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따라 참전한 형 - 한국 온 동생은 몰랐다, 걱정하던 형이 따라 온 줄…
"너와 같은 이름의 사람 있어" 동생이 가보니 형은 피투성이… 눈물로 형을 한국에 묻었다
형 따라 묻히는 동생 - 형 그리며 살던 동생은 작년 "형 옆에 묻히고 싶다" 유언…
25일 부산 UN기념공원서 61년 만에 '형제 유해 상봉'
61년 전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된 형 조지프씨를 만나기 위해 동생 아치볼드씨의 유해가 오는 22일 한국에 온다. 형 곁에서 영면(永眠)에 들기 위해서다.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Ignace)에서 태어났다. 조지프는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아치볼드는 한 살 터울의 차남이었다. 동생은 21살 되던 1950년 9월 7일 6·25전쟁 참전을 위해 입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지난 2002년 7월 동생 아치볼드 허시씨가 부인과 함께 6·25에 참전해 숨진 형 조지프 허시씨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왼쪽 큰 사진). 부산 UN기념공원에 있는 조지프 허시의 묘(오른쪽 위). 6·25 참전 당시 동생 아치볼드씨 모습(오른쪽 아래). /캐나다 일간지 'The Chronicle Journal' 제공
형 조지프는 동생이 걱정돼 다니던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1951년 1월 6일 입대해 한국 땅을 밟았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영연방 27여단과 함께 작전을 펼쳐 여주 전투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둔 부대였다.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 속에 만나지 못했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은 북한군과의 격렬한 교전 직후 참호 정비에 나섰다. 근처 참호에 있던 전우들이 "너와 이름이 같은 병사가 쓰러져 있어"라고 외쳤다. 그곳에 캐나다에 있을 줄 알았던 형 조지프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고꾸라져 있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던 형은 동생 품에서 곧 숨을 거뒀다. 동생은 형의 주검이 담요에 말린 채 다른 전사자 시신 옆에 놓이는 것을 지켜봤다. 아치볼드씨는 "그때야 형이 나를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자 형의 유일한 유품인 파란색 실크 파자마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이 귀향할 때 어머니에게 주려고 사 놓았던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파자마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 부인 아그네스(Agnes)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전쟁으로 생긴 가슴 속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둔 밤에 소리를 지르고, 숨진 형의 사진을 보며 우는 날이 많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게 된 것이다.
아치볼드의 외동딸 데비(Debbie)씨는 "아버지는 제가 성인이 된 뒤 6·25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며 "그때야 아버지 손이 왜 항상 검푸른 피멍 투성이였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아치볼드는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보호하려고 주먹질을 하는 꿈을 자주 꿨는데, 그때마다 깨어보면 침대 옆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형의 묘지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가난했다. 참전용사에게 한국 방문 기회를 주는 UN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폐질환에 걸려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자기 대신 2009년 11월 방한한 딸이 찍어온 형의 묘 사진을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랬다.
아치볼드는 작년 6월 25년간의 폐질환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형 옆에 함께 눕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딸 데비씨는 한인 출신 첫 캐나다 연방 상원 의원 연아 마틴(Yonah Martin·한국 이름 김연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캐나다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허시 형제의 합장을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전사자의 부인만 합장을 허락했던 부산 UN기념공원 측은 캐나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형제의 사후(死後) 상봉을 받아들였다. 딸 데비씨는 22일 보훈처 초청으로 아버지 유해를 들고 한국을 찾는다. 허시 형제의 합장식은 25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다.
-조선일보, 201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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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로버트 맥거번 중위는 1951년 경기도 수원 전투에서 눈 덮인 바위산을 기어올랐다. 고지를 70m쯤 남겨놓고 적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는 쏟아지는 적탄에 가슴을 맞고 숨을 거뒀다. 그 열하루 뒤 동생 제롬 맥거번 소위도 경기도 금왕리 442번 고지 전투에서 하얀 눈밭 위에 피를 뿌렸다. 그해 11월 워싱턴 알링턴국립묘지에 형제가 묻히던 날 워싱턴포스트 제목은 '평생을 함께 자란 맥거번 형제 나란히 잠들다'였다.
▶베니 로저스 상병은 북한에서 유해가 발굴돼 작년 11월 미국 텍사스주에 안장됐다. 그러면서 그의 어머니가 보관했던 60년 전 편지가 공개됐다. 갓 스무 살 병사는 6·25 전쟁터에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엄마, 나 하사로 진급해요. 여기는 새로 판 참호 냄새가 나요." 그는 편지를 부친 사흘 뒤 평북 운산전투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이 실종된 줄만 알았던 엄마는 죽는 날까지 아들이 살아올 거라고 믿다 떠났다.
▶숱한 젊음이, 귀한 자식이, 때론 피를 나눈 형제가 6·25의 참화에 휩싸인 이역만리 땅까지 와서 싸우고, 스러져 갔다. 6·25 전쟁 중에 미국 가수 엘튼 브리트가 부른 '무명 용사(The Unknown Soldier)'는 지금도 살아 숨쉬듯 가슴을 울린다. "내 무덤은 그대가 지키지 못한 약속/ 무덤 위 화환은 고통의 리본/ 내 비록 눈을 감았지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까지 절대로 잠들지 못하리."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캐나다 허시 형제의 어머니는 아들이 마련했던 파자마를 죽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다. 재작년엔 호주의 6·25 미망인이 유엔기념공원 남편 곁에 묻혔다. 작년에야 고향 텍사스에 묻힌 베니 로저스 상병의 조카와 손자들은 지금도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베니 삼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름도 낯선 동아시아 외진 나라에 젊음과 피를 바쳤던 전쟁은 여전히 세계 여기저기서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우리 어린 학생들은 6·25가 일어난 해도 모르는 지경인데.
-조선일보 만물상, 201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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