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91)이 7일 오전 10시쯤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파란만장한 삶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그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노력한 실천적 지성으로 꼽힌다.
김 전 총장은 1920년 평북 강계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 게이오(慶應)대학(동양사학과)에 유학하던 그는 1944년 일제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장준하 등과 6000리 길을 걸어 중경(重慶)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특수 공작훈련을 받았다.
일본 패망 후 귀국을 미룬 채 중국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남경의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당시 그로부터 배운 양통방(楊通方) 전 북경대 교수 등 제자들은 중국 내 한국학의 주류로 성장했으며, 1992년 한·중 수교 때도 기여했다.
1949년 귀국한 김 전 총장은 고려대에서 아세아문제연구소와 중국학회 등을 조직, 중국학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 그가 펴낸 '중국공산당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 50여권의 저서는 일관되게 '세계 속 한국의 진로'라는 목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82년 고대 총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2년8개월 만에 강제 사퇴하게 된다.
- ▲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삶을 마감했다. 파란만장한‘대장정’은 실천하는 지성의 귀감으로 자리 잡았다. /허영한 기자
그의 학자로서의 '꼿꼿함'은 정치의 탁류(濁流)에 한 번도 몸 담그지 않은 데서 드러난다. 그는 자서전 '장정(長征)' 4권에서 ▲1948년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 ▲1960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 ▲5·16 이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원장관 제의 등을 물리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88년 1월 초 궁정동 안가에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당시)로부터 국무총리직을 제안받는 자리에서 5가지 이유를 들어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첫째, 노 당선자를 그동안 두 번 만났지만 잘 모르고 둘째,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셋째,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하는데 그 뜻을 이루기 어렵고 넷째,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며 노 당선자의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대학 총장 자리를 출세의 징검다리쯤으로 여기는 일부 '정치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돈과 권력을 향해 부나비처럼 뛰어드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이다.
고려대 총장 퇴임 후 그는 1989년부터 다시 중국을 찾아 북경대·복단대·절강대 등에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지원했다. 또 상해와 중경의 임정청사, 상해 윤봉길 기념비, 항주의 고려사(高麗寺) 등의 복원과 설립을 주도했다. 2001년 완간한 '장정' 5권에 대해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 공동체의 지식과 문화를 어떻게 높이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전범적 행록"이라고 평했다.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포장 등을 받았고 1992년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민영주 여사와 아들 홍규씨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실이며 발인은 10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조선일보, 201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