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여호와를 바랄 때

하마사 2007. 12. 22. 19:07
 

본문: 시 27:1-14                               찬송: 394장

제목: 여호와를 바랄 때

목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한다.

 

다윗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말은 소망 중에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면 어떤 좋은 일이 있기에 소망 중에 인내하면서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할까요?


여호와를 바랄 때 하나님은 나의


1. 빛이 되십니다(1).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이 나의 빛이 되시면 두려워하거나 무섭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탄광이 매몰되어 수일간 암흑가운데 있던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어떻겠습니까? 빛이 없는 암흑 속에 있는 두려움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어둠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환경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삶속에도 암흑과 같은 환경이 엄습하여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어려움, 자녀들의 탈선이나 좌절로 인해 암흑 속과 같은 절망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산다할지라도 스스로의 동굴에 갇혀 빛을 못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죄의식에 의해서, 혹은 과거의 잘못된 기억으로 인해 우울증으로 자기를 동굴에 가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동굴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그 환경에 익숙해집니다. 어두움에 익숙하여 빛으로 나오기 싫어합니다.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동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동굴, 질병의 동굴, 두려움의 동굴, 열등감의 동굴, 슬픔의 동굴, 사망의 동굴과 같은 각자의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 어두움의 환경에 익숙해지면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고 나중에는 빛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밤에 자다가 일어나 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바삐 어둠속으로 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을 좋아하고 밤의 문화를 좋아하여 죄의 늪으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빛을 좋아해야 합니다. 어둠의 동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 여러 힘든 훈련들이 있었지만 행군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1주일동안 먹고 자고 밤을 새워 산악행군을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1주일에 천리를 행군하고 부대로 복귀할 때는 녹초가 됩니다. 그런데 부대 근처에 오면 희망의 불빛이 힘을 내게 하곤 했습니다. 부대가 부천에 있었는데 부대 앞에 소래송신탑이 있었습니다. 높은 송신탑인데 밤에는 멀리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불빛을 보고 조금만 참고 인내하면 부대에 도착하여 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곤 했습니다. 송신탑의 불빛을 목표로 삼고 새벽에 부대 앞에 도착했다가 환영나온 부대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복귀할 때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빛이 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십니다.

요 8:12에서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말씀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시면 아무리 밖은 어둡고 캄캄해도 속사람은 밝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빛으로 삼고 살아갈 때 소망이 있고 힘이 생깁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중심에 빛되신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금의 환경이 어둡고 캄캄한 감옥이라 할지라도 마음만은 빛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하나님이 등불이 되시면 나의 삶의 환경에 드리워지는 흑암을 밝혀주실 수 있음을 믿을 때 좌절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바랄 때 하나님은 나의


2. 구원이되십니다(1-3)

1-3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지난 여름에 휴가를 동해안으로 갔었는데 아이들을 위해 구명조끼를 구입했습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깊은 물에 들어가더라도 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기에 만약을 위해 구입했습니다. 위험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불편하고 거추장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필요한 장비입니다.

예수님도 구명조끼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평상시에는 예수님 믿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천국갈 때는 반드시 필요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평상시에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면 인생의 바다를 헤엄칠 때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구리뱀을 장대에 달게 하고 쳐다보는 사람들은 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믿고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이처럼 구리뱀을 쳐다보듯이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귀의 이빨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받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살아납니다.

대적과 원수된 행악자가 다윗의 살을 먹으려고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다고 했으며 군대가 대적하여 진을 칠찌라도 두렵지 아니하고 전쟁이 일어나 치려할찌라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심을 믿고 오히려 안연하다고 고백합니다. ‘안연’이란 말은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죽을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평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홍해 앞에서 사면초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볼 때 홍해가 갈라져서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해주시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 가운데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다윗을 사울의 칼날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만의 흉계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에스더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금곡평강교회에서 눈길로 인해 교통사고를 면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구원해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바랄 때 하나님은 나의


3. 능력이 되십니다(1, 5-6).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5-6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물론 여기서 능력이란 뜻은 ‘피난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산성, 방패, 요세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피난처에 머물러만 살도록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5절을 보면 환난 날에 하나님이 초막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은밀한 곳에 숨기실 뿐만 아니라 바위위에 높이 세워주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머리가 원수를 내려다보며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며 피난처가 되시지만 우리를 높여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능력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은 힘과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삼하 22:30).

하나님이 힘이시니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적군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며 성벽을 뛰어넘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시고 힘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인 적을 향해서 돌진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러 문제의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죄의 성벽, 사망의 성벽, 욕심의 성벽, 질병의 성벽, 가정의 성벽, 인관관계의 성벽, 열등감의 성벽, 물질의 성벽, 아집과 고집의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여러 가지 성벽들을 내 힘으로는 넘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힘주시면 반드시 넘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린 딸 지은이와 함께 길을 가면서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더 어릴 때는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더니 어느 때가 되니까 자기를 잡지 말아달라고 손을 뿌리칩니다. 혼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가다가도 고양이가 온다든지 개가 짖으면 얼른 뛰어와 손을 잡고 안아달라고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피하거나 이길  수 없기에 아빠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빠의 팔에 안기면 자기가 무서워하는 고양이나 개가 있어도 그 앞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아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넘을 수 없고 이길 수 없는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는 일이 많습니다. 구역장, 권찰, 교사, 찬양대원 등 여러 기관에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일꾼들을 세웁니다. 금년에도 남여선교회 회장단을 구성하면서 힘든 일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들어보면 모두가 합당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기에 권면을 합니다. 작년에도 이렇게 하여 일군들을 세웠습니다. 못한다고 하시던 분들이 일년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잘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분들 중에는 감사의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못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힘주셔서 감당할 수 있었다며 고백합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듯이 하나님이 능력과 힘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힘만 생각하며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 못합니다. 그러나 못해도 하나님이 힘주시면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은 나의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늘 바라면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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