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세까지 사는 세상, 20년 내에 올 겁니다"
"바이오 분야 종주국 가능…개발시간 단축 위해美 ACT社 원천기술도 구매
노화된 피부 재생 가능해화장품으로 곧 나올 것"
"자기 양수·태반 보관하는 바이오 휴먼뱅크가 생활보험 역할"
비서는 "회장님이 채용 면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기다리다 지쳐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차광렬(車光烈·57) 차병원 그룹 회장과 마주쳤다. 파란색 상의에 파란색 타이를 맨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옆으로 확대 복사한 배우 폴 뉴먼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교수를 뽑는 데 85명이 지원했어요. 16명이 최종 면접에 올라왔어요. 사흘 동안 면접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게 좋아요. 새로운 분들과 만나는 것도 좋고요. 지적(知的)으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잖아요. 매일 이러고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 1시간이 지나도록 차광렬 회장은 웃 지 않았다. 차 회장을 웃기기 위해 홍 보팀 직원이 동원돼 차 회장 앞에서 온갖 재담을 늘어놓았지만 갈수록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기자가 “한참 생각해야만 웃을 수 있는 농담 은 안 된다”고 하자 그제야 차 회장 이 웃음을 터트렸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한국의 빌 게이츠' '병원을 살리는 의사'가 그의 별명이다. 그의 영토(領土)는 병원(13개)·회사(9개)·대학(1개)·연구소(5개)다. 1979년 서울 강남구 역삼1동에 땅 400평을 산 지 30년 만이다. 호기심이 그를 '의료계의 칭기즈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986년부터 시험관 아기와 관련된 헤아릴 수 없는 성과를 국내에서 최초로 냈다. 세계 최초의 특허(特許)도 2개나 된다. 타임, 피플, 뉴스위크 같은 매체의 표지 인물로도 등장했다. 세계적인 상(賞)만 12개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새 목표를 찾는 사냥꾼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욕심쟁이가 마침내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히딩크 감독의 어록(語錄)과 비슷한 말을 했다. "할 일은 많은 데 시간이 없어요. 빌 게이츠요? 그와는 다르죠. 그는 돈이 많아 언제든 하고 싶은 일을 하잖아요. 저는 돈이 없어 하고 싶은 일 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3시간 동안 그와 대화하면서 수술실에서 집도(執刀)할 때 그의 모습을 알 것 같았다. 말은 정확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머리 회전이 엄청났다. 질문에 대한 응답이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명의(名醫)는 기자의 노트 필기 속도를 높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강남 차병원 터를 연세대 의대 레지던트 시절에 지도(地圖)보고 골랐다면서요.
"아버지(차경섭·車敬燮·CHA의과학대 이사장)가 3억원을 주셨어요. 출자금이었습니다. 1979년 강남은 허허벌판이었어요. 저기 창 밖에 제일부동산 보이지요. 거기 들러 4등분한 강남 지도의 중심을 짚으니 이 자리였어요. 병원은 입지(立地)가 중요합니다. 평당 75만원에 400평을 샀어요. 테헤란로는 그때도 비쌌어요. 평당 120만원이었거든요."
―땅만 산 겁니까?
"시험관 아기로 유명한 미국 남가주(南加州)대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레지던트 끝나면 그걸 배워야겠다' 하고 마음 먹었어요. 그때 대우건설 장영수 상무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병원을 지어줄 테니 돈은 나중에 갚으라는 겁니다. 당시 대우건설이 매출액 990억원이었대요. 10억원을 채워 1000억원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파격적인 조건이었지요. 유학은 1984년에 병원을 6개월 운영하다 갔습니다."
―경기도 분당 병원도 투자에 성공한 케이스지요.
"1992년 신도시 건설 붐이 일 때였습니다. 그때 분당도 벌판이었어요. 병원 부지가 5개였는데 누구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땅값을 3년에 나눠내는 조건으로 평당 200만원에 3000평을 샀죠. 강남 차병원은 전문화를 하고 분당에는 종합병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때도 대박을 쳤죠.
"3개월 만에 900베드(Bed)가 다 찼어요. 신도시 주민은 많은데 병원은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서울대병원은 한참 후에 생겼어요."
―2004년에 미국 LA 할리우드 장로병원도 8000만달러에 인수했는데 지금 가치는 4억 달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LA 할리우드 장로병원이 미국 태닛그룹 소유였어요. 캘리포니아주에 태닛 소유의 병원만 100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병원의 보험료 과잉 청구가 드러났어요. 전(全) 병원이 조사를 받게 되자 태닛이 당황해 주(州) 전체에서 철수를 계획했어요. 가격이 마구 내려갔습니다. 전에 운영하던 사람이 1억3000만달러에 인수했다는 데 저는 8000만 달러도 안 들었습니다."
―LA 진출은 왜 하게 된 겁니까.
"강남 차병원이 당시 세계적인 특허를 2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난소에 미성숙 난자를 성숙시키는 것, 냉동 난자를 이용해 임신율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새 경험을 하고 싶어 1998년 미 컬럼비아대에 클리닉을 열었습니다. 한 층을 제가 썼어요. 콩고 의사가 서울대병원 1층에 자기 진료실을 가진 것에 비교될만한 거지요. 3년 정도 성공적으로 운영한 뒤 LA로 갔습니다. 그러다 욕심이 생겼지요. 미국 의료시스템을 알려면 병원 인수가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병원 인수가 쉽습니까.
"무척 고생했어요. 2003년 말부터 인수 작업을 시작했는데 변호사들이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병원 인수 후에는 정상화시키는 데 2년이 걸렸어요. 한국에 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병원을 인수해보니 어떻든가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2주 동안 그곳에서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LA병원 의사 20명을 의대 교수로 임용했습니다. 학생들이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배우면서 프라이드를 느낀데요."
―국내 병원은 강남과 분당 외에 경북 구미와 대구에 있더군요. 영남 지역의 남아(男兒)선호를 고려한 선택이었습니까.
"구미는 CHA의과학대 전신(前身)인 포천중문의대 설립 때 교육부와 약속한 사항이었습니다. 의대 설립을 허가받는 조건이었어요. 독도(獨島)에 지으라고 했어도 지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대구는 저와 가깝게 지내던 분이 상황이 어려워져 인수한 것입니다."
―CHA의과학대는 왜 포천에 만든 겁니까.
"교육부에서 의대 설립자 모집 공고를 냈는데 준비가 부족했어요. 일단 지원서를 내고 부지를 물색했지요. 몇 군데를 다녔는데 포천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한반도의 중심이잖아요. 중문(中門)이라는 이름도 '한반도의 가운데 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5만평인데 어머니가 10년 동안 정성껏 나무 심고 가꾸셨어요. 정원처럼 예뻐 학생들이 좋아합니다."
―만드는 병원마다 성공하는 걸 보니 투자의 귀재(鬼才) 같습니다. 고민하지 않고 결정하는 스타일입니까?
" '하느님이 보우하사…'고요. 왜 고민이 없겠어요. 하나하나 다 어렵게 결정하는 건데요. 의사들에게 신문 경제면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돈 빌려 병원을 세운 뒤 이자와 원금을 갚고 이제 됐다 싶으면 또 돈을 빌리지요. 버는 것과 빚 갚는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정부는 올해 차병원 그룹의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공식 승인했다. 국내 처음이다. 차병원 그룹과 줄기세포의 인연은 꽤 깊다. 올해 세계최초로 임상 적용이 가능한 '역(逆)분화 줄기세포'를 만들었고 성남시와는 '국제 줄기세포 메디클러스터' 설립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2008년 차병원 그룹은 국내 최대의 배아줄기세포 주를 만들었다. 2007년에는 그룹 내에 통합 줄기세포 치료연구센터를 개설했다. 2006년에는 제1회 국제줄기세포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황우석(黃禹錫) 박사 파문 이후 침체됐던 국내 줄기세포 연구의 선두주자로 나선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1998년부터라고 봐야지요. 11년 됐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차병원은 1986년 민간 병원 최초로 시험관 아기 출산에 성공했습니다. 1988년에는 세계 최초로 폐기되는 난소를 채취해 미성숙 난자를 체외 배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98년에도 역시 세계 최초로 유리화 동결 기술을 이용한 인간 난자 은행을 만들었고 냉동 난자 시험관 아기가 출생했지요. 다 줄기세포와 관련 있는 겁니다."
―황 박사 사건 후 미국, 일본은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약진했지요.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바이오 분야에서 우리가 기술 종속국(從屬國)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원천기술 개발보다 사업화에 더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연구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연구는 해야죠.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삼성전자가 모든 기술을 다 자체 개발했습니까? 필요한 원천기술이 있으면 사 와야 합니다. 그걸 개발하느라 시간 낭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국에 ACT라는 회사가 있어요. 대단한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대부분의 기술을 사들였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우리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무슨 제품인데요.
" '에버셀(Ever Cell)'이란 화장품입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포성형물질로 만든 노화(老化)된 피부를 재생시켜주는 화장품입니다. 안티 에이징(Anti-Aging)이라고도 하지요."
―바이오 분야에는 하도 사기꾼들이 많아서 신제품 낸다면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하, 우리 병원에서는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LG생활건강에서 10월쯤 '더 휴'라는 이름으로 나올 겁니다. 그쪽에서 놀랐어요. 이런 효능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일본 도쿄(東京)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도 호평받았습니다. 할리우드에도 진출할 생각입니다."
-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그렇게 좋은 제품인데 왜 직접 판매하지 않습니까.
"LG와는 2년 계약을 했습니다. 총판(總販)개념이지요. 우리가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데 화장품 팔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화장품은 아무래도 여성용이지요. 저 같은 사람 위해서 발모제 같은 걸 만들 생각은 없습니까.
"아, 에버셀이 대머리 치료제가 될 가능성도 있어요. 원리는 같거든요."
―줄기세포가 만능(萬能)입니까.
"인체에서 줄기세포에 대한 거부 반응이 없는 곳이 두 군뎁니다. 뇌 신경계와 눈의 망막(網膜)이죠. 망막에 줄기세포를 심으면 실명(失明)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임상 1상을 시작했는데 망막은 임상에 소요되는 시간도 짧아요. 늦어도 내년 중반까지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망막 관련 시장 규모가 세계적으로 몇 십조 됩니다."
―줄기세포 외에 '인공혈액'이나 '바이오 인슈어런스(Bio-Insurance)'에는 왜 관심을 갖는 겁니까.
"시간이 갈수록 혈액기증이 줄어들 겁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문제도 심각하지요. 지금은 자동차보험, 화재보험만 들잖아요. 앞으로는 자기 양수와 태반을 보관하는 바이오 휴먼뱅크가 더 중요해져요. 생명보험 역할을 하는 거죠. 사람은 나이가 들면 세포 분화가 둔화됩니다. 어렸을 적의 양수와 태반이 절실해지는 거죠."
―그렇게 다양한 연구를 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우리 병원 의사 개개인이 하버드 병원 의사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우리 병원 불임센터가 세계 최우수 논문상을 6번이나 탔어요. 하버드 병원보다 낫지요. 병원과 대학과 의료회사가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줄기세포 연구하면서 타 분야 공부도 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의사들이 약(藥)을 몰라요. 약사들은 치료를 모르고요. 자기 분야만 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없어요. 저는 연구와 교수와 임상과 돈을 강제 결혼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차 회장의 고향은 평북 선천(宣川)이다. 그랬던 그의 집안이 전라도에서 잠시 머물게 된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조부(祖父)는 과거시험을 보러 왔다 덜컥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7대 독자였던 그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얼마 뒤 고향을 등져야 했다.
전북 정읍으로 내려왔던 할아버지는 다시 교회를 개척하겠다며 이북으로 갔다. 그의 아들 차경섭은 세브란스 의대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남았다. 차 회장의 아버지 차경섭 이사장은 1960년 서울시 중구 초동 옛 스카라 극장 옆에 차 병원을 세웠다. 지금 차병원 그룹의 모태(母胎)다.
―차 병원이 미역국 맛 좋은 것으로 유명했지요.
"지금도 미역국을 산후(産後) 최고 음식으로 치잖아요. 어머니(장보섭)가 새벽부터 인근 시장에서 장을 봐왔어요. 콩으로 메주를 쑤고 간장을 담근 뒤 장독에 숙성시켰습니다. 미역은 부산 기장에서 따낸 최고급 품이었습니다. 그 맛이 산모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퍼졌지요."
―강남 차 병원 옥상에 간장 독이 즐비했다는 데 지금도 있습니까.
"있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직접 간장을 담급니다. 미역국 소문이 미국에까지 났어요. 미국으로 간장과 미역을 공수(空輸)하기도 했습니다."
―차 병원의 명성을 미역국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강남 차 병원에서 처음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할 때였어요. 지금은 쉽지만, 당시는 굉장히 어려운 시술이었어요. 미국에서 알던 빌 이(Bill Yee)라는 중국계 미국인 의사를 한국으로 데려왔어요. 10~20명씩 미리 예약받은 환자 시술을 그가 했어요. 나중에 제가 복강경을 이용한 난관 복원 수술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 후에는 그가 제게 배우러 왔지만요."
―좋은 의사를 확보하는 비결이 뭡니까.
"성공에 따른 대우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는 가장 우수한 인력을 계속 스카우트했어요. 제가 솔선수범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부여해야 합니다. 초기 멤버들이 아직도 병원에 있어요. 25년을 함께하고 있는 겁니다."
―1남2녀의 장남이지요. 아버지 뜻으로 의사의 길을 택한 겁니까?
"집안에 의사가 많아요. 20명은 될 겁니다. 이북 출신들은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강남 차 병원이 불임으로 고통받는 부부들에게 많은 희망을 줬지요. 당시에 불임은 가정에 큰 문제였죠.
"불임 부부를 보면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아기 못 가져 이혼도 많이 했어요. 우리 병원에 불임환자들이 전국에서 다 왔어요. 10번 만에 임신한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눈물을 흘리고 난리가 났지요. 그때 낳은 아기가 스무살이 넘었을 겁니다."
―정신없이 일했겠군요.
"하루에 환자 100명을 본 적도 있습니다. 아침 8시에 현미경 수술 한 건 하고 시험관 아기 수술 2~3번 하고 외래 환자 보는 거죠. 그러다 이렇게 팍 삭은 겁니다."
―시험관 아기가 여성에게 고통을 주지요. 강제 배란을 시켜 수정(受精)시키고 잘 착상(着床)이 안 되면 돈만 날리잖습니까.
"요즘은 성공률이 40%로 높아졌어요. 처음에는 10% 정도였습니다. 분당 차 병원은 성공률이 47%나 돼요. 저희는 첫 번째 시술비용은 다른 병원과 비슷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절반만 받아요. 환자 보상(補償) 차원입니다."
―의사들이 부럽다가도 안돼 보인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치과의사는 평생 남의 입(口)만 보잖아요. 산부인과 의사도 그렇지 않은가요.
"일에 몰두하면 그런 것을 의식할 틈이 없어요. 무감각해지는 거죠. 의대생들이 시체 해부하다 옆에서 김밥 먹는 것도 비슷한 겁니다. 산부인과는 다른 매력도 있어요. 생명의 신비랄까, 참 재미있습니다."
―평생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 척 보면 여성의 상태를 알 정도가 됐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요즘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0대 때 한참 수술을 많이 했는데 돌이켜보면 기계적으로 했다고 할까, 인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부분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녀가 3명 있지요. 다 차 병원에서 출산했나요.
"그럼요. 수술은 가장 믿는 분에게 맡겼어요."
끝없이 영역을 개척하는 그에게 '원래 그렇게 욕심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요. 의사들은 다 그래요. 100개 베드가 있는 병원이 있으면 그 다음은 500베드, 1000베드죠. 대학도 만들고 싶고 외국에도 진출하고 싶어집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목표가 원대했습니까.
"지금의 제 목표는 의료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예요. 제가 처음부터 그런 소리 했으면 사람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했을 걸요? 살아오면서 점점 꿈이 커지는 거지요."
―의학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겁니까.
"지금까지의 병원은 치료만 하는 거였습니다. 앞으로는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게 병원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그러려면 뭐가 필요한데요.
"연구, 임상(臨床)뿐 아니라 대체의학도 연구해야 합니다. 음식, 생활습관도 바꿔야 하고요. 우리는 10년 전부터 그걸 연구해왔어요. 칼로 째는 식의 공격적인 서양 의료계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경영난에 빠지자 사재(私財) 400억원을 대학에 기부했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지금까지 들으면 성공 일변도인데 경영이 어려운 적도 있었나요.
"잘못된 보도입니다. IMF 때 오히려 환자가 10% 늘었는데요. 불황 때는 출산율이 높아져요. 그해 컬럼비아대에 갔을 때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어요. 한국이 외환위기라니까 너도나도 '한국이 어려워서 도망 온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저 같으면 40억원만 있어도 그냥 놀고 먹을 텐데.
"말이 쉽지 얼마 못 가요. 한번 놀아보세요. 얼마나 괴로운가. 재산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생명이 없으면 돈이 무슨 필요 있겠어요."
―병원과 연구기관이 해외에 산재해있으니 외국에서 보낼 날도 많겠군요.
"1년에 7~8개월은 외국에서 보냅니다. 저는 결재를 거의 안 해요. 미국식 이사회제도라고 할까, 경영자에게 권한을 주는 대신 나중에 책임을 묻는 식입니다. 그러려면 인재를 영입해야 해요. CHA 의과학대 총장으로 박명재(朴明在) 전 행자부 장관을 모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행정의 달인(達人)이잖아요."
―그러다 누군가 배신하면요.
"그래도 사람을 안 믿을 수는 없지요."
―저 같으면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마음껏 독재를 해볼 텐데.
"다 소용없어요. 저는 병원에서 월급 타서 생활해요. 저보다 월급 많이 받는 의사도 있어요. 그 전에는 다 제 돈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법인에 맡겨놓으면 깨끗해지지요. 저도 당당해지고요."
―산부인과에서 시작해 줄기세포, 바이오 휴먼뱅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차 회장의 구상이 실현되면 인간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120세까지는 살 겁니다. 10~20년 내에 그런 시대가 올 거예요.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가 불가능하다던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게 불과 30년 전인 1978년이었어요."
―누구나 한국은 IT의 나라라고 합니다. 왜 BT를 주장합니까.
"저는 이렇게 말해요. IT는 필요지만 BT는 필수라고. 우리가 지금 이만큼 발전한 게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자동차, 조선, 전자산업에 투자를 해놨기 때문이지요. 박 전 대통령이 딱 한 가지 안 한 게 바이오산업 투자예요. 참 아쉬워요."
―하는 일마다 성공했는데 왜 빌 게이츠보다 돈이 없다고 엄살입니까.
"병원이 그리 잘되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최근 20년 동안 대학병원과 재벌병원 제외하고 성장한 병원이 있습니까? 우리와 이길여(李吉女) 선생님의 길병원 정도일 겁니다."
2009/7/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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