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실종아동 전단에 찍힌 1976년 당시 김영호(가명)씨 사진. /실종아동전문기관 제공
11살때 미아가 된 아들,
자신을 찾는 전단 보고 노부모와 극적인 재회
서울역 놀러갔던 11세 소년, 중년 돼서야 부모 품에…
동네 형들과 어울려 전주가는 기차 탄게 화근
낯선곳서 모진고생 성장…
우연히 본 실종전단 덕에 DNA 검사로 부모 확인
실종아동 상봉 최장기록
11살 때 길을 잃고 가족과 헤어진 어린이가 실종 34년 만에 45세의 장년(壯年)이 되어 부모와 재회했다. 국내에서 실종아동이 가족과 상봉한 사례 중 실종기간 최장(最長) 기록이다. 아들이 사라졌을 때 41세였던 아버지는 75세의 노인이 되고도 포기하지 않고 애타게 아들을 찾고 있었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은 1976년 서울에서 실종된 뒤 전북 전주·익산을 떠돌며 자란 김영호(가명·45)씨가 실종아동 전단과 DNA 검사를 통해 서울 구로구에 사는 아버지(75)와 혈연관계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은 보건복지부의 위탁을 받아 다양한 실종아동 찾기 사업을 벌이는 곳이다.
김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나는 마음에 맺힌 게 많은 사람"이라며 "어려서 길을 잃은 뒤 전쟁처럼 부대끼며 살았는데 부모님을 다시 만나니 '기쁘다' '좋다' 이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들떠 허공을 걷는 것 같다"고 했다.
김씨 가족은 서울 상도동에서 가난해도 단란하게 살았다. 행상을 하던 아버지는 첫 부인이 장남 김씨를 낳다 숨진 뒤 여러 해 동안 혼자 살다가 지금 부인과 재혼해 딸을 낳았다. 늦게 얻은 딸 돌잔치로 집안이 화기애애하던 때 불행이 덮쳤다. 아침밥 먹고 놀러 나간 아들이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김씨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서울역까지 놀러 가서 별생각 없이 전주 가는 기차를 탔다"고 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김씨는 경찰관에게 부모와 자기 이름을 댔지만, 경찰은 "그 정도 정보로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인터넷도 없고 전화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구두닦이 10대 소년이 오갈 데 없는 김씨를 거뒀다. 그때부터 김씨는 구두닦이 형이 지어준 이름을 쓰며 살았고, 김씨를 딱하게 여긴 경찰관이 새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어려서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급해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야간 중학교를 끝으로 더 배우지 못했다. 망태를 메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에 끼어 10대를 보냈다. 20대에는 시골 강가와 도랑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도매상에 넘겼다.
30대엔 전북 익산에서 직접 민물고기 도매상을 운영했다. 한때 서울·부산·대구·광주에서도 주문이 들어올 만큼 장사가 잘됐지만 수입 물고기가 쏟아져 들어와 사업이 기울었다. 3년 전 가게를 닫은 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해 악착같이 두 아들 학비를 댔다. 큰아들(20)은 고교 졸업 후 10월에 군 입대한다. 둘째 아들(18)은 고2다.
김씨는 "젊어선 잊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헤어진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옛날 살던 동네에 찾아가 봤다. 주민센터는 "셋집 살던 사람들 기록은 5년밖에 보관하지 않아서 기록이 없다"고 했다.
김씨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입학생 기록은 전부 있지만 전학생 기록은 빠진 게 많다"며 "당신 이름은 기록에 없다"고 했다. 김씨는 내내 다른 동네에 살다가 실종되기 얼마 전 상도동에 이사 온 전학생이었다. 애초에 입학한 초등학교가 어디였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실종아동 명단도 살펴봤지만 헛수고였다.
김씨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동안, 부모도 김씨를 찾고 있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실종 직후부터 4년간 생업을 전폐하고 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자포자기한 김씨 아버지는 "아들을 못 찾을 바에야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겠다"고 울부짖었다. 김씨 어머니(65)는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남편을 위로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혹시라도 새엄마인 내가 섭섭하게 대해 아들이 집을 나간 건 아닐까' 자책감이 있었다.
부부는 김씨 밑으로도 딸(35)과 아들(31)을 뒀다. 둘을 키우면서도 장남 김씨를 되찾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실종아동 찾는 모임에 부지런히 나갔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이 생기자 아들의 신상정보를 등록했다.
김씨는 지난 6월 주민센터를 지나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이 배포한 실종아동 전단을 봤다. 아버지 이름과 자기 이름, 실종된 시기가 일치해 곧바로 기관에 연락했다. 경찰이 DNA를 대조하는 동안,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가 나이 든 부모와 세 차례 상봉했다. 늙은 아버지는 목이 멨다. 흰 머리가 돋은 아들, 처음 본 손자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남편이 작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죽기 전에 꼭 아들을 만나야 한다'고 부쩍 노심초사했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경찰은 김씨 아버지와 김씨에게 DNA가 일치한다고 최종 통보했다.
정원만 실종아동전문기관 소장은 "김씨 부모처럼,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7년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식을 찾아 헤매는 실종아동 부모가 전국적으로 130여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이들은 정 소장을 만날 때마다 "내 자식이 아니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그래야 희망을 갖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은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매년 실종아동 전단 3만7000부를 제작해 전국 경찰서와 시·군·구청, 주민센터, 어린이 보호시설 등 전국 5900여곳에 배포하고 경찰과 협력해 다양한 실종아동 찾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아이폰용 응용프로그램 '미싱차일드'(Missing Child)도 무료로 보급 중이다.
정 소장은 "실종아동이 34년 만에 부모를 찾은 것은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라며 "김씨 가족의 상봉은 수많은 실종아동 가족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희소식"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20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