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지난주 주보속에 일년동안 감사의 내용을 기록하여 헌금봉투에 함께 드리도록 감사카드가 들어있었다.
일주일 동안 생각하며 감사제목을 적어서 헌금과 함께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감사노트를 쓰고 있다는 이유로 미루다가 아침에야 생각이 나서 감사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감사노트를 쓰는 것이 훈련이 되어 이제는 감사의 내용을 쓰기기 한결 수월해졌다.
무엇이든 훈련을 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감사도 훈련을 하면 감사하기가 쉬워진다.
오늘 설교를 듣는 중에 조건과 환경을 보고 감사하는 것은 쉽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감사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가나안의 소출이 아니라 소출을 얻을 수 있는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다.
누구나 삶에 기근과 흉년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에 있으면 광야와는 달리 열매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가나안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했듯이 오늘도 광야같은 거친 삶의 언덕을 지날 때가 있다.
지쳐 쓰러져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 때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원초적인 감사, 근원적인 감사가 필요하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그런 감사이다.
훈련없이 일순간에 될 수는 없다.
평소에 감사의 훈련이 필요하다.
수 십번, 수 백번, 수 천번 감사를 연습하면 그런 순간이 닥칠 때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감사카드를 쉽게 쓰면서 자기합리화를 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감사훈련이 감사를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감사의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