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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엑스포 개봉박두(開封迫頭)…'현장의 老지휘관' 강동석

하마사 2012. 5. 8. 14:19

 

"나는 수석 흥행사… 스스로 불타지 않으면 남을 불태울 수 없어"
강동석 曰
"술과 밥은 얻어먹어도 좋다
명절 때 봉투는 세 번 사양해라 그러면 탈이 안 난다"
박지원 曰
"그 놈의 사장 대단해
내가 청탁하는데도 단번에 거절하더라"

 

 

"직원들 앞에서 취임 일성으로 '나는 수석 흥행사다'라고 했어요. '근래의 수작(秀作)이고 문학성과 영상미가 뛰어나고…' 하는 영화평을 받아본들, 일주일 만에 관객이 뚝 끊기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 해도 흥행(興行)이 본질이죠."

컨테이너 숙식을 하면서 인천공항을 지었던 전설만으로 그는 거인(巨人)이고, 부하 직원들을 눈빛으로 제압하고 버럭 호통에 떨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강동석(74) 여수엑스포 조직위원장은 왜소한 노신사였다. 사무실도 조립식 건물 2층에 있었다.

―위원장은 딱딱한 분으로 들었는데 '흥행사'를 자처합니까?

"전 꼼꼼해도 딱딱한 사람은 아닙니다. 박람회가 재미있어야 이 먼 데까지 내려오지. 와서 잘 보고 잘 먹고 잘 놀았다는 말이 나와야지. 안 그렇습니까?"

―해양 박람회답게 잘 짓고 신기한 걸 많이 전시했다고 자랑해야지요.

"그건 기본이고요, 제 목표는 지금껏 가장 재미있는 엑스포입니다. 2009년 놀고 있을 때 운전 중에 국토부 장관의 전화를 받고 엉겁결에 맡았지요. 엑스포가 여수에서 하는 줄만 알았지, 몇 월에 하는 줄 몰랐어요. 맡고 보니 큰일 났다 싶었어요."

―큰일 날 게 무엇이 있습니까?

"행사 기간이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로 되어 있어요. 누가 이렇게 날짜를 잡았나 했어요. 이 중 7월 한 달이 우기(雨期)입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구경하러 오겠습니까. 그전에 추진해왔던 계획을 뒤엎고 전면 수정했어요. 나중에 감사(監査)받을까 봐 직원들은 잘 안 움직였어요. 본질보다 서류 꾸미는 데 시간이 더 걸려요. 그럴 때마다 '내가 모든 걸 책임진다. 시간이 없다. 우리에겐 지금 행동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계획을 바꾸었길래?

"우기에 대비하는 거죠. 장마철에 손님을 끌려면 정말 미치도록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동석 위원장은 "여수 바다 위에서 비와 태풍 맞으며 한판 놀아보자"고 말했다./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그래도 비 맞으면서 구경은 안 합니다.

"아예 바다에 무대를 만들었어요. 1000명까지 올라가서 놀 수 있어요. 홍익대 앞의 인디밴드 등을 초청합니다. 야간 조명 아래 젊은이들이 머리 산발하고 한번 춤추라는 거죠. '여수 바다 위에 떠서 비 맞고 태풍 맞으며 놀아보자. 이런 경험을 언제 해보느냐'는 소문이 퍼지도록 할 겁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 해상 무대에서 'K-팝' 공연도 엽니다. 한 번 초청하는 데 3억원쯤 든대요. 대기업들에 '우리가 무대를 그냥 빌려줄 테니 이름을 걸고 스폰서 해라'고 했어요. 관객들은 입장권(3만3천원) 한 장으로 전시관·공연·아쿠아리움을 다 볼 수 있어요."

―전문가들의 코치를 받았습니까?

"제 머리에서 나온 거죠. 오로지 이 생각뿐이니까요. '헤븐 헬프스 도우즈 후 헬프 뎀셀브즈(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시장 입장도 30분 이상 안 기다리게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줄 선 관람객들을 위해 '막간(幕間) 마술 공연'도 펼칩니다. 지루할 틈을 안 주죠."

―연세가 있는데 어떻게 인디밴드나 'K-팝까지 압니까?

"중학교 때부터 신문을 정독해왔어요. 신문 보면서 수첩에 메모하고 스크랩해온 게 수십 권이 넘습니다. (사무실 진열장에서 스크랩을 꺼내 보여주며) 아이디어가 여기에 다 들어 있어요. 나는 시 암송도 좋아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간부회의를 할 때면 각자 애송시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합니다. 회의 마지막에 돌아가면서 시 낭송을 합니다."

―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고 헤어스타일도 여전히 공무원 같은데, 좀 튀는 편이었습니까?

"전혀 안 그렇습니다. 모든 상사가 제가 매너가 좋다고 '술상무'로 데리고 다녔어요. 아무리 몸이 부서져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다만 남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제가 정감적인 면은 있습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신상 얘기를 했다.

"제 학력이 경희대 1학년 중퇴입니다. 가세가 형편없었고, 그때 폐결핵으로 3년을 앓았어요. 그 뒤 행시를 봐서 공무원이 됐어요. 전라도 출신인 제가 모셨던 상사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어요. 이분들이 나를 이끌어줬어요. 당시 교통부에서 하나뿐인 1급 자리인 기획관리실장을 5년4개월이나 하면서, 장관을 여섯 분이나 모셨어요."

―통상 장관이 바뀌면 자기 사람을 기획관리실장으로 교체하는데.

"신임 장관이 올 때마다 '제가 너무 한자리에 오래 있었습니다. 새로운 분위기로 일할 수 있도록…' 하면, '나하고는 일하기 싫다 말이야?' 합니다. 그게 저에 대한 재신임이었지요. 해운항만청장을 끝으로 50대 중반에 공직을 떠났어요. 조그만 산하기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인천공항' 건설을 맡게 된 겁니다."

―인천공항 건설 얘기가 나왔으니,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오명 건교부 장관이 제안했는데, '제가 건설의 건 자를 압니까, 공항의 공 자를 압니까' 하며 한사코 거절했어요. 한 달 뒤에 또 말씀을 하셨어요. 5조6000억원짜리 프로젝트였어요. '최대 이권 사업'이기도 합니다. 나는 양심대로 하겠지만 과연 외압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당시 2년간 컨테이너에서 숙식했지요. 부하 직원들에게 본을 보여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까?

"거기서 환갑(還甲)을 맞았어요. 직원들에게 '나 스스로 불타지 않으면 남을 불태울 수 없다. 우리 함께 연소(燃燒)하자'고 했어요. 내가 반미치광이처럼 하니까…."

―직원 입장에는 굉장히 어려운 보스를 만난 겁니다.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직원들도 같이 신나게 했어요. 문제는 리더만 잘하면 돼요. 어떤 조직에 문제가 있다면 리더가 방향 설정을 잘못 했거나 비양심적이거나 한 겁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돈만 받지 마라. 업무에 대해서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어요. 얼마나 큰 이권이 걸린 줄 압니까. 하도급 자체가 몇 백억원짜리입니다."

―'최대 이권 사업'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군요.

"직원들이 업자들에게 돈을 받으면 나도 불명예스럽게 물러나는 겁니다. 나는 '업자들에게 술과 밥은 얻어먹어도 좋다. 명절 휴가 때 봉투를 주면 세 번쯤 사양해라. 돈의 부피를 보면 느낌이 오지 않느냐. 50만원 이하면 받아라. 그러면 뒤탈이 없다'고 했어요."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꼭 돈 준 업자들이 돈 줬다고 사정기관에 붑니다. 인천지검 검사장이 바뀔 때마다 인천공항에서 큰 건(件)을 잡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한 명도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관 내 돔스크린 영상관.
―위원장은 공무원 시절에도 청탁을 안 받았나요?

"저라고 왜 안 받겠어요.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을 뿐이죠."

―그런데 인천공항을 지을 때는 왜 청탁 사절이었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잘못하면 나를 추천한 분도 같이 죽는다. 조금이라도 그분께 누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본인의 그런 의지대로 버틸 수 있던가요?

"저는 김영삼 정부 때 임명됐는데 정권이 바뀌자, 관광공사 사장이 '좀 만나자'고 했어요. '내가 워낙 바빠 서울까지 못 간다. 용무가 있으면 오라'고 했어요.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분이 양주를 사 갖고 와서 '면세점에 관광공사를 입점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경쟁입찰 원칙이다'고 거절했어요. 그러자 박지원 문화부장관으로부터 '관광공사를 도와주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찾아뵙고 설명하겠다고 하니, '올 필요도 없어'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박지원 장관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된 뒤 '그놈의 사장 대단해. 내가 공적으로 청탁하는데도 단번에 거절하더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유임이 됐어요."

인천공항 건설과 개항(開港)에 그는 7년 7개월을 보냈다. 그 뒤 노무현 정권에서 건교부 장관을 지냈다. 다시 이명박 정부에서 여수엑스포를 현장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는 못 말릴 정도로 열심히 말했고, 화제는 늘 '엑스포 흥행' 쪽으로 돌렸다.

"축제나 행사장에 가면 막상 먹을 것이 없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그래서 전국에서 제일 잘하는 설렁탕집, 짜장면집, 비빔밥집 등을 찾아내 유치했어요. 음식점마다 여러 메뉴를 못 팔게 합니다. 짜장면집은 짜장면, 비빔밥집은 비빔밥만 팝니다. 이러면 회전율이 빠르지요. 우리가 시식을 해보고 가격도 정해줬어요. 임대료를 받지 않는 조건입니다. 서울에서 유명한 짜장면집인데 7000원 받는 걸 여기서는 5000원 받게 했어요."

―임대료 수익이 115억원으로 잡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걸 포기한 겁니까?

"그러면 나중에 감사에 걸리니, 임대료 대신 영업이익을 일정 비율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여수엑스포에서는 음식에 대해 말이 안 나오게 할 겁니다. 롯데 빙과류가 입점할 때도 '정가의 70%에 팔고 브랜드 인기 순위 10위 안의 제품만 갖다 놔라'고 했어요."

―위원장이 아이스크림까지 신경 씁니까?

"종일 엑스포만 생각하니까요. 또 중요한 게 화장실입니다. 처음에는 이동식 화장실을 갖다 놓았더군요. 제가 '화장실은 시원하고 깨끗해야 한다. 조립식 건물로 지어라'고 했어요. 5백명이 들어가는 어떤 건물동에 화장실 하나만 있어요. '화장실 앞에서 줄 서 있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줄 아느냐. 당장 사무실 하나를 없애고 화장실로 고쳐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소한 이치를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우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갑(甲)의 입장에서 보는데, 고객 시각에서 꾸며져야 합니다. 인천공항을 지을 때도 그런 시행착오가 있었지요."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는요?

"최종 점검을 할 때였습니다. 목적지로 짐이 잘 분류되고 정확히 도착해야 하는 것은 공항의 중요한 기능이지요. 이를 위해 여러 크기의 빈 가방 1만5천개를 샀어요. 또 1인당 5만원씩 주고 인력을 동원했습니다. 승객을 가상해 짐을 부치게 했습니다. 한 번에 가방 1만5천개는 최대 용량이었어요. 중간에 착오가 발생하자, 언론에서 '과연 제대로 개항할 수 있느냐'며 비판했습니다. 막상 개항해보니 실제 수화물 용량은 30%밖에 안 됐어요. 고객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컴퓨터의 최대 용량에만 매달린 겁니다."

―인천공항 건설 경험을 책으로 남기진 않았지요?

"개항 10년에 내려고 했습니다. 올해가 바로 그해인데, 제가 엑스포를 맡고 있습니다. 당시 자료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제가 겪은 시행착오와 아쉬웠던 점 등을 꼭 정리할 생각입니다."

―일흔이 넘어서도 현장 지휘관이니 체력이 감당됩니까?

"몸은 약한데 일을 하면 괜찮아요.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해요. 밥 먹으면서 신문도 못 보니까요. 그냥 전력투구이지요."

―엑스포가 끝나면 인생행로는요?

"이번이 제 마지막 작품입니다. 일생에서 이런 기회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저를 편애(偏愛)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데. 다만 속마음으로는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돈 안 먹고 공정하게 하니까' 자부합니다."

이런 그가 '흥행'을 누차 보증하면 믿어주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조선일보, 201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