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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재에 왕따… 청년 이순신은 '거북이'였다

하마사 2012. 4. 30. 13:35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둔재에 왕따… 청년 이순신은 '거북이'였다

 

오늘 충무공 탄신 467주년 -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맹장(猛將)으로 묘사한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 조선일보DB

37년간 '성웅(聖雄)'이순신과 함께 살았다. 그냥 이순신이 좋았고 그래서 이순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1975년 공군 법무관 시절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이은상의 책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부터다. "초임 판사 때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이 남아 총무팀에 돌려준 것도 이순신처럼 청렴한 공직자가 되고 싶어서였는데 총무과장에게 되레 혼만 났다"며 64세의 베테랑 재판관은 아이처럼 웃었다.

헌법재판소 김종대(64) 수석재판관이 일생의 업으로 여기고 매진했던 이순신 연구를 세상에 내놨다. '이순신, 신(臣)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시루)는 충무공의 생애와 리더십을 집대성한 그의 역작이다. 2002년 첫 책을 출간한 뒤 세 차례 개정하고 증보했다. 그는 "짧고 좁은 안목으로 성웅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충무공 탄신 467주년을 닷새 앞둔 23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그를 만났다. 김 재판관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병든 대한민국을 치료할 약재는 충무공 정신밖에 없다"고 했다. 12월 대선에 관해서도 "진정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고시 동기이자 '8인회' 멤버로, 노 대통령에게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영감을 심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민을 사랑한 대통령이었으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자리한‘충무공 이야기’전시관은‘이순신맨’인 김종대 재판관이 강연차 종종 찾는 곳이다. 그는“거북선의 우수성, 뛰어난 전략전술보다 위대했던 것은 이순신의 인격이었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늦깎이 사회생활 -33세에 武科 재수로 합격… 그나마도 중간 이하 성적
밤낮 상사들에 직언하다 40대, 종6품 겨우 오른 분

병든 사회, 이순신이 名藥 -
맡은 일 목숨걸고 전심전력, 결과는 괘념치 않는 초연함 '충무공 정신' 주사 만들어 공직자들에 놔주고 싶다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책 제목이 독특합니다.

"헌재 후배 판사들이 정해줬어요. 이순신 장군이 출전을 앞두고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였지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 중 하나지요. 새 지도자 선출을 앞둔 올해 꼭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하면 식상한 느낌이 듭니다.

"김 기자는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국민의 70%가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지만 그에 대해 말해보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나도 '거북선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영웅'이라고만 알았지요. 한데 이은상의 책을 보니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100의 1도 안 됩디다. 아,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어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그때 든 상사병이 지금까지 온 겁니다.(웃음)"

―어디에 감동을 받으셨나요?

"전혀 몰랐던 일화들 때문이죠. 초급장교 이순신을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유성룡이 권합니다.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인 이이를 한번 만나보라고. 이이는 병조판서를 지냈으니까요. 이순신은 고개를 젓습니다. 인사문제로 집안 어른을 만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죠. 이건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언신이라는 정승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전라도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면회를 갑니다. 자칫 본인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 있는데도 이순신은 기어코 찾아가지요. 아, 이 사람 지독히 올곧으면서도 의리가 있는 사람이구나, 융통성 없고 기이한 사람이구나 싶데요. 성웅이기 전에 인격자로 보였습니다."

―어떤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셨나요? 우리 사회에 프로·아마 이순신 전문가들이 많은데요.

"나는 학익진 전법이 뭔지 자세히 모릅니다.(웃음) 나는 다만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는 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 몇 가지 사료만으로 충분했지요. 나의 지력(智力)을 탓해도 자료를 탓할 순 없습니다."

 

이순신은 관료사회 부적응자였다

―왜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십니까.

"동료 재판관이 똑같은 질문을 하데요. 무슨 사료가 바뀌었길래 다시 책을 고쳐 쓰느냐고. 법(法) 하는 사람들은 법이 개정돼야 새 책을 내지 않습니까.(웃음) 그때 다른 동료가 나를 두둔합디다. 시인이 똑같은 대상을 두고 시를 한번 읊었다고 해서 두 번 다시 그 대상을 두고 읊지 말라는 법 있느냐면서요. 돌아보니 이순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참공직자의 사표에서 성공하는 리더의 모델로, 그리고 '인격자' 이순신으로 옮겨갔더군요. 이순신 리더십의 본질은 그의 인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순신은 무관에 뜻을 품었던 22세부터 미관말직에 나아가는 32세에 이르는 동안 치열한 자기 수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비 같은 장군'의 풍모를 보여주는 영정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은 논어, 중용 등을 읽으며 정신 수양에 열성을 다하지요."

―책에 보니 이순신 장군은 천재도 아니었고, 관료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한 공직자였더군요.

“28세 때 처음 응시한 무관시험에 떨어지고 32세에 합격합니다. 그것도 중간 이하의 성적으로요. 조직 적응 능력도 상당히 떨어졌지요. 유성룡 같은 이가 오죽하면 이순신은 밀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서 출세가 늦었다고 했을까요. 남들 뒷방노인 될 나이인 40대에 정읍현감(종6품)에 겨우 오릅니다. 밤낮 상사들한테 직언을 해대는데 누가 밀어주겠어요? 고흥 발포만호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상관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만호영 뜰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니 ‘공물을 사사로이 처분할 수 없다’며 이를 막아섭니다. 훈련원에서 봉사직으로 있을 때는 직속상관 서익의 인사가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며 이의를 제기하지요. 그날의 앙심으로 나중에 서익이 이순신을 파면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종6품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발탁됐을까요?

“나라가 급하니까, 전쟁상황이니까요. 유성룡은 이순신을 너무나 잘 알았어요. 저건 장재(將材)다 하고 선조에게 적극 추천했지요. 나는 이순신의 이런 면모가 요즘 청년세대에 위로와 희망을 준다고 생각해요. 취직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이순신으로 치면 33세에 직장을 구한 셈이지요. 출발이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들어가서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바르게 자기 책임을 완성하느냐는 거지요.”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어머니

―새롭게 고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 모친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순신이 극진한 효자였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전쟁 중 다른 가족은 다 아산에 두고도 어머니만은 자신의 진지 옆에 모셔와 언제나 문안을 드린 효자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거북선 만들던 여수 진남을 답사해보니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계시던 곳은 배 만들던 선소에서 4㎞, 본부에서는 9㎞나 떨어진 곳으로 매일 아침 이순신 장군이 문안을 드리러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요. 문안이 아니라면 왜 이순신은 그 위험천만한 최전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데요. 내가 내린 답은 전방에 와 있겠다고 한 건 어머니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왜 전쟁터로 오셨을까요.

“이순신은 서울 사람입니다. 명보극장 있는 마른내(근천동)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니 어머니가 친정인 충남 아산으로 식솔을 모두 끌고 내려갑니다. 강한 여인이었죠. 이순신은 그런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표현할 만큼 따르고 존경했는데, 아들의 그런 성품을 잘 아는 어머니가 전쟁 중에도 자식이 나랏일을 실수없이 하도록 스스로 전쟁터로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순신 일대기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더군요. 그중에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 자살설도 있습니다.

“‘불멸’의 한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다더군요. 소설이라고는 해도 그건 이순신의 인생을 완전히 왜곡하는 겁니다. 이순신에게 왜적은 불의와 탐욕의 집단이자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범죄집단이었어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적은 보복 차원에서 아산에 있는 장군의 막내아들을 죽입니다. 이순신으로서는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죽기 전날 이순신은 ‘이 탐욕의 무리를 다 죽이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자살할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정유년 초 왕명을 어긴 죄로 투옥되었다 풀려나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기까지의 기간을 이순신 생애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순신 인격의 정점을 보여주는 시기죠. 자신에게 사형까지 명했던 왕이 다시 초토화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는데, 나 같으면 그 명령 안 받습니다. (웃음) 거느릴 군사와 배와 총포도 없는 상황에서 그건 죽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순신은 받아들입니다. 이순신의 눈에는 자신이 지켜야 할 국토와 백성만 있지, 정치권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12척의 배와 찌꺼기 병력으로 400척의 왜적을 무찌르는 명량대첩을 이뤄냅니다. 연구자들은 판옥선의 우수성, 학인진 전법 같은 것을 승리요인으로 얘기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도망쳤던 병사들이 ‘이순신이 왔으니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여든 것, 장수와 병사들 간의 굳은 신뢰와 소통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거죠.”

―이순신은 약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그 약점을 찾아서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웃음) 이순신이 장수답지 않게 감성적이고 과장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는 것밖엔 없더군요. 위로 두 형이 죽어 장자 역할을 했던 이순신이 조카들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대목을 보면 이 사람이 장수가 맞나 할 만큼 연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있는 허물을 감추는 것도 안 되지만 없는 허물을 들춰내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게 나의 변명입니다.”

어진 선비의 풍모로 묘사된 이순신 영정. 김종대 재판관은“12월 대선에서는 이순신처럼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가 뽑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친구였던 노무현 前대통령 - 부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 구국으로 발전시키지 못해
이순신처럼 국민 아꼈지만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다

막말 판사들에게 고함 -
양심 위에 법률 있고 법률 위에 헌법 있는데
개인 양심으로 法을 깬다?… 그럼 법복 벗어야지

강자의 약자 억압엔 철퇴 - 여성·어린이·장애인 해코지 합의됐다 해도 실형 선고
힘없는 국민 압박해 저지른 공무원 부정도 중대 범죄다

이순신처럼 살고싶다 - 초임 시절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 돌려줬다 혼나기도
이순신 팬들 많아지면 대한민국 훨씬 건강해질 것

 

삼성자동차, 그리고 지율 스님

경남 창녕 출신의 김종대 재판관은 1979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006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기까지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향판(鄕判)’이다. 법조계에서는 ‘조정의 달인’으로 통한다. 삼성자동차 조정 사건은 유명하다. 파산 위기의 삼성자동차를 기사회생시켜 부산 경제는 물론 국가 경제의 손실을 최소화했다. 공직자 비리와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는 엄벌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범죄를 가장 경멸한다”고 말했다.

―삼성자동차 사건으로 ‘조정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으셨지요.

“삼성자동차가 르노에 인수되지 않으면 파산하게 돼 있는 상황이었어요. 르노는 5500억원 이상은 안 주겠다고 하고, 르노가 삼성을 인수하면 국부 유출이라는 비난도 있었고요. 문제는 삼성자동차가 파산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5년간 20조원의 적자를 본다는 사실이었어요. 당장 1만명의 종업원이 쫓겨나고 지역경제가 파탄납니다. 그래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채권자인 삼성물산과 은행권을 설득했지요. 당신들이 손해를 보고 국가를 살리자 했습니다. 채권단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내가 이 일로 옷을 벗어도 좋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천성산 도롱뇽 사건의 항소심 재판장도 맡으셨었지요?

“아쉽게도 조정에 실패한 사건입니다. 나는 천성산 터널 문제가 서울 사패산 터널처럼 국가와 환경단체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서 잘 해결되기를 바랐어요. 타협이 되자 터널 공사할 때 스님들이 나와 목탁도 두드려주셨으니까요.(웃음). 그런데 천성산은 안 됐어요. 터널을 뚫었을 때 생태계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입증하는 실험을 해보자는 중재안을 갖고 계속 설득했는데 말을 안 듣더군요. 더 이상 기다렸다간 나라 꼴이 엉망이 되니 공사를 재개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요.”

―그 판결을 주제로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를 하셨다가 지율 스님으로부터 ‘소송과정을 왜곡하고 사실을 호도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받게 됩니다. 1심, 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났습니다만.

“많이 반성했습니다. 모두 내 인격 탓이지요. 나는 지율 스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자기 욕심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어서 좋더군요. 충분히 타협해서 지혜롭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어그러져 아쉬울 뿐입니다. 천성산 물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더더욱…. 나는 일도양단의 명판결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서 중도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의의 가치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공직자 비리에 굉장히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범죄가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을 해코지하는 범죄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정하게 식품을 만들어 파는 사건은 설령 합의가 되었다 해도 실형을 선고합니다. 공무원의 부정도 그 공무원이 힘없는 국민을 압박해서 저지른 범행이라면 중대범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최근 사법부에 국민들의 비판적 관심이 급증했었지요.

“나도 영화 ‘부러진 화살’은 봤어요. 많은 법관이 왜 우리를 이렇게 묘사했느냐며 반발했지요. 하지만 변명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국민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는지 반성하고 오해를 사지 않을 방법을 이제부터라도 찾아나가는 게 중요하지요. 그래야 100가지 불만이 10가지로 줄어들고 우리 사법부도 발전합니다.”

―서기호 판사 등 일선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과 막말이 비난을 받았습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양심보다 더 위에 있는 게 법률이고, 법률보다 더 위에 있는 게 헌법입니다. 내 개인적 양심으로 헌법도 깨고 법률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법을 모른다? 그럼 법복을 벗어야지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등 역대 권력들이 이순신 리더십을 강조해왔습니다.

“권력자라면 누구나 이순신을 활용하고 싶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이순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학자들은 외려 이순신 교육을 회피할 정도지요. 권력에 아부한다는 오해를 살까봐.(웃음) 중요한 건 그 지도자가 진정 이순신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이순신을 좋아했고 그 길을 가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사이가 각별하셨지요. 노 대통령이 어느 날 이순신을 들고 나온 것도 재판관님 영향을 받은 걸까요?

“2002년 첫 책이 나왔을 때 읽어보라고 주긴 했는데 내 책은 안 읽고 ‘칼의 노래’만 읽은 것 같습니다.(웃음)”

―친구이기도 한 노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된 지도자였던 건 맞아요. ‘사람 사는 세상’을 구현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마음이 바탕이 됐겠지요. 그런데 그 마음을 한 차원 승화시키진 못했어요. 부정과 불의에 분노하는 마음은 대단했으나 그걸 진정한 구국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지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반대자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자주 만나셨습니까.

“재임 시절 대여섯 장의 편지를 써서 건넨 적이 있어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니 마음에 안 드는 집단이 있다고 해도 다 안고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요. 받기는 받았는데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이순신 장군이 숱한 모함과 고초 속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했던 것은 자기를 통제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이길 힘을 기르지 못한 게 노무현의 가장 큰 패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시대에 이순신 정신은 왜 필요합니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이념적으로는 남과 북,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어요. 이걸 치료할 약재로 충무공 정신만 한 게 없습니다. 매사 원칙에 따라 정의의 외길을 간 것, 일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한 것, 결과에 괘념하지 않는 것, 선공후사(先公後私)에 철저했던 것 등등 할 수만 있다면 그 정신을 주사약으로든, 당의정으로든 만들어서 공급하고 싶어요.(웃음)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이순신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은행 총재 하셨던 이성태 선생이 그러시데요. 70이 다 된 지금도 이순신의 한마디가 머리에 박혀 있다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을 얻게 되면 나가 충성을 다하고 벼슬을 얻지 못하면 농사지으면 되지 헛되이 명예를 구해서 기웃거리는 것은 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일이 선고인데도 내가 만사를 젖혀놓고 인터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이순신 팬을 많이 만들고 싶어서, 그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겁니다. 이순신,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조선일보, 201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