울대 20년 월급이 거기 다 들어갔지요.”

―역시 밥의 힘이 큽니다.

“그렇지. 다 돌아오게 돼 있어요. 한물간 사람을 이렇듯 떠받쳐주니.”

―정년퇴임(2003년) 후에도 활동이 왕성하십니다.

“혼자선 못해요. ‘박인수와 음악친구들’이란 타이틀로 제자들과 함께 다녀요. 1년에 50회 이상. 해외공연도 가고.”

―공연 규모가 전성기 때와는 많이 다르지요?

“예전에는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에만 섰지요. 지금은 갤러리에서도 하고 교회에서도 하고. 알다시피 옛날에는 내가 ‘TV가수’였다고요. ‘향수’ 때문에. ‘열린음악회’(KBS)를 나랑 PD가 함께 만들다시피 했으니까. TV에 나오니 인기와 돈이 따라왔죠. 1년에 200회씩 무대에 섰어요. 강의도 해야 하니 눈코 뜰 새 없고 그러다 보니 소리를 연구 안 하게 돼요. 소리가 나빠졌지요. 창피한 얘긴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초청을 해요. 가수로선 죽는 거지. 보람도 없고. 지금이 훨씬 좋아요. 완전 언더그라운드잖아. 하하! 박인수 음악회 한다고 신문에 안 나도, 개런티를 (주최 측이) 주는 대로 받아도, 소문으로 ‘박인수와 친구들’ 공연 재미있다고 퍼지니 청중이 꽉꽉 들어차요.”

―‘박인수 소리연구회’는 또 무엇입니까.

“50대 중반에 내 목소리가 맛이 갔어요. 내 음악회라면 무조건 오는 친구들이 하루는 나더러 ‘너 목소리 갔어, 그만해’ 합디다. 몇날 며칠 고민에 잠겼는데 불현듯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올라요. 옛날 벨칸토 발성법으로 마스터한 가수들은 젊은 목소리로 죽을 때까지 노래한다는 내용이었지요. 파리넬리처럼. 1600년대부터 250년을 풍미한 발성법이 벨칸토인데, 그 비법을 알면 목소리를 다시 살릴 수 있으리란 확신에 전 세계 도서관을 뒤졌어요. 현재 우리가 구사하는 발성법과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그걸 기반으로 소리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예요.”

―효험을 보셨나요.

“그럼요. 되니까 정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지금도 노래하지요. 의학적으로 보면 당뇨에 고혈압, 갑상선 기능 저하까지 있는 이 몸으로 노래할 수가 없다고요. 제자들에게 발성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자기가 그걸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사기 아닙니까.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메트로폴리탄, 라스칼라, 로열오페라, 비엔나, 베를린오페라 등 세계 5대 오페라를 누비고 있어요. 이용훈, 김재형, 신동원, 정호윤이 그들이지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향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인수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겐 ‘클래식이 별거 아니구나’ 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죠.

“그런 목적으로 노래한 건 아닌데 결과가 좋았죠. ‘향수’ 들으러 왔다가 성악에, 클래식에 관심 갖게 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니까.”

―재즈 하는 김준 선생이 처음 권했다고요?

“정지용 시인의 해금된 작품이라며 시(詩)를 건네주는데, 실개천 휘돌아나가는 그 마을이 내 고향처럼 느껴지데요. 우리 집안이 중종 이후 서울에서만 살아 시골이라고는 모르는데 그 시를 읽으니 고향이란 게 이거구나, 가슴이 뭉클해요. 곡도 안 나왔는데 무조건 부르겠다고 했지요.”

―함께 노래한 가수 이동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나요?

"미국에서 83년 귀국했는데 다방에서 '이별노래'가 흘러나와요. 어떤 가수인지 참 구성지게도 부른다, 생각했는데 그가 이동원이었어요. 곡을 붙인 김희갑 선생은 천재지요. 제아무리 히트곡 제조기라고 해도 이동원과 박인수의 서로 다른 음색과 음역에 두루 어우러지는 곡을 만들기가 그리 쉽나요? 중간에 관두려는 걸 이동원이 찾아가 떼를 쓴 바람에 일곱 달 만인가에 나왔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습니까.

"큰일 날 줄은 알았어요. 당시 장일남 선생이 오케스트라 데리고 신라호텔에 들어가 '가곡의 밤' 한 것도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요. 웃기는 일이지. 그러니까 (클래식이) 망하는 거예요. 내가 항상 주장하지만, 사람이든 정치·경제·예술이든 권위주의가 몸에 붙으면 그때부터 망해요. 신성불가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가 그래서 교수들이랑 안 놀아요. 끝까지 가는 사람에겐 권위주의가 없어요. 오로지 진정성만 있지."

―'향수'를 부른 뒤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셨지요?

"단원 13명이 모여서 투표를 하데요. 찬성 9, 반대 4로 나왔으니 제명이래요. 인사권을 지닌 단장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하라고 붙잡았는데 내가 안 한다고 했어요. 차기 오페라단장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는데, 얽히고 싶지 않았지요. 나중에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감사장을 주면서 국립오페라단을 비판하데요. 사대주의에 빠진 오페라단은 존속할 필요가 없다고 노발대발하는데, 그건 또 다른 문제라며 제가 말렸지요."

―클래식 음악만의 기품과 격을 지켜나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닌가요?

"그럼요. 일생 동안 예술가곡만 하는 사람, 오페라만 하는 사람을 나는 존경해요. 그런 분들도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죠."

―'향수' 음반이 엄청나게 팔렸지요?

"170만장 정도 팔렸다나 봐요. 한 장당 가수에게 로열티가 1000원이 오니 두 명의 가수가 17억을 번 셈인데 난 한 푼도 못 받았어요(웃음)."

―어찌 된 일인가요?

"1989년 5월에 '향수' 녹음하고 그해 12월까지 70만장이 팔려나갔어요. 크리스마스에 이동원이 찾아왔더군요. 음반 판매 결산서를 내밀면서 그래요. 7억을 받았는데 자기가 집도 없고 빚만 많아서 그 돈으로 빚 갚고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샀대요. 잘했다고 하니까 내년에 번 돈은 다 교수님께 드리겠다 하더군요. 그리고 선물이라며 긴 상자를 내밀길래 나는 거기에 만원짜리 100장은 들어 있을 줄 알았어요. 그 친구 돌아간 뒤 뜯어보니 연어 한 마리 들어 있습디다. 하하!"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에 훤칠한 외모로 여성 팬이 많았습니다.

"내 기억엔 남자 팬들이 더 많았어요. 공항에 가면 중년남자들이 알은체를 하면서 '박 교수님, 존경합니다' 그래요. 내가 '존경'이라면 몸 둘 바를 모르거든. 입국심사대에서도 직원이 여권을 보더니 '박인수 선생님?' 하며 올려다봐요. 그러더니 나를 자른 국립오페라단을 막 욕해요. 고마웠죠."

쌀 한 됫박, 고등어 두 마리

서울 내수동에서 태어난 박인수의 음악적 재능은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셨어요. '봉선화' '그집앞'부터 이태리 가곡, 아리아까지 밤낮 흥얼거리셔서 나도 따라 외웠지요." 하지만 낭만주의자 아버지를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당신은 파리로 가서 미술을 하고 싶어했는데 집안 어른들이 막았대요. 나 같으면 그냥 가는데 샌님인 아버지는 못하셨지요. 문제는 꿈을 접으면서 가족도 함께 접었다는 데 있지만."

―궁핍한 유년기를 보내셨군요.

"공무원 월급으로 5남매 키우기도 빠듯했지만, 술을 워낙 좋아해서 돈을 탕진하셨죠. 중학교 때는 나더러 고모부한테 가서 학비를 꿔오래요. 그때부터 내가 아버지를 존경 안 해요."

―수원역에서 신문배달도 하셨다면서요.

"일사후퇴 때 음성으로 피란 갔다가 환도하기 전 수원서 살았어요. 아버지는 당신 혼자 서울시청이 이전한 대구로 가셨으니 장남인 내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지요. 국민학교 6학년 때였나 봐요. 조선일보와 그때 인연을 맺었는데, 남문에서 신문을 받아들면 수원역까지 죽을 힘 다해 뛰는 거예요. '내일 아침 조선일보~' 하면서. 제일 빨리 뛰는 놈이 제일 많이 팔아요. 항상 1등이었는데 어느 날 나보다 더 잘 뛰는 놈이 나타나 관뒀지요. 대신 미군 부대 물건을 떼다 팔았어요.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강해져요. 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시절이 그때예요. 신문 판 돈으로 쌀 한 됫박과 고등어 두 마리 사서 집으로 가는 길이 어찌 그리 신나는지. 어머니와 다섯 식구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요."

―공부는 잘했습니까.

"그럴 리가요(웃음). 세계명작을 국민학교 때 다 뗄 만큼 책을 좋아했는데, 운동을 하면서 공부랑 멀어졌어요. 부끄럼 많고 눈물 많은 성격을 고치려고 중학교 들어가 럭비와 수영, 기계체조를 했어요. 그러다 쌈박질하게 되고. 고3이 됐는데 평균점수가 69점이니 대학에 갈 수가 있나요. 아버지는 학비 댈 생각도 없으셨고. 그래서 마도로스가 되자, 한 거예요. '미아리 5형제'라고 손가락 깨물어 우정을 약속한 친구들이 있는데, 그 애들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었지요."

―어떻게 서울대 음대에 진학했습니까.

"3학년 말에,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내가 독창하는 모습에 감동한 부흥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무조건 음대를 가래요. 내가 한번 뜻을 세우면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데가 있거든요. 돈키호테처럼. 고등학교 졸업한 뒤 중구청에 임시공무원으로 들어가 레슨비를 벌고 2년간 공부해서 대학에 간 거예요.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재학 중이던 1962년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으로 첫 독창회를 합니다.

"학생이 독일 연가곡 전곡을 부른다는 게 화제가 됐지요. 피아노 반주를 동기인 신수정(전 서울대 교수)이 했어요. 예고 시절부터 유명했는데, 오죽하면 아버지가 '노래보다 피아노가 낫더라'고 하시데요(웃음)."
지난달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박인수 백석대 석좌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데뷔 50주년 기념음악회’를 하는 모습. 왼쪽부터 테너 김성준(백석예술대 교수), 박현재(서울대 교수), 박인수, 이상규(나사렛대 교수), 김성진(인제대 교수)다. / 영음예술기획
마리아 칼라스와 라보엠

나이 서른 넘어 미국 줄리아드 음대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박인수의 노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국립오페라단 데뷔 무대인 '마탄의 사수'(1967년)에서 주역을 맡았지만 6개 일간지가 일제히 혹평했다. "평소엔 잘하다가도 본무대에 서면 과욕을 부려요. 메트로폴리탄 오디션에서도 그랬어요. 심사위원들이 '너는 뉴 스타'라고 띄워 주니 마지막 3차에서는 평범하게 불러선 안 된다는 생각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불렀다가 망했지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니 이렇게 늙어버렸더라고요."

―'마탄의 사수'에서 실패한 뒤 여러 생업을 전전하셨더군요.

"상도동 언덕에서 간장장사도 하고, 동생이랑 광릉에서 돼지 치고 양송이도 키웠는데 다 말아먹었지요. 덕수궁 돌담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밑천 2만원을 빌려 신촌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어요. 토끼도 굽고 참새도 구워 제법 수입도 괜찮았고. 참새 굽고 녹두빈대떡 부치는 법을 손님들한테 배웠지요. 참새는 간장소스를 발라가며 앞뒤로 뭉근히 구워야 하고, 빈대떡은 녹두에 쌀가루를 섞어야 바삭하게 잘 구워진다는 걸 그때 알았죠. 얼마 안 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1969년 '라보엠'으로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돈을 빌려줬던 그 친구가 지금 생각하니 대단한 후원자예요. 포장마차 들어먹고 나니, 너는 천생 음악 해야 할 팔자라며 통장을 하나 건넵디다. 거기 들어 있던 75만원으로 젊은 성악가들 모아 오페라 '라보엠'을 성공시켰지요. 이후로 미국에서 초청이 왔고 줄리아드에도 가게 됐고. 그때도 돈키호테처럼 무모해서, 내가 미국에서 뭘 새로 배우겠다는 생각은 1%도 안 했어요. 내 목소리가 이미 세계적이라고 자부했으니까. 하하!"

―줄리아드에서 마리아 칼라스에게 1년간 배우셨지요?

"그녀가 날 굉장히 좋아했어요. '라보엠' 주역으로도 나를 발탁했고. 칼라스의 힘은 음악에 대한 진실성이죠. 그녀가 파리로 떠난 뒤 나도 맨해튼 음대로 옮겼어요. 졸업한 뒤 83년까지 뉴욕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한 건 축복이었어요.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했을 때 뉴욕타임스가 나를 '영웅적인 테너'라고 호평했지요."

―서울대의 교수 초빙을 세 번이나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 무대가 많은데 굳이 들어올 이유가 없지요. 교수 될 생각은 꿈에도 없어서 학위도 안 받았던 걸요. 마지막 요청을 나이 45세에 받았는데, 마침 한국에 나와 있던 아내가 국제전화로 설득하더군요. 한국에 나오면 진짜 설렁탕, 진짜 짜장면 먹을 수 있지 않느냐며. 그래서 나왔어요."

나는 조선의 한량이다!

인생 최고의 스캔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박인수가 주저 없이 답했다. "여자지 뭐, 하하!" 실제로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을 때 당대 최고 여배우와 염문설에 휩싸였다.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주간지들마다 난리를 치데요. 연주자와 팬으로 몇번 어울린 걸 가지고. 아무튼 파장이 너무 커서 뉴욕으로 도망치다시피 했지요."

―역대 대통령들과도 인연이 있지요?

"YS가 날 무척 좋아했는데, 대선 후보일 때 손명순 여사가 주최한 자선음악회에서 노래했다고 선거법 위반으로 걸려들어 갈 뻔했지요. 노태우 대통령은 낭만주의자예요. 내가 부르는 '박연폭포'를 좋아해서 청와대에서 독창회까지 했다고요. DJ와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지요. 군부정권 시절 뉴욕으로 강연회를 온다는데 나더러 노래를 불러 달래요. 뉴욕시내 전봇대에 DJ와 박인수 사진이 박힌 홍보물이 나붙었지요. 뉴욕 영사관에 파견돼 있던 안기부 직원한테 전화가 오더군요. '나중에 한국 돌아가실 건가요?'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그런데 거기서 노래를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해요. 그래서 물었지요. '공연취소로 발생할 정치적 덤터기를 당신들이 쓸 거냐'고. 그랬더니 '선구자'만은 부르지 말래요. 어차피 내가 DJ를 선구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었죠."

―정치도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

"능력은 있는데 취미가 없죠. 하하!"

―박인수를 '한국의 플라시도 도밍고'라고 합니다.

"도밍고가 존 덴버와 '퍼햅스 러브(Perhaps Love)'를 불렀다고 날 거기다 비유하는데, 약간의 모욕감을 느끼죠. 도밍고는 녹음가수예요. 얼굴만 잘생긴…. 파바로티가 100배 낫지요. 내가 제일 좋아하고 닮고 싶은 가수는 카루소예요."

―그런데 테너 박인수에 대한 우리 클래식계의 평은 그리 후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박인수의 진가를 못 본다고 해야 할까. 뉴욕에서 활약할 땐 '유 아 스페셜(You are special)', '퍼스트 클래스 보이스(first class voice)'란 평을 들었다고요. 소리만 잘 내는 성악가가 아니라 거기에 마음,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뜻이지요. 이상하게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기 때문이죠. 음악은 지식이 아니에요. 지루하면 박수쳐선 안돼요."

―박인수가 '진짜'라고 인정하는 연주자는 누구입니까.

"카루소, 호로비츠, 랑랑. 그들의 연주는 과녁, 10점짜리 흑점을 단박에 뚫지요. 테크닉? 결국은 소리예요. 가슴을 단박에 뚫고 들어오는 맑고 영롱한 소리."

―부친이 적극 밀어주셨다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을까요?

"네 살 때부터 돈을 처들여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세계적인 연주자가 된다면 그것처럼 불공평한 게 어디 있어요. 될 놈이 되지요. 더군다나 성악은."

인생은 무엇입니까.

"잃으면 얻고, 얻으면 잃지요. 살아보니 좋다고 방방 뛸 일도 아니고, 크게 절망할 일도 아니더군요. 나는 국립오페라단을 잃었지만 수많은 대중을 얻었어요. 하지만 돈과 인기를 얻고 나서 목소리를 잃었지요. 인생이 그런 거예요."

―다시 태어나도 노래를 하겠습니까.

"소리의 완성. 국악인들이 말하는 '득음'이란 걸 꼭 해보고 싶어요."

―대단한 미식가라 들었습니다.

"내가 인정하는 맛집의 3대 원칙이 있어요. 반드시 우리 음식으로 집이 허름할 것, 50세 넘은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간을 볼 것, 값이 저렴할 것. 한우를 먹는데 1인당 20만원을 내는 건 미친 짓이죠."

―맛집 한곳만 알려주신다면.

"서울대 총장이라고 해도 공짜로는 안 가르쳐줘요."

―박인수는 한량입니까.

"그럼요. 주색잡기에 두루 능하니 한량 중에 한량이지요. 하하하!"

 

-조선일보, 201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