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률 1위 놓고 '슬픈 경쟁' 벌이는 한국과 헝가리
헝가리, 자본주의 도입 후 청년실업에 물가 치솟고 복지 개념마저 무너져
한국도 IMF 위기 겪으며 빈부격차로 박탈감 커져 10년새 노인자살 3배 증가
1935년, 1차 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헝가리에서 작곡가 뢰죄(Rezso) 세레스가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발표했다. 우울한 단조 선율의 이 노래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레코드 발매 8주 만에 187명이 이 곡을 듣고 잇따라 자살한 것이다. 사람들은 '헝가리 자살 노래(Hungarian suicide song)'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헝가리 정부도 방송 금지 조치를 내렸다.우울한 시대 분위기가 만들어낸 극단적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헝가리는 지금도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 헝가리에 필적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한국과 헝가리는 최근 10여년간 각종 자살률 통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슬픈 1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를 인용, 2008년 한국이 자살률 세계 1위(인구 10만명당 24.3명), 헝가리가 세계 2위(21.0명)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남성 자살률은 헝가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같은 해 OECD 통계에 따르면, 헝가리의 남성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6.3명으로 1위였고, 한국(32명)은 2위였다.
왜 우리와 헝가리는 이런 오명을 나눠 가지게 됐을까. 기자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1년 특파원 생활을 한 경험을 토대로 보면, 두 나라의 자살 원인은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인구(1002만명)가 한국의 5분의 1쯤 되는 헝가리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해 어순(語順)이 같고 국민의 95%가 아시아 훈족(族)의 후예라는 마자르족이다. 공산주의 시절, 동구권에서 가장 잘살았던 헝가리는 1989년 자본주의·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이후 빈부격차와 고실업이라는 새로운 병을 앓고 있다.
헝가리 통계청(KSH)에 따르면, 지난해 헝가리의 취업률은 55.4%로, EU(유럽연합) 27개국 중 몰타를 제외하고는 취업률이 가장 낮다. 특히 청년(15~24세) 실업률이 심각해, 지난해 4분기에는 무려 27.8%에 달했다. 헝가리 사회에 만연한 실업자·구직자들이 패배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고등교육을 받은 실업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런 좌절감이 높은 자살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6월 부다페스트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만난 에벨링(Everling) 야노시(46)씨는 기자 취재에 "영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헝가리어 가운데 어느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편하냐?"고 되물었다. 박사 학위 두 개를 포함, 6개의 학위를 갖고 있는 그는 10여년간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하다가 지난해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직장을 잃었고, 몇 달째 재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채 직업소개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한국 역시 조기퇴직·명예퇴직 등으로 일자리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특히 청년실업은 위험한 수준이다. 지난 7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상반기 청년층 '체감(體感)' 실업률은 무려 23%로, 공식적인 청년 실업률 8.6%의 세 배에 육박하며, 15~29세 청년층 4분의 1이 사실상 실업 상태라고 분석했다.
◆깊어진 빈부 격차
자본주의 도입 이후 헝가리 사회는 부유해졌지만, 개개인의 삶의 질이 더 높아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소득 증가폭 이상으로 물가가 올랐고, 2004년 헝가리의 EU 가입 이후 물가의 고공행진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한국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 엘테대학에서 취재 중 만난 이 학교 학생 라브리누크(Lavrinuk) 레벤테의 설명이 실감 난다.
"20년 전 내 아버지는 한 달에 4000포린트(약 2만2000원)를 벌었고, 지금 나는 아르바이트로 월 12만포린트(약 70만원)를 번다. 그때 아버지는 고급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해도 약 3포린트, 월급의 1000분의 1만 쓰면 됐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맥도널드 햄버거로 점심 한 끼를 때우려면 1500포린트, 소득의 90분의 1이 들어간다."
빈부 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다. OECD에 따르면, 체제 전환 직후인 1990년 헝가리는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273이었지만, 2005년에는 0.291로 높아졌다. 부다페스트 서부 기차역에는 늘 노숙자들이 10여명씩 모여 있지만, 그곳에서 10여분만 나가면 구찌·루이비통 등 명품 매장이 모여 있는 바치(Vaci) 거리가 나온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지난 7월 '자살대국 한국'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IMF 이후 한층 심해진 한국의 빈부격차를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한국은 1997년 9109명이던 자살자가 IMF 이후 1만2458명으로 크게 늘었고,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역시 97년 19.8명에서 이듬해 26.9명으로 급증한 이후 줄곧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호 못 받는 노후
헝가리는 연령층 중에서도 노인층 자살이 유독 높다. 사회주의 체제에 기반을 둔 국립병원은 여전히 무상 의료를 원칙으로 하지만, 정부 재정 지원 부족으로 간호 인원은 부족한 반면, 환자들은 비싼 사립병원 대신 국립 병원으로 몰려 치료를 받기 위해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체제 전환 후 '국가가 보호해 준다'는 복지 개념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연금은 턱없이 오른 물가 수준에 훨씬 못 미쳐 먹고살기가 빠듯하고, 체제 전환 이후 해고된 사람도 많아 노후를 제대로 대비하기도 어려웠다.
한국 역시 취약한 사회 안전망과 경제난, 가족 해체 등으로 인해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65세 미만 연령층보다 약 4배나 높고, 지난 10년 사이 노인 자살이 3배 증가했다.
하지만 헝가리와 한국은 공적(公的) 자살방지 대책이 미흡하다는 점마저 닮았다. 지난해 한국 자살예방협회가 미국·영국·호주 등과 한국의 우울증·자살 상담과 예방 프로그램을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가 자살을 시도한 사람에 대한 관리 수준이 꼴찌인 것으로 평가됐다.
고려대 의대 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일본에서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정신건강센터가 우울증 환자나 자살 사고가 있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관리하자 자살자가 40%까지 감소했다"며 "우리도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우울증 관리를 치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