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마당발로 소문난 친구가 전화를 해 교회근처로 오는 중인데 점심을 같이먹자고 했다.
동문회와 동창회 한다고 문자연락은 받지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차라 약속을 했다.
근처에 있는 친구들과도 약속을 한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친구도 있었다.
나처럼 염색을 한 친구는 세월을 가리고 있었지만 머리가 반백인 친구도 있어 흘러간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목사가 되다보니 친구들 모임에 자주 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
모임시간이 예배시간과 겹치거나 교회일정과 중복되어 참석하기가 쉽지않다.
여러번 결석하다보니 나중에는 시간이 있어도 불참하게 된다.
솔직히 교회모임이 아닌 다른 사회모임에 참석하면 술과 담배로 찌든 분위기라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술자리에 앉아서 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새벽기도 부담감 때문에 중간에 일어서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러다보니 차츰 학교나 사회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멀어지고 신앙안에서 만났던 친구들과의 모임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때로는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만 만나면 내가 아는 불신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소개받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 상가집에 갔을 때 어떤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목사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사회의 여러 모임에 참석하여 불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교회의 문턱을 낮추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때로는 손해가 될지라도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그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가능하면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섯명의 친구들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내가 빠졌으면 교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겠지만 나로 인해 자연히 대화의 주제속에 포함되어 질문도 하는 것을 보면서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적으로 전도를 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신앙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간접전도가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나 만났어도 그냥 친구였다.
3년동안 서로 잘 모르고 지냈다할지라도 고등학교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경험을 가진 것만으로도 말을 트고 막역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서로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수, 학원장, 작은 회사의 임원들, 목사로 그동안의 삶의 목표와 방향이 달랐지만 3년의 짧은 세월을 함께 살았던 공감대가 서로를 융화시키고 있었다.
또 언제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년 동안의 비슷한 경험이 친구들을 이렇게 가깝게 만들 수 있다면
한 교회에서 수년 혹은 수십년동안 쌓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인가?
그런데 실제로 고등학교 동창들보다 못한 관계는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르면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생각이 달라서 분리되면 원수처럼 멀어진다.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고 하면서도 동창생보다 못한 것이 나와같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공동의 경험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영원토록 천국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부족함이고 한계인지도 모른다.
설교시간에 사랑을 외치고 돌아서서 미워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목사로서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