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연기인생 40년, 고두심

하마사 2012. 8. 19. 16:14

 

[Why] [김윤덕의 사람人] 연기인생 40년, 댄싱퀸으로 연기 변신 고두심

몸뻬 벗은 국민엄마 거침없이 하이힐~
"다시 태어나도 배우… 그땐 할리우드 가서 베드신 좀 찍어야죠"

‘은발의 무희▕로 분장한 고두심이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고인 물이 되기 싫어 연극에 도전한다고 했다. ‘춤추는 고두심’은‘억척엄마 고두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성형주 기자
요즘 고두심(61)의 발바닥에선 매일 불이 난다. 경쾌한 스윙에서 관능의 탱고, 낭만적인 왈츠를 거쳐 익살스러운 차차차까지 여섯 가지 스텝을 한 무대에서 밟느라 두 발이 혹사당한다. 트레이드 마크인 '몸뻬' 대신 잠자리 날개처럼 날아갈 듯 가벼운 시폰 드레스를 입었다. '국민엄마'의 변신에 객석에선 탄성이 쏟아진다. 고두심이 너스레를 떤다. "춤 배운다고 3㎏이 빠졌어요. 얼마나 날렵해졌게요.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지요. 하하!"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은 고두심이 연극무대에 섰다. 그것도 춤을 추면서다. 2001년 미국에서 초연된 2인극 '댄스 레슨'(9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이다. 연극 '친정엄마'로 대박을 터트린 지 5년 만. 임파선암 선고를 받은 72세의 여성 릴리가 게이 강사를 만나 춤을 배워가면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그녀로선 새로운 도전이다. "내가 대사에선 실수를 안 하는데, 외국 작품이라 그런지 대사가 입에 척척 안 붙어서 애먹었어요. 십계명 한번 위반하지 않고 평생 목사 '사모'로 살아온 미국 할머니 역이니(웃음)."

12일,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고두심과 마주했다. 평소 말수 적고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한번 마음을 여니 거침이 없었다. 에둘러 말할 줄 모르고, 밥상 앞에서 싸이의 "오빠는 강남스따~일"을 흉내 낼 만큼 장난기도 그득했다. "어떤 감독이 내 장난기를 알아보고 시트콤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요. 어려울 건 또 뭐냐, 하고 코웃음을 쳤지요."

춤추는 '국민엄마'

―의외로 나이든 남성 관객들이 많다.

"공연이 중반부로 갈수록 남자분들이 는다. TV에서 몸뻬 입은 모습만 보다가 옆선 트인 드레스를 입고 나오니 좋으신가 보다(웃음)."

―대사가 엄청 많던데 어떻게 다 외우셨나.

"초반에 고생 좀 했지. '친정엄마'야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 하면서 곱씹었던 대사들이 워낙 많으니까먹어도 대충 구겨넣으면 되는데, 이건 내가 놓쳤다 하면 상대방이 헤매니까 엄청 긴장되더라."

―'친정엄마'에 이어 CJ E&M이 '고두심 프로젝트2'로 준비한 연극이다. 왜 이 작품을 선택했나.

"안 해본 거라. 사람들이 고두심이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배역을 해보고 싶었다. 박정자 선배가 늘 하던 엄마 역이 아니라 좋다고, 잘했다고 하더라."

―학창시절 고전무용 했던 게 도움이 됐겠다.

"그게 언제적인데. 그리고 우리 춤과는 스텝이나 리듬이 완전히 다르니까 처음 배우는 거나 다름없었다. 6개월 동안 매일 7시간씩 연습했다. 내가 근성은 좀 있다(웃음)."

―평일에도 객석이 거의 들어찬다.

"딸이 먼저 보고 다시 부모님 모셔오고 그러더라. 그래도 객석 빈자리가 보이면 너무 아깝다. 내가 해서가 아니라 참 좋은 작품이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다."

―작품에 주옥같은 대사들이 많더라.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대사가 있는지.

"'늙으면 사라지기 시작해. 식당 종업원도 날 쳐다보지 않지. 그래도 누구와 손잡고 있으면 분명히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잖아….' 나도 늙어가지만, 정말 서글퍼지는 대사다."

―드라마 출연하기도 바쁠 텐데 연극 무대엔 왜 오르시나.

"고인 물 되기 싫어서. 연극엔 편집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무섭지만 그만큼 짜릿하다. 관객들이 내 호흡에 빨려들어오고 있다는 걸 현장에서 느끼니까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한번 하고 나면 연기자로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만큼 충만해진다."

연극‘댄스레슨’에서 춤추는 게이 강사 역의 지현준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고두심 /CJ 제공

심장을 고동치게 하려면

―데뷔 40주년이다. 30주년 때 한 인터뷰를 보니 '앞으로 길어야 10년 하겠지요' 했더라.

"하하! 그랬었나? 그럼 앞으로 또 10년이라고 해야겠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다. 내가 나를 봐도 대단하다 싶을 때가 있다."

―산악인 엄홍길씨가 8000m 히말라야 같은 연예계에서 40년을 버틴 게 대단하다고 칭송했던데.

"어느 바닥, 어떤 직업이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연예계는 유혹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많아서 더 어려운 것 같다. 배우를 상품으로만 보고, 꽃으로만 보고 손짓하는 것. 그럴 땐 '뭐요?'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한다. 줏대를 가지고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대견하다(웃음)."

―'고두심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배우들이 많다.

"그런 게 정말 무섭지. 그래서 비틀거리지도 못하고 가던 길 그냥 간다."

―한 번도 받기 힘든 연기대상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 연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나.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남의 심장을 고동치게 해야 하는데, 그게 대충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철저히 준비를 하고 무장하고 또 무장해야지. 연기 이전에 내 삶이 반듯하게 서 있고 당당하게 서 있어야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물감으로 칠해도 다양한 색깔의 연기가 나오게끔 늘 가꿔야 한다. 태교하는 여자처럼 좋은 것, 긍정적인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타고나는 게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나.

"모든 배우가 그렇지만, 감수성이 좋은 편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누군가의 이야기만 듣고도 내 것으로 금세 체득이 된다."

―연기로만 40년을 달려왔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몸이 아프다. 꼬닥꼬닥 연기밖에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노는 방법을 모른다. 여의도에 친구가 살았는데 방송사 가다가 시간이 잠깐 생기면 친구 집에 가서 얼굴 보고 그랬다. 매번 그런 식이니까 하루는 친구가 막 화를 내더라. 내가 자기한테 자투리 시간만 준다는 거지. 나이 들면 너랑 안 놀아준다며 전화를 팍 끊더라고. 큰일났다 싶어 이후로 혼자 노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웃음). 춤도 그중 하나가 됐다."

―연예인들도 친하게 지내는 그룹들이 있지 않나.
“나는 그게 안 된다. 몰려다닌다고 해서 심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마음으로 서로 응원해주는 선후배는 있다.”

정윤희? 부럽지 않았다

제주 고씨로, 제주에서 나고 자란 고두심은 농부의 딸이다. 남태평양에서 물물교역을 해 번 돈으로 밭을 넓게 사서 일군 부모 덕에 배는 곯지 않았다. 배우가 되려는 꿈은 여고시절에 품었다. “우리 학교에 신성일씨가 왔었어요. 정말 멋있더라고. 내가 졸업만 하면 기필코 제주를 뜨리라 다짐했지요.” 서울서 공부하는 오빠 밥해준다는 핑계를 대고 상경, 작은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MBC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해가 1972년이다. 초반엔 삐걱거렸다. “우리 아버지도 딸들한테는 담배 심부름을 안 시키는데, 방송사에서는 여자한테 별의별 심부름을 다 시키더라고요. 이런 거 하려고 탤런트 됐나 싶어서 관둬버렸지요.” 2년 뒤 MBC에서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만큼 고두심은 자존심 강하고 보수적인 여자였다.

―천하의 고두심도 첫 배역이 주어졌을 때는 엄청 떨었다더라.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대본 연습실에 뺑 둘러앉았는데 어찌나 떨리는지 꼭 죽을 것 같더라. 내 차례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성옥 선생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식으로 해도 되니까 목소리나 들어보자는데도 안 됐다. 결국 연출자에게 가서 대본을 돌려준 뒤 화장실에 가서 두 다리 뻗고 울었지.”

―고두심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건 ‘전원일기’ 김 회장댁 맏며느리 역을 했을 때다.

“그전에 ‘갈대’라는 작품이 있었다. 김혜자, 이정길씨와 삼각관계로 가는 드라마인데, 내가 이정길씨 부인이고 혜자 언니가 옛날 애인으로 나온다. 그때 정숙한 부인 역할을 잘해냈더니, 나이는 어린데 무게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싹이 보인다고 하더라.”

―그래도 대부분 조연이었다. 정윤희-유지인-장미희 트로이카 배우들이 부러웠을 것 같다.

“히로인이라는 게 젊어서는 좋을지 몰라도 평생을 직업 삼아 배우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어머니로 변신할 때 오래 걸리지. 그런 점에서 난 해피한 경우다.”

배우 꿈을 처음 품은 여고생 시절(왼쪽)의 고두심. 40년 동안 고두심은 늘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드라마‘덕이’(2000)에선 굳건히 가족을 지키는 강인한 어머니로.

―22년간 장수한 ‘전원일기’가 고두심 연기의 토대라면, 첫 연기대상을 안겨준 ‘사랑의 굴레’는 고두심을 스타급 배우로 키운 작품이다.

“아직도 ‘잘났어 정말’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더라. 원래 김미숙이 주인공이고 나는 바람피우는 남편 노주현에게 앙앙대는 아내인데, 김미숙이 그 드라마에 나왔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만큼 고두심의 존재감이 컸다. 하하!”

―고두심의 대표작을 ‘춤추는 가얏고’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국악 명인의 일대기로, 배우라면 누구나 탐내는 배역이었다. 창(唱)까지 해야 한다고 해서 자신 없어 못하겠다고 했더니, 장수봉 감독이 ‘당신 아니면 안 된다’고 윽박질러서 엄청 으쓱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에겐 최고의 상찬 아닌가.”

―‘한국의 어머니’ 상으로 김혜자를 제치고 첫손에 꼽혔더라.

“엄마 역할만 50편 했나 보다. 그 절반이 남편 없이 리어카 끌고 자식 대여섯명 키우는 억척엄마였다. 혜자언니는 서구적인 마스크에 난초 같고 여성적이라 엄마 역할을 해도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나는 무능한 남편 대신 자식들 배 곯지 않게 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자고. 고두심은 자식을 발로 키워도 잘 키우겠다 싶은 믿음이 든다더라(웃음).”

―개인적으로는 영화 ‘인어공주’의 때밀이 엄마 연기가 좋았다. 아무 데서나 가래침을탁탁 뱉는.

“저렇게 우악스럽고 무식한 엄마에게도 꽃처럼 예뻤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지. 사랑이고 뭐고 그저 절박해서 사는 거다. 나는 김정수 작가의 ‘한강수타령’도 좋았다. 생선장수 엄마가 딸들 한번 예쁘게 키워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촬영하면서 내내 울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바로 그런 어머니들이다.”

―무조건 헌신하는 어머니의 시대는 아니지 않나.

“‘전원일기’ 종영한 게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시청자들이 고두심 같은 며느리가 요즘 어디 있냐고, 지금 우리한테 고두심처럼 살라는 거냐고 항의전화를 했었다. 오히려 둘째 며느리 박순천을 좋아했지. 할 말은 하는 지혜롭고 현명한 엄마!”

―‘국민엄마’ 하느라 정작 자기 자식들에겐 좋은 엄마가 못 됐다고 하더라.

“물만 주고 키웠다(웃음). 준비물 사러 아이들 손을 잡고 문방구에 한번 가본 적이 없으니. 아들녀석이 40도로 열이 펄펄 끓는데도 대문 밖을 나서면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기적인 엄마였다.”

―그래도 잘 자랐다고 하더라.

“딸아이 유학 보내려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들이 날 붙들고 딸 잘 키웠다고, 어디다 내놔도 틀림없다고 칭찬하시더라. 그날 비가 왔으면 콧속에 비 좀 들어가겠다 싶을 만큼 난생처음 콧대 한번 세워봤다. 연기대상도 우리 집에선 별로 안 쳐준다. 트로피들이 다 어디 가 있는지도 모른다. 자식이 주는 기쁨엔 비할 것이 없더라. 딸애는 얼마 전 쌍둥이 엄마가 됐다.”

내가 무척 고루하다

―육영수 여사 연기도 하셨다.

“‘격동 30년’에서 육 여사 역할을 했지. 학처럼 우아한 자태에 사슴 같은 목을 지닌 육 여사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니 부담이 컸다. 그래도 어느 공식석상에서 김종필씨를 만났는데 내 목소리가 육 여사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어떻게 내느냐고 물어보시더라. 그분 보시기엔 괜찮았나 보다.”

―윤여정에게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한 ‘돈의 맛’의 팜므파탈 배역이 고두심에게 들어왔다면?

“솔직히 자신 없다. 감독들이 ‘너도 배우냐’ 하면서 비웃겠지만 그래도 못한다. ‘애마부인’을 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배우라는 직업으로는 이런 장벽도 터버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미원 CF를 17년이나 했다.

“우리 아들 2개월 됐을 때부터 시작했으니 그걸로 아들 공부 다 시킨 셈이다. 실은 배우들이 CF를 한다는 것 자체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광고를 안 하면 배우생활이 유지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하지만. 그래서 계약서 쓸 때마다 ‘전무님도 집에서 드시죠?’ 묻고, 회사 경비하시는 분께도 묻는다(웃음).”

―화장품 모델도 잠깐 하셨더라.

“피어리스를 6개월 했다. 중년이 되고도 몇 번 화장품 광고가 들어왔는데 내가 안 한다. 하루종일 눕혀놓고 화장을 하는데 눈이 충혈되어 너무 힘들더라. 누워 있는 게 싫어서 마사지도 안 받는 성격인데 죽겠더라고.”

―배우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외모 관리에 쓰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근사한 남자랑 사랑하다 죽는 역할을 못했나 보다(웃음).”

―대선주자들 다 나오는 TV프로에 출연해서 이런저런 루머에 대해 답하시더라.

“감추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재미삼아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사실 화가 났다. ‘그런 거 물어볼 거면 갈게요’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우 고두심에 대해 할 얘기가 그렇게 없나?”

―이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대범하게 나오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척 아파하시더라. 이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정말 고루하다. 지금도 내 일생 최대의 오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내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인어공주’(2004)에선 우악스러운 때밀이 엄마(왼쪽)로, 그리고 연극‘댄스레슨’(2012)에선 춤을 통해‘아픔’을 치유하는 노파로….

―배우로서 쌓아온 좋은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대중을 의식할 틈이 어디 있나. 부모님께 죄송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정신이 멍해서는 한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팬들이 알고 실망한 건 훨씬 뒤의 일이다. 후폭풍이었지. 어떤 할머니가 전화를 하셔서 실망했다고, 고두심 때문에 TV 봤는데 이제부턴 안 보겠다며 화를 내시더라. 반면에 여수에 사는 어떤 여자분은 충분히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을 거라며 격려해주셨다. 힘들겠지만 엄마가 바로 서야 아이들이 바로 선다며 갓김치를 해마다 보내오신다. 인연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하면서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는데 넓은 치마로 덮는 지혜, 인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본다.”

―작품성보다 감독의 인간성을 보고 드라마를 고른다던데, 좀 의외다.

“솔직히 드라마는 거기서 거기다. 사람 사는 얘기가 거기서 거기이듯. 6개월간 매일 보며 일해야 하는데 사람이 싫으면 안 되니까 인간성부터 보는 거다. 내가 좀 단순하다.”

정치는 무슨…

―소셜테이너 원조다. 두심장학회가 있고, 김만덕기념사업회, 어린이재단 등 여성과 어린이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사랑을 받고 사는 직업이니 그 사랑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건 문제 있다.”

―의리 있는 배우로 통하더라. 무명의 후배들 경조사는 반드시 챙긴다더라.

“잘나가는 배우들은 내가 안 가도 많이들 오니까. 내가 가서 도움 되는 자리에 가려고 한다. 배우들 뒤에서 수고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붐 마이크 들고 조명 잡는 사람들이 내 눈에 와 닿는다. 그들이 없으면 배우도 없는 거다.”

―의리 있고 정 많은 게 어린 시절 대가족 속에서 자란 덕분일까.

“4대가 농사지으며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일자무식의 여인이었지만, 항상 ‘너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살라’고 가르치셨다.”

―2008년인가, 민주당에서 비례대표로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다더라.

“아휴, 정치는 무슨.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니 정치하고 싶어하는 줄 아는데 천만에다. 그리고 나는 어떤 분야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정치에 나서는 게 우습다. 정치도 연기처럼 공부가 필요한 거 아닌가?”

―어떤 대선주자가 괜찮아 보이나.

“그건 모르겠고, 다들 거짓말을 너무 잘하더라. 연기하듯 말이지. 무슨 대본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 내세우지 말고, 자기 이름 석 자 더럽히지 않는, 명예로운 정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벽녘 촬영을 나가다 보면 그 이른 시간에 직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본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펑펑 솟는 거 보면서 그래, 바로 저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지켜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순이 넘었다. 나이 듦, 서글플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가라 하면 싫다. 젊음, 부럽지 않다. 나이 드니 더 많은 걸 관조하게 되고 안목도 넓어지고 치마폭도 커져서 좋다. 사실 나이 들어서 슬픈 게 아니고,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면서 거칠어지는 게 슬프다. 어느 시어머니가 김치를 담가서 아들 집에 찾아갔더니 경비실에 맡기고 가라고 했다는 며느리 얘기는 믿고 싶지도 않다. 염치가 없는 시대다.”

―매일 새벽 북한산을 오른다더라.

“나는 나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의무가 있다.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한겨울 바람소리가 문풍지에 휘잉하고 부딪쳐도 발로 이불을 뻥 차고 일어선다. 땀 뻘뻘 흘리면서 오르는 산행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다. 아무 생각 안 한다. 새소리, 물소리, 꽃향기, 흙냄새에 취해 그냥 걷는다. 눈길을 뽀드득 밟으면서 새벽길 걷는 맛은 기가 막히지.”

―40년 연기인생의 원동력은 뭘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오죽하면 내가 엄마와 손잡고 바닷가를 거닐며 그랬다. ‘엄마, 우리가 내생에 또 만날 건데, 엄마 역할이 너무 힘드니까 그땐 내가 엄마 할 게, 엄마가 내 딸로 나와.’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 손을 힘주어 잡으시더라.”

―제주라는 독특한 토양도 배우 고두심을 만든 힘이었을 것 같다.

“제주가 얼마나 척박한 땅인가. 종일 자갈을 긁어내야 뭐라도 심을 수 있다. 엄마랑 콩밭 한번 맬라치면 밭에서 올라오는 지열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지금껏 산다.”

―고두심(高斗心)은 본명이다. 예명을 만들지 않았다.

“내가 싫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 안 된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을까.

“당연히! 그런데 그때는 할리우드로 가볼 생각이다. 나도 침대 위에서 연기도 좀 해보고, 출연료 한번 받으면 2~3년은 놀아도 되는 그런 세계적인 배우 한번 되어볼란다(웃음).”

-조선일보, 2012/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