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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한 일전 승부는 이제부터다

하마사 2009. 12. 29. 16:16
김기천 논설위원

"삼성의 일본 위협론은 분명히 과대 평가된 것이다. 적어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 전자산업은 5년 내에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삼성전자는 계속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데 일본 기업은 그렇지 못하다."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삼성전자 임원으로 재직했던 요시카와 료조라는 일본인이 한 말이다. 앞의 발언은 2004년 일본 시사주간지 아에라, 뒤의 발언은 최근 닛케이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다. 삼성의 일본 위협론에 대한 평가가 5년 새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4조23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소니·파나소닉·히타치제작소 등 일본의 주요 9개 전자회사의 영업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2배 이상 많다. 일본에서 '삼성의 독주'라는 한탄이 나올 만하다.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앞으로 몇년 내 반도체시장 규모를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2차전지 시장에서 삼성SDILG화학은 일본 업체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세계시장 점유율 2위와 5위에 올랐다. 특히 전기자동차에 들어가는 대형 배터리시장에선 이들 한국 기업이 더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다.

LCD(액정표시장치)와 LED(발광다이오드) TV시장에선 삼성전자LG전자가 소니·파나소닉·샤프 같은 일본 기업들을 압도하고 있다. LCD의 핵심 소재인 편광판시장에선 LG화학이 닛토덴코·스미토모화학 등을 제치고 올해 처음으로 세계 시장 1위에 올라섰다. 포스코는 그동안 신일본제철 제품만을 고집해왔던 도요타에 자동차용 강판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현대·기아차는 올해 영업이익 3조원으로 세계 자동차업계 1위에 올라설 것이라고 한다.

국내 기업들의 이런 약진에 힘입어 한국은 올 들어 11월까지 377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내면서 일본의 240억달러를 크게 앞질렀다. 한국의 연간 무역 흑자 규모가 일본을 뛰어넘는 것도 올해가 처음이다. "일본을 따라잡자"는 한국 경제의 오랜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엊그제는 아랍에미리트에서 한국형 원전 첫 수출 계약에 성공했다는 낭보가 날아들기도 했다. 2009년은 한국 경제사에서 최초·최고의 기록을 여럿 남긴 해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와 기업들이 올 한 해 두드러지게 선전(善戰)한 데는 실력 이외의 다른 요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원화 약세, 엔화 강세'에 따른 환율효과의 힘이 컸다. 일본 기업들이 선진국 고가제품 시장에 주력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일찍부터 신흥국 시장에 뛰어들어 기반을 다져온 것도 도움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선진국 시장이 크게 위축되고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국 시장의 비중이 커진 덕을 본 것이다.

2010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원화 가치가 계속 오르고 있어 더 이상 환율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더욱이 일본 기업들은 올해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신흥시장국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볼륨 존(volume zone)' 공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주력 산업이 대부분 겹치는 한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실력을 겨루게 되는 것이다. 부품 소재산업 육성과 원천기술 확보, 브랜드 이미지 등에서 아직 역부족인 한국으로선 매우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과의 정면승부를 늦추거나 피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제 한·일전(韓·日戰)'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배수진의 각오로 새해를 맞아야 한다.

 

-2009/12/29,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