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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도요히꼬 목사

하마사 2011. 11. 13. 15:56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위대한 기독교 운동가 두명이 있습니다. 우찌무라간조(내촌감삼), 그리고 가가와도요히꼬(하천풍언)...

하천풍언의 책은 지금 구하기가 쉽지는 않지 싶네요. <사선을 넘어서>, <한알의 밀알>, <한국방문강연회>.

 

1888년 일본 고베의 작은 마을에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5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본처 자녀들과 한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학대를 당했는지 그는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 틈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늘 형제들로부터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하는 조롱과 비웃음이 따라왔습니다. 죽으려고 몇 번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고 생각이 부정적이 되면서 점점 소외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불교의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가문에서는 그를 절간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그 집에서 불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교훈을 철저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두 살 되든 해 어느 날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다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토해보니 붉은 핏덩이였습니다. 검사를 해보니 폐결핵 3기였습니다.

 

그후 그는 10대 후반인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도 맥없이 마루턱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성탄절 날 구세군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이 때 그는 성탄절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즉시 그 대열에 따라 나섰고 전도 대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엔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그는 폐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각혈하게 되었고, 그는 사선을 몇 차례나 넘는 극렬한 투병 속에서도 그는 성경이 손에서 떨어진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운명 내 인생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자’ 하고, 1909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굴 거리는 빈민굴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엔 1) 병든 걸인 2) 폐결핵 환자 3)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과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입고 있었던 옷가지마저 그들에게 벗어주며 간절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당시 25만부)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다음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는 일본 고오베 신학교에 들어갔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몇 개월도 살기 힘들다던 폐병 말기의 환자, 그는 그 뒤로도 수 십년을 더 살아 70을 훌쩍 넘겼고, 그의 삶은 일본을 넘어 중국과 한국의 상처 난 사람들에게까지 촉촉하게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엄청난 저술을 했는데, 그가 저술했거나 번역한 서적은 자그마치 150권이 넘었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일본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그가 바로 일본교회가 자랑하는 ‘가가와 도요히코’(하천풍언)목사님입니다. (1888-1960).

 

고베[神戶]에서 태어났다. 고베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고베의 빈민굴에서 그리스도교 전도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의 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의회주의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노동운동계가 좌경화함에 따라 농민조합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1925년 보통선거법이 성립되자 무산정당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공산당의 진출에 환멸을 느껴 협동조합운동에 주력하였다.

종교운동에도 힘써 '천국운동'을 전개하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反戰)운동 혐의로 헌병대에 감금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전후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고 세계연방운동 추진에도 진력하였다. 한국의 자유당정권 때 개인자격으로 내한(來韓)하여,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방문하여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하였다. 저서로 자전적 소설인 《사선(死線)을 넘어서》(1921)와 《새벽이 오기 전에》(1924)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