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 10시부터 '특별 방송'을 예고한 조선중앙TV 등은 '전체 당원과 인민군 장병과 인민에게 고함'이란 발표문에서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동지의 질병과 서거 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서 "17일 달리는 야전열차 안에서 중증 급성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한 심장성 쇼크가 합병됐다. 발병 즉시 모든 구급치료대책을 세웠으나 17일 8시 30분에 서거하셨다"며 "18일에 진행된 병리해부 검사(부검)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됐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김정일이 지방 초대소(별장)로 이동하는 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1974년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됐으며,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통치하며 절대권력을 행사해 왔다. 그가 37년간 북한을 철권 통치하는 동안 북한은 대규모 아사(餓死)와 탈북 사태가 발생하는 세계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그는 아웅산테러를 비롯해 천안함·연평도 도발 등 각종 군사 도발을 벌였고, 두 번에 걸친 핵실험으로 한반도를 핵의 악몽 속으로 밀어넣는 악행(惡行)을 일삼았다.
북한은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포함해 232명의 장의위원회 명단을 발표하면서 김정은의 이름을 가장 먼저 호명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을 가리켜 처음으로 '위대한 영도자' '위대한 계승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정일이 20년간 후계자 지위에서 권력을 다지면서 52세에 권력 일인자로 올라선 것과 달리 29세의 김정은은 작년 9월에야 후계자로 지명됐다. 북한을 통치하기에는 권력기반이 극도로 취약하다는 평가다.
- 17일 사망한 김정일(오른쪽)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10월 10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후계자인 삼남 정은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북한 관영매체는 김정일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19일 발표했다. /AP
중국은 이날 밤 9시쯤 공산당 중앙위, 전국인민대표대회, 중앙군사위, 국무원 명의로 보낸 조전(弔電)에서 "조선(북한) 인민들이 김정일 동지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노동당 주위로 긴밀하게 단결하고 김정은 동지의 영도하에 슬픔을 힘으로 승화시켜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향해 전진할 것을 믿는다"고 밝혔다. 반면 우리 정부는 이날 김정일 사망에 대한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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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김일성·김정일 王朝 몰락과 우리의 자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의 당(黨)·정(政)·군(軍) 매체들은 19일 12시 '전체 당원과 인민군 장병과 인민에게 고함'이란 발표문을 통해 김 위원장이 현지 지도 중 중증 급성 심근경색과 그 합병증으로 17일 오전 8시 30분 전용열차 안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공식 나이 69세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유일(唯一) 절대 독재자 김일성의 아들로, 199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한동안 김일성의 유지(遺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유훈(遺訓) 통치' 시대를 이끌다 1998년 국방위원장에 취임, 북한을 통치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1974년 2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된 이후 '당 중앙'(黨 中央)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북한을 다스려 왔기 때문에 김정일의 북한 통치 기간은 37년에 이르는 셈이다. 1945년 이후 북한의 역사는 1945~1974년 김일성 단독 통치시대, 1974~1994년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 공동 통치시대, 1994~2009년 김정일 단독 통치시대, 2009~2011년 김정일·김정은 부자 공동 통치시대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의 봉건적 현실은 2009년 개정된 북한 헌법 전문(前文)의 '조선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나라이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조선의 창건자이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始祖)'라는 구절에 집약(集約)돼 있다.
2400만 주민이 사는 나라의 절대 권력이 부·자·손(父·子·孫) 3대 66년에 걸쳐 상속된 역사는 봉건시대가 끝난 이후 북한의 김씨왕조(金氏王朝) 하나뿐이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발표문을 통해 '우리는 김정은 동지의 영도에 따라 오늘의 난국을 이겨내 주체 혁명의 위대한 승리' 운운하고 있고, 오는 28일 치러질 장례식을 주관할 국가장의위원회 명단 맨 앞에 김정은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나 부·자·손 3대 통치는 김정일 사망으로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일성은 북한군을 창설하고, 북한 노동당을 창당한 배경과 소련의 배후 지원으로 당과 군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고서도 선군(先軍)정치란 이름으로 국가 예산과 권력을 군에 몰아주는 군 영합주의(迎合主義) 통치방식을 채택해, 군과 함께 공동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후계지원 기간도 길지 않고, 군과 당에 지지세력을 심을 틈도 없었던 김정은 시대의 권력이 머지않아 공산국가에서 권력의 근거인 총구(銃口), 즉 군부로 집중될 것은 자명한 결과다.
북한 권력의 앞날은 제1 실세 집단인 군이 '김씨 일족의 혁명의 나라'라는 가짜 역사에 세뇌(洗腦)된 북한 주민을 통치하는 수단과 명분으로 김일성·김정일로 내려오는 혈족(血族)을 얼마 동안 어느 정도 이용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북한 군부의 선택 대상이 김정일의 여러 부인 소생인 김정은·김정남·김정철과 김정일의 이복(異腹) 동생인 김평일 가운데 어느 쪽일 것이냐는 단지 군의 편의(便宜)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사태는 북한 권력이 김씨 일족을 떠나 실세 권력으로 모아지기까지 숙청과 유혈이 지금보다도 혹심하게 진행돼 그에 따라 죄 없는 북한 주민의 희생이 얼마나 커질 것이냐는 것뿐이다.
김정일의 비공식 통치기간 37년, 공식적 통치기간 17년은 유혈(流血)과 테러와 폭력과 집단 아사(餓死)로 얼룩진 폭정(暴政)의 시대다. 김 위원장은 1974년 북한의 공동 통치자로 부상한 다음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지 폭탄테러사건,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2002년 서해상의 우리 해군 기습사건,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입안자(立案者)이고, 실행자(實行者)였다.
그러나 2400만 북한 동포들은 대한민국의 희생보다 몇십배 몇백 배나 더 처참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식량을 사들여야 할 수십억 달러의 돈을 핵무기 개발에 투입하며 1994~1998년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우리 민족사 최대의 집단 아사사건을 '고난의 행군'으로 미화(美化)하고 비극을 조장(助長)·방치했다. 김일성이 6·25 남침을 통해 수백만 명의 동족을 총과 대포의 밥으로 몰아넣었다면 김정일은 남쪽을 향한 테러와 북한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대량 학살 주모자라는 흉가(凶家)의 대(代)를 이은 것이다.
대한민국과 남북 7500만 동포는 지금 역사적·민족적 '진실의 순간'을 만나고 있다. 민족의 운명과 진운(進運)이 걸린 사태 앞에서 오늘을 걸머지고 내일을 개척해야 할 우리는 김씨 부자의 죄업(罪業)의 무게와 크기를 달아볼 여유조차 없다. 우리는 김씨 왕조가 몰락한 이 순간 남북관계를 넘어 한반도 전체를 관리해야 할 유일한 당사자(當事者) 입장에 서게 됐다. 어느 누구도 이 부담을 뿌리칠 수도, 이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가깝게는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멀리는 민족 통일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느냐는 문제가 김씨 왕조 몰락과 동시에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1 시급(時急) 과제는 김정일 사후의 권력 공백이 대량 숙청과 대량 학살로 이어져 북한 동포의 희생과 공포가 가중(加重)되는 사태를 우선적으로 방지하는 것이다. 제2의 과제는 북한 핵무기와 미사일의 유출과 관리 허술을 예방할 유효(有效)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다. 제1의 과제와 제2의 과제를 해결하려면 국제사회의 공동 관심 표명, 특히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한·미 동맹의 진가(眞價)를 발휘해야 할 시간이고, 중국과의 소통(疏通)에 최대한의 외교적 자원을 투입해야 할 장면이다. 핵과 미사일의 유출은 미국과 중국의 긴장을 촉발할 뿐이라는 점에서도 한·미, 한·중의 협력은 물론 미·중의 긴급 대화가 절실하다.
제3의 과제는 우리 대북 정책의 근본 바탕인 북한 동포의 인간다운 삶이 복원(復元)될 수 있도록 우리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도모하는 것이다. 배급 사회는 권력 공백기에 배급체제의 붕괴로 인한 참변이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의 임시 지도부에게 긴급 식량지원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점을 알릴 일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에 대화의 통로가 끊긴 남북을 잇는 긴급 소통의 방책(方策)도 찾아질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전체(全體) 사회의 붕괴, 권력 이행기(移行期)에는 주민의 대량 탈출이 빈번히 발생해 왔다는 역사적 전례(前例)를 돌아보고 그에 대한 대비도 세워둘 필요가 있다.
북한 임시 지도부에게 민족적 양심(良心)에 입각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핵(核)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틀 안으로 복귀함으로써만 북한이 오늘의 모든 곤경(困境)을 헤쳐가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에 귀를 열라는 호소다. 북의 새 지도부가 그런 결단을 한다면 우리는 북한이 권력 이동이라는 혼란기를 벗어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음을 알려도 좋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점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경계의 태세는 철저히 해야 하지만 불필요하게 북을 자극하지 않도록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 역시 긴요하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우리 정부가 전군(全軍)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한 것을 북이 추후 트집 잡았던 사실도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적·국민적 역량(力量)을 투입하는 진인사(盡人事)의 자세다. 여기에 대통령과 일반 국민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여·야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이 순간 소리(小利)를 탐하는 개인과 집단은 영원히 죽을 것이고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과 집단엔 민족의 앞길을 개척할 소임(所任)이 부여될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루·일주일·한달·일년 단위로 살 수 없다. 분(分)과 초(秒)를 다퉈가며 정세를 주시하고 대응책을 마련·실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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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경제파탄·인권유린… 밖으로는 테러·무력도발
악행으로 점철된 김정일 철권통치 37년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974년 후계자로 공식화된 후 37년 동안 북한을 철권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북한 주민들은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궁핍에 빠졌고, 기본적인 인권을 거론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철저한 강압 통치에 시달려야 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 주민은 물론, 남한의 동족을 향해서도 수많은 테러와 군사적 공격을 가했다.
권력 과시형 경제운용… 굶어죽는 주민 속출
김정일 위원장은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게 하는 등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시켰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경제분야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당권 장악 차원에서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옮겼다. 한편으론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침체 상황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권력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70일 전투' '속도전' 등 다양한 증산 캠페인과 무리한 대중동원 방식을 진행했다. 이런 경제운용은 경제논리를 철저히 무시한 것으로, 오늘날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을 추락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1994년 김일성 주석까지 사망하면서 북한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졌다. 1990년대 중반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됐다. 당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북한은 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1991년 북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4.4%로 추락한 데 이어, 1992년에는 마이너스 7.1%를 기록하는 등 1998년까지 8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 시기 부정부패도 만연하는 등 국가의 통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다.
북한 주민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0월 발표한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이 함께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주민 3명 중 1명꼴인 840만명이 영양부족 상태였다.
先軍 내세운 폭압정치로 목숨 건 탈북자 양산
북한이 만성적인 경제·식량난에 시달리면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등으로 국경을 넘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대북인권단체 '좋은벗들'은 1990년대 후반에만 30만명의 북한 주민이 탈북한 것으로 추산했다. 아직도 중국·러시아와 동남아 일대에 탈북자가 떠돌고, 생존을 위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김 위원장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몇번 개혁 조치를 취하는 듯했으나 늘 구호에 그쳐 번번이 실패했다. 1998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고,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북한을 실질적인 변화로 이끌지 못했다. 2009년 11월에는 기존 화폐와 새 화폐를 100대 1의 비율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쌀값이 폭등세를 보여 주민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김 위원장은 군을 앞세우는 '선군(先軍)정치'를 국가 운영 시스템으로 내걸면서 극심한 경제난과 마이너스 성장에도 군사비 만은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김 위원장은 일상적으로 주민들을 감시·통제하고 억압해 나라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 통일연구원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숫자가 2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고(故)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는 회고록에서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고 자유와 평등을 빼앗아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인민의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육영수여사 저격·아웅산 폭파 등 정치 테러
김정일이 1974년 2월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한 뒤 북한은 한국 정부 최고위부를 향해 직접테러 공격을 저질렀다. 첫 대형 테러는 육영수 여사 저격이었다. 1974년 8·15 경축 행사장에서 김일성 부자(父子)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 여사 저격을 시도했다. 박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육 여사는 범인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1983년 10월 9일에는 미얀마(당시엔 버마)의 양곤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겨냥했다. 김정일의 친필 서신을 받은 북한군 진용진 소좌와 강민철·신기철 대위 등이 당시 아웅산 묘소를 참배 중이던 전 대통령 일행을 상대로 강력한 폭탄을 터뜨렸다. 전 대통령은 살아남았지만 장관·청와대수석 등 정부 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두 사건은 북한의 대표적 '정치적' 테러였다. 이후에도 북한은 해외 공관 등에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지속적으로 노려왔다.
KAL기 폭파 등 민간인에까지 무차별 테러
김정일은 '86서울아시안게임(1986년 9월 20일~10월 5일)'과 '88서울올림픽(1988년 9월 17일~10월 2일)'을 방해하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테러도 자행했다.
1986년 9월 14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버스승차장 부근 자판기 옆 쓰레기통에 김일성 부자의 사주를 받은 국제 테러리스트가 TNT 폭약을 설치해 폭파했다. 이 폭발로 5명이 죽고 30여명이 다쳤다. 1987년 11월 29일에는 중동 근로자들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오던 KAL 858기를 폭발시켰다.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88서울올림픽 방해와 남한 내 분열을 조장하려는 차원이었다. 미국은 KAL 858기 테러를 계기로 북한을 2008년 10월까지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또한 김정일은 1997년 2월 15일 공작원 2명을 남파해 이한영(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을 살해했다.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이한영에 대한 보복 차원이었다.
핵실험 2차례 후 핵보유 선언… 전 세계 협박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 수백만의 아사자를 내면서도 일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 1차 북핵 위기를 조성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북한의 핵포기 대가로 경수로를 지어주는 제네바합의를 서명했으나, 김정일은 약속을 어기고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10월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이 발각돼 제2차 북핵 위기를 촉발했다.
김정일은 "생존권을 위해 핵을 포기할 수 없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대로 우리는 핵무기를 가질 의사가 없다" 등 상반된 듯한 의사표시를 하다가, 2006년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지하 핵실험장에서 1차 핵실험을 했다. 그리고 약 3년 뒤인 2009년 5월 25일,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차 때보다 규모가 5배나 큰 2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핵개발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향한 협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부터 천안함까지 직접 도발
1976년 8월 18일 북한군 병사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 초소 앞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나뭇가지를 치던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찍어 살해했다. 한·미 양국은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했고 결국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주석이 사과해야 했다.
김정일이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명실공히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엔 직접 도발이 더 많아졌다.
1996년 9월엔 강릉에 잠수함과 무장공비 25명을 침투시켜 한국의 혼란을 유도했다. 1999년에는 북한 군함들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해군 고속정에 포격을 가했으나 패퇴했다. 제1차 연평해전이었다. 김정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다시 남측 함정들을 향해 기습 포격을 감행했다.
작년 3월에는 남한 초계함 천안함에 어뢰를 발사, 우리 해군 장병 40여명을 수장시켰다. 11월에는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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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7년여간 북한을 철권 지배했다. 후계자로 확정된 1974년부터 치면 37년 동안이다.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국제 사회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도 3대 세습이란 봉건적 행태를 보여 전 세계의 비웃음을 샀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 하바로프스크 부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항일 빨치산 활동 중이던 김일성·김정숙이었다. 이름도 소련식인 '유라'였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1980년대 초부터,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한다. 김일성의 출생연도(1912년)와 끝자리를 맞추기 위해 생년을, 우상화를 위해 출생지를 조작한 것이다.
젖먹이 시절 김정일은 김일성의 호위병·전령병인 전문섭·조명록·백학림의 등에 업혀 자랐다. 이들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시대에도 군 요직에 중용됐다. 김정일이 북한땅을 밟은 건 해방 후인 1945년 11월 말이었다. 김정숙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함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항에 들어왔다. 두 달 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건당·건군·건국' 작업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 김정일(사진 왼쪽)이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로이터
6·25 전쟁이 터지자 김정일은 숙부 김영주를 따라 자강도 강계와 만포, 중국 지린(吉林)시 교외로 피란을 갔다가 1952년 봄 평양으로 돌아와 그해 11월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학원 4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김일성은 수상관저 전화 교환수로 김정숙의 시중을 들던 김성애와 재혼했다. 김정일은 생모의 비서가 계모가 된 것에 반발하며 김성애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았다.
김정일은 1957년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해 이 학교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을 지냈다. 2~3학년 땐 진학할 대학을 고르기 위해 소련과 동유럽 지역을 돌아보기도 했으나 결국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1960년 9월)를 택했다. 북한 최고 교수들이 김정일을 위한 지도교수 그룹을 결성, 본격적인 지도자 수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 1970년대 초반 후계자 수업을 받던 ‘청년 김정일’이 한 군부대를 방문, 권총을 겨누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 겪으며 김일성 우상화에 집착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그해 6월 노동당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의 지도원 신분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조직지도부에서 당·정·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김정일은 1967년 당의 사상 사업을 총괄하는 선전선동부의 과장이 됐다. 영화·연극·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일은 중앙당 사무실을 비우고 평양대극장과 조선영화촬영소에 살다시피 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확정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조직지도부장인 삼촌 김영주와의 권력투쟁이 치열했고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 된 계모 김성애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은 빨치산 원로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김일성주의’ 공포 등 김일성 우상화에 매진했으며 이를 통해 당·정·군 조직 내에 후계체제(유일지도 체제)를 확립했다. 결국 김정일은 1973년 9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이듬해 2월 당 정치위원이 됨으로써 후계자로 확정됐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전반적인 국가·당 사업은 김정일이 관장하고 외교와 경제는 김일성이 챙기는 형국이 됐다.
이어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4월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오르며 계승 절차는 마무리됐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삼년상을 치른 김정일은 1997년 10월 당 총비서에 오른 데 이어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됐다. 김정일 정권의 출범이었다.
-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맞이하고 있다.
"등소평이 옳았소" 한때 개방정책에 관심보여
김정일은 1995~1998년 ‘고난의 행군’ 시절 주민 100만명 이상을 굶겨 죽였지만 ‘선군정치’를 앞세워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2000년 들어서는 외부 환경이 좋았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썼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냉각됐던 북·중 관계도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訪中)을 계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2000년 5월 집권 후 첫 방중 길에 올라 중국 지도부에게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직접 알렸다. 당시 베이징에서 김정일은 “등소평 (개방)노선이 옳았다”고 했다. 그 해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10월에는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한 조명록 차수가 평양과 워싱턴을 상호 방문했다. 2001년 1월 다시 방중한 김정일은 상하이를 방문해 “천지개벽”이란 말을 남겼다. 이후 김정일은 개방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2년 7월 성과급제 등 일부 시장경제를 도입한 7·1 경제개선조치를 발표한 데 이어 개성공단·금강산관광 개발 등에 속도를 냈다.
그러나 김정일은 유화 정책 뒷면에 핵개발과 대남 도발을 숨기고 있었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2차 연평해전을 일으켜 우리 해군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9년 6월 1차 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다. 김정일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다시 열어 대규모 경제 협력 등에 합의했다. 남한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 지원 등을 계속 받아내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퍼주기’ 대북 정책을 중단할 조짐을 보이자 우리측 당국자를 추방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쉴새 없이 쏟아냈다. 2008년 7월에는 금강산에서 우리 관광객이 북한군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2002년 평양에서 만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사진)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 악화·후계 불안에 천안함·연평도 등 강경도발
김일성 사망 이후 철옹성이던 김정일의 독재는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2개월여 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휠체어를 타고 공개활동에 나섰지만 2009년 들어서는 만성신부전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신부전으로 인한 요독이 뇌를 건드려 환각증세를 보일 정도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북한 내부에서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후계 논의가 이뤄졌고 김정일은 2009년 1월 삼남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정일 건강 악화와 김정은 후계 불안은 2010년 3월 우리 해군 장병 46명의 목숨을 빼앗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이어졌다. 흔들리는 체제 단속을 위해 군부를 더욱 중용했다. 이런 위기감을 이용해 2010년 9월 44년 만에 당 대표자회를 열어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그 후 1년 3개월여 만에 김정일은 눈을 감았다. 만 70년 10개월 1일을 살았다.
-조선일보,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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