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가정

50대 한국 여성

하마사 2011. 1. 15. 10:06

 

여성학자 박혜란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뒷자리 젊은 여성이 인사를 했다. "가수 이적씨 어머니시죠? 어쩌면 그렇게 곱게 늙으셨어요?" 아들의 팬이라는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박혜란의 귓속에선 내내 '곱게 늙었다'는 말이 맴돌았다. '어쩌면 그렇게 고우세요?' 하면 될 것을 굳이 '늙었다'고 하는 게 괘씸하고 서운했다. 박혜란은 쉰다섯에 쓴 책 '나이듦에 대하여'에서 늙는 것을 부정하는 자신에게 놀랐다고 했다.

▶'여성잡지 갱년기 특집을 보니까 폐경을 맞는 여자들은 저녁 무렵에 근거 없는 불안을 느낀다던데… 저녁 무렵 언니가 하는 말은 거의가 하나마나 한 말이었다. 언니의 말은 노을이나 바람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고 멀게 들렸다.' 김훈은 단편 '언니의 폐경'에서 50대 여자의 푸석푸석한 몸과 쓸쓸한 내면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자매의 아파트 앞, 해질녘 서해에 다다른 한강은 황혼기에 이른 여자의 삶을 상징한다.

▶많은 50대 여성에게 가정은 삶의 보람을 얻는 보금자리였다. 살림과 자식 뒷바라지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아이들이 다 커서 곁을 떠나버리면 빈 둥지에 홀로 남은 어미 새처럼 허탈하다. 빈둥지증후군은 우울증으로 번지기 쉽다. 남녀와 세대를 통틀어 스트레스 환자가 가장 많은 것도 50대 여성이다. 2009년 인구 10만명에 355명꼴로 50대 남성 181명의 두 배에 가깝다.

조선일보가 여론조사기관들과 함께 10개국 사람들의 행복도를 조사했더니 한국의 50대 여성이 가장 낮았다. "불행하다"는 답이 37%에 이르러 덴마크인도네시아 50대 여성의 17%와 0%를 압도했다. 다른 나라 여성들이 자식들을 독립시킨 뒤 가뿐한 마음으로 자기 삶을 즐기면서 행복도가 치솟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비명이다.

▶50대 여성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어디로 갔느냐고. "나 지금 안식년 휴가 떠나요/ …/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문정희 '공항에서 쓸 편지'). 50대 여성들이 꿈꾸는 행복이란 공항에서 그런 편지를 쓰는 세상이 아닐까.

 

-조선일보 만물상, 20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