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선교사의 후손

하마사 2012. 3. 23. 09:59

 

1905년 목포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포사이트는 광주의 동료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누더기 옷에 손발이 상처로 짓무른 여인을 길에서 만났다. 한센병 환자였다. 포사이트는 여인을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광주에 들어갔다. 동료는 숨진 뒤였다. 포사이트는 여인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고 정성껏 보살핀 뒤 목포로 돌아갔다. 서양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구했다는 얘기가 퍼지자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로 찾아들었다.

▶포사이트는 광주에 최초의 한센병원을 세웠다. 그는 괴한에게 귀가 잘리는 봉변을 당하고 풍토병에 걸려 활동이 어렵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도 한국 한센병 환자를 돕는 모금·강연을 하다 1918년 세상을 떴다. 환자들은 돈을 모아 광주 한센병원에 포사이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병원은 1926년 총독부 퇴거 명령에 따라 여수로 옮겨져 애양원으로 불리게 됐다. 병원이 이사할 때 환자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상여를 메듯 비석을 어깨에 지고 보름 동안 밤길을 걸어 옮겼다.


▶한국은 쇄국정책 탓에 아시아에서 가장 개신교 선교가 늦은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 전체의 개신교 신자 가운데 4분의 1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런 성장의 바탕엔 구한말 낯선 한국 땅에 와 젊음과 열정을 바친 선교사들이 있다. 1892년 조선에 살던 미국인 78명 중에 44명이 선교사와 가족이었다.

▶아프리카 케냐가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그 나라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선교사들이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다. 선교사가 '기도합시다'라고 해서 눈을 감았다 떠보니 우리는 성경을, 그들은 땅을 갖고 있었다." 선교가 제국주의의 전위 역할을 했던 것을 꼬집은 말이다. 16세기 남미 선교도 폭력·강압과 얽혀 있었다. 그에 비해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 봉사, 고아와 빈민 구제에 힘썼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있는 선교사 헐버트의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다.

▶117년 전 한국에 와 '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던 유진 벨 선교사 집안의 4대 외손 인요한이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그제 법무부로부터 한국 국적을 받았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의 은인 포사이트 선교사다. 인요한은 좁은 골목도 다닐 수 있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했다. 북한을 26차례나 찾아가 결핵 퇴치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 이제 진짜 한국 사람이오. 우리 함께 잘살아봅시다잉~." 전라도 억양 진한 '한국인 인요한'의 국적 취득 소감에서 '친구'를 넘어선 유대감을 느낀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