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가정

가훈의 반란

하마사 2011. 2. 5. 19:34

'가정헌법' 4000여개 살펴보니 '家訓의 반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서 '리모컨 뺏지 않기'로

'아빠는 독선 부리지 않기', '아이돌 그룹 노래 외우기'
'절대로 보증 안서기' 등 소통이 사랑 제치고 1위

고3 아들과 중3 딸을 둔 김수갑(51)씨는 요즘 소녀시대·카라·미쓰에이·2PM 같은 아이돌 가수 이름을 줄줄 외운다.

김씨 가족이 작년 말 만든 '가정 헌법' 때문이다. 여기엔 "아빠는 아이돌 그룹에 관심을 갖고 노래를 외워 부른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빠가 우리들 관심사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아들·딸의 요구 때문이었다.

김씨는 "아내와 나는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늘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며 "가정 헌법을 만들고 나서는 아이들과의 대화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법무부가 2009년 3월 시작한 '가정 헌법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가정이 올 들어 4000가정을 넘어섰다. 가정 헌법은 21세기형 가훈(家訓)이다. 하지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딱딱한 한자성어는 없다. 과거 가훈을 정할 때는 할아버지·아버지의 의견이 절대적이었다면 가정 헌법을 만든 가정은 "자녀의 발언권이 셌다"고 했다.

2010년 만들어진 3000여 가정의 가정 헌법에서 자녀가 지켜야 할 조항이 차지하는 비율은 36%, 아빠가 지켜야 하는 조항이 25%, 엄마가 지켜야 할 조항은 23%였다.

아빠가 지켜야 하는 조항 중에는 "절대로 보증을 서지 않는다"는 경제관련 조항도 있었고, "고부 갈등에서 엄마 편이 돼 준다" "리모컨을 뺏지 않는다"는 '가족생활 윤리' 조항도 있었다. 헌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적당한지 잠깐 고민하게 하는 조항도 있다. "화장실 변기 커버는 사용 후 항상 내려놓는다" "엄마 얼굴에 대고 방귀 뀌지 않는다" 같은 것들이다.

엄마가 지켜야 하는 조항으로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자제한다"부터 "세금·공과금은 기한 내에 납부한다", "화가 나도 소리지르지 않는다" 같은 것들이 있었다.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조항 가운데는 "한 달에 한 번 서로 얼굴에 팩 해주기"처럼 '닭살커플' 조항이 있는가 하면 "카드 명세서 서로 공개하기"처럼 부부싸움 예방의 지혜를 담은 조항도 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 구입을 위해 노력하자"고 정한 집도 있었다.

2010년 3000여 가정 헌법 가운데 43%에선 '소통'이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등장했다. 사랑·화목·건강·존중·신뢰 같은 단어들도 빈도가 높았다.

2009년에 만들어진 1000여 가정 헌법에선 '사랑'이 45%로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한 키워드였다. 핵가족화와 맞벌이 부부 증가로 가족 간 대화부족이 문제가 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듯, '하루 한 번 안아주기' '한 달에 한 번 소풍 가기' '아빠는 독선 부리지 않기' 같은 가족 간 소통 증대방안이 가정 헌법에 많이 등장했다.

법무부는 가정 헌법을 만들기를 원하는 가정이 법질서 홈페이지(lawnorder.go.kr)에 접속해 자신들이 만든 가정 헌법을 올리면, 무료로 액자에 넣어 보내주고 있다.

 

-조선일보, 20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