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들도 못 맞는 페니실린 내아들이라고 줄 수는 없다"
김신 회장이 말하는 "내 아버지 백범"
"할머니가 삯바느질로 날 키워
어려서 얼마나 원망했는지…
오늘의 대한민국 보시면 지하에서도 흐뭇해하실 것"
"얼굴이 크고, 마마 자국이 있는 남자 어른이 건장한 청년 둘과 함께 오더니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다'며 할머니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할머니는 '신(信)아, 네 아버지다' 하셨다. 아버지는 '많이 컸구나' 하면서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다."
김신(金信·8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열두 살이던 1934년 4월 아버지를 처음 만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서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절강성 가흥(嘉興)에서였다. 당시 백범 선생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이후 거액의 현상금을 내건 일본 제국주의에 쫓겨 다닐 때였다.
김신 회장은 "그후에도 중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산 적은 없다"고 했다. 일제를 피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아버지는 늘 주변을 조심해야 했고 독립운동에 바빴기 때문이다. "남경에 살 때도 할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려면 나를 시켜서 안중근 의사 사촌인 안경근에게 연락했어요. 몇 단계 경로를 거쳐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뵐 수 있었지요."
- ▲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허영한 기자 yonghan@chosun.com
26일은 일평생 독립과 건국을 위해 싸운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져 서거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서거일을 하루 앞둔 25일 낮 백범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김신 회장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6·25 전쟁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하는 등 오랫동안 공군에 복무한 탓에 한쪽 귀가 어두운 것 말고는 정정한 목소리로 '아버지 백범'을 기억해냈다.
김신 회장은 빛바랜 사진 몇장을 넘기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찍은 사진"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924년 어머니 최준례 여사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네 살 위의 형(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백범 선생은 두 살배기 아들 김신이 위태해 보였던지 등을 받쳐주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통사람 같은 부자간의 정(情)을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도 없고, 할머니가 나를 삯바느질까지 하며 키우셨으니까요.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 아버지이기 이전에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1939년 중경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엉엉 울거나 그러지 않으셨어요."
김 회장은 백범을 있게 한 데는 할머니 곽낙원 여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1938년 백범은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환의 총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 김신 회장은 아버지가 저격당한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한달 동안 입원했다가 회복한 백범이 곽낙원 여사를 찾아왔다. "동족에게 맞아 죽으면 말이 되는가. 일본 놈 총에 맞아 죽으면 모를까." 할머니는 도리어 백범을 따끔하게 몰아세웠다.
김신 회장의 형 김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상해에 잠입해 비밀공작을 벌였고, 1939년 한국광복진선(陣線)청년공작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3월 중경에서 폐병으로 숨졌다. 김신 회장은 "페니실린만 맞으면 회복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옮겨온 중경에는 연료로 쓰는 석탄 매연과 습한 날씨 때문에 폐병으로 죽어간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많았다.
- ▲ 1940년대 전반 중경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오른쪽)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김신 회장은 인도령(領) 라호르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1944년 곤명의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중국이 인도에 임대한 비행기지에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서울시민들이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와요. 아버지를 모시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썼지요. 아버지는 거절했습니다. '대장부가 군인의 길로 나섰으면 마음먹은 것을 끝내고 와야지…. 군인이든 독립운동이든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데, 도중에 돌아올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게 되면 그런 인재가 필요할 것이다'. 얼마나 섭섭했던지…."
김신 회장은 미국까지 건너가 비행훈련을 끝낸 뒤인 1947년 7월 귀국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아, 이런 세상이 다 오는구나. 기쁘고, 또 슬펐다"고 했다. 김 회장은 1948년 여름 중국에 건너가 할머니와 어머니, 형님 그리고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 선생과 차이석 국무위원 등의 유해를 수습해 귀국했다.
그 해 9월 공군 중위로 임관한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했을 때 옹진 전투지구 유엔위원단 환영회장에 있었다. 서거 소식을 듣고 비행기로 달려오는 순간 불효라는 두 글자가 번개같이 스쳐가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김 회장은 당시 잡지 '민성(民聲)'에 실은 '불효참'(不孝懺)이라는 기고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아들을 몰라야 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르면서 살아온 가정이 바로 저희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조국은 아직 슬프니라. 불행하니라. 너는 이 애비의 아들이기보다 먼저 조국의 아들, 사회의 일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김신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에 들어가 유품을 수습해보니 윤봉길 의사와 상해 의거 때 바꾼 회중시계와 도장 이외에는 변변한 물건이 없었다"고 했다. "하와이 동포들이 금시계를 보내왔는데, 며칠 뒤에 보니 없어졌어요. 누가 뭘 갖다 줘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와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면 다 내주셨습니다. 가족에게 남겨주신 것은 하나도 없어요."
- ▲ 김구 선생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과 함께 아내 최준례 여사 무덤을 찾았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념관 제공
―백범 선생 같은 분이 아버지였기 때문에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도 받고, 중국에 건너가서 온갖 어려운 일을 겪은 분입니다. 그 분이 겪으신 일은 제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고, 백범 서거 60주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교과서에 나오는 먼 옛날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우리 선배 세대들이 독립과 건국을 위해 어떤 난관을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지 젊은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백범일지'를 군(軍) 장병이나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기 위해 독후감 공모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씨를 뿌리고, 산에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하는 일이지요."(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몇 년 전부터 '백범일지'를 무료로 보급하고 독후감을 공모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백범 선생이 만약 지금 살아계신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에 어떤 점수를 주실까요.
"그야 불문가지(不問可知)지요.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도로는 쭉쭉 뻗어 있고…. 해방 이후 이만큼 성장했고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습니다. 지하에서도 흐뭇해하실 겁니다. 다만 동족 간에 전쟁까지 치렀는데 60년이 다 되도록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하실 겁니다."
김신 회장은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1922년 9월 아버지 김구 선생이 망명 중이던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최준례 여사는 그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1924년 1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그 후 그를 키운 건 할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김 회장은 "배고프면 할머니 젖을 물고 컸다"고 했다.
1925년 생활이 어려워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가서 소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1934년 다시 중국에 건너왔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와 함께 장사·광주·유주를 거쳐 1939년 중경에 들어왔다. 그해 할머니가 타계한 뒤 중앙대 부속중학교에 들어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방학 때는 중경(重慶) 오사야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1층에서 책상을 이어 붙여 잠자리를 만들었다.
1943년 곤명에 있던 서남연합대학을 다니다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해방 이후 미국에 건너가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했다. 1948년 9월 공군 중위로 임관, 공군본부 작전국장·제10전투비행단장 등을 거쳐 6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주대만 대사와 교통부 장관, 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백범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차남이다.
200/6/26,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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