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달 착륙 우주인, 천상의 비행 떠나다
닐 암스트롱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별세… 해군 조종사로 6·25 참전… 우주사업 축소한 오바마 비판
43년 전 인류 최초로 달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디며 우주 개척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했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82)이 심장병 합병증으로 영면(永眠)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암스트롱의 가족은 25일 "(암스트롱이) 관상동맥 협착 증세로 이달 초 심장 수술을 받았으나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고 AP가 보도했다. 가족들은 암스트롱의 사망 시각과 장소는 밝히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오하이오주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은 퍼듀대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해군 비행사로 입대해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다.
해군을 제대하고 미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갔으며, 1962년 제2차 우주비행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미국이 준비 중이던 달 탐사 프로젝트팀의 일원이 됐다. NASA 고속 비행 기지에서 900회 이상 시험 비행을 거쳤고, 1966년 제미니 8호 첫 우주비행에 성공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선장(船長) 암스트롱은 동료 우주인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와 착륙선 '이글'호를 타고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내려 미국 국기를 꽂았다. 그가 남긴 역사적 첫발은 우주항공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를 두고 소련(현 러시아)과 경쟁하던 미국에 승리를 안겨줬다. 당시 NASA와 교신하던 암스트롱이 "심장 박동수가 1분에 150회에 달하고 있다"고 한 말 등이 언론에 크게 보도될 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이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와 함께 달 표면‘고요의 바다’에 걸어나가 성조기를 꽂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아폴로 11호 우주선 선장석의 닐 암스트롱. /AP·연합뉴스
우주 영웅이 타계했다는 소식에 미국은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우주탐험 사업 축소로 암스트롱과 불편한 관계였던 오바마 대통령은 "(아내) 미셸과 나는 암스트롱 별세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애도했으며, 그와 함께 우주선에 탔던 에드윈은 "달 착륙 50주년 기념식에 함께 참여하길 희망했지만 애석하게도 불가능한 일이 됐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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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올드린·콜린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는 무사히 달 착륙선을 떼어냈다. 그는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달에서 임무를 끝내고 오기까지 28시간 내내 달 궤도를 돌았다. 사령선이 달 뒷면으로 들어가는 40분 동안은 모든 교신이 끊겼다. "나는 혼자다. 달 저편에 지구 30억하고도 두 명(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있지만 이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신(神)과 나만 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뼈저린 고독"이라고 일컫는 외로움을 맛봤다.
▶콜린스는 달 상공 110㎞까지 가고도 달을 밟지 못했다. 그는 아폴로 팀에 뽑혔을 때 달에 내리는 착륙선 조종을 맡았다. 그러다 한 서열 높은 사령선 조종사가 다른 팀으로 가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사령선 조종은 우주 비행 경험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운명의 엇갈림에 그는 "낙담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진 채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장과 국무부 간부를 지냈다.
▶올드린은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에 걸려 약물치료를 받았다. 알코올중독으로 병원 신세도 졌다. 그러나 다 털고 일어나 전미우주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로켓 설계 회사와 비영리 재단을 세웠다. 책도 많이 쓰고 세계를 돌며 우주개발 강연을 해 왔다. 노벨상 수상자가 후보에 그친 사람보다 평균 2년 더 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카데미상을 받거나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에 오른 사람이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연구도 있다.
▶아폴로 11호 동갑내기 우주인 셋 중에 암스트롱이 가장 먼저 떠났다. 그는 교수와 기업 회장을 지낸 뒤 만년에 숨다시피 살았다. 정치권 구애를 뿌리쳤고 자기 사인이 거액에 팔리자 사인을 중단했다. 단골 이발사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자 소송을 낼 만큼 꼬장꼬장했다. 그는 말수 적고 겸손하게 살다 갔다. 몇 년 전 어느 대기업이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내고 '2등'의 예로 올드린을 들었다. 정작 올드린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삶과 운명이란 등수로 매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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