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오바마의 지각

하마사 2012. 3. 29. 14:04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올해 일흔다섯인데도 여전한 현역이다. 뿐인가. 대학에 있던 동료들은 정년퇴임을 하고도 남을 나이에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장,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잇달아 맡으며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결을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한결같다. "그는 지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씨는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늘 10분 이상 먼저 가 기다린다. 한번 쓰기로 응낙한 원고는 기일을 넘기는 법이 없다.

심리학에서는 지각하는 것을 '꾸물거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보고서를 늦게 내거나 시험공부를 미루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을 정해진 시간까지 못하는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꾸물거림'은 동물 중 인간에게만 있다고 한다. 국내 연구팀이 대학생 500명을 조사했더니 성실성·책임감이 부족하고 비계획적일수록 '꾸물거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인관계가 좋고 관대한 사람이 꾸물거린다는 것은 뜻밖이다.

▶지각을 하는 것은 개인의 습관과 성격을 넘어 그가 사는 지역 문화 탓이기도 하다. 중남미 나라의 중요한 행사 기획자들은 초청장에 행사 시작 시각을 한 시간 앞당겨 적어넣곤 한다. 이슬람권 사람들도 시·분을 따지는 것보다는 알라의 뜻에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다보니 약속에 늦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온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틀 연속 지각을 하는 바람에 만찬과 회의가 늦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자기 나라에선 최고 의전을 받는 수십명의 정상들이 번번이 먼저 와 그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됐다.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이후 여러 국내외 행사에 습관적으로 늦게 나타나 언론으로부터 '지각 대장'이라 불렸다. "미국에 '오바마 타임'이란 또 하나의 시간대가 생겼다"는 비난도 들었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 '지각생 법칙' 가운데 하나는 "학교 담과 붙어있는 집에 사는 아이가 만날 학교에 늦는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묵었던 숙소가 다른 나라 대통령 숙소보다 특별히 가깝지도 않았으니 이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교육학 실험에서 상습 지각생에게 임시 반장이라는 임무를 맡겼더니 책임감 때문에 더이상 늦지 않더라는 얘기도 있다.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에게는 이 처방도 어울리지가 않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에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다. 그때 프랭클린은 내 시간만이 아니라 남의 시간 역시 돈만큼, 또는 돈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야기했을 텐데, 박식한 오바마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고…. 아무튼 '지각생 오바마'는 수수께끼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